무한자비와 파지옥의 지장보살

♣ 끝없는 용서와 사랑의 보살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지장경" <촉루인천품(囑累人天品)>을 통하여 지장보살을 다음과 같이 찬탄하셨다.
"지장, 지장이여.
그대의 신력(神力)이 불가사의하도다.
그대의 자비(慈悲)는 불가사의하도다.
그대의 지혜(智慧)는 불가사의하도다.
그대의 변재(辯才)는 불가사의하도다.
시방(十方)의 모든 부처님이 천만겁 동안 찬탄할지라도 그대의 불가사의한 공덕은 다 말할 수 없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지장보살의 지혜와 자비뿐만이 아니라,
신통력과 방편의 능력인 변재까지도 불가사의하다고 하셨다.
불가사의(不可思議)! 우리의 생각으로는 가히 측량을 하거나 헤아려 볼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공덕을 갖추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장보살께서는 갖고 계신 그 불가사의한 공덕을 조금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모두를 중생의 안락(安樂)을 위해서만 사용하신다.
바꾸어 말하면, 지장보살의 무한한 신통력과 자비와 지혜와 변재의 공덕은 오직 사바세계의 중생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들 중생의 삶은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우리들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
남을 위하기보다는 '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자유와 행복의 삶을 얻기보다는 '나'의 굴레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세계에 갇혀 꼼짝하지 못하는 중생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야말로 악한 씨를 심으면 고(苦)의 과보를 받고,
선한 씨를 심으면 낙(樂)의 열매를 거둘 뿐, 그 이상의 삶을 이루지 못한다.

한량없는 과거의 생애를 살아오면서 몸과 말과 뜻으로 지어 온 바를 따라 순간순간 현재와 같은 모습을 나타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업보중생(業報衆生)'이라고 하셨다.
지은 바 업에 따라 윤회를 하고, 지은 바 업에 의해 행복과 불행을 맞이하게 되는 중생이라는 뜻이다.

결코 인과응보의 현실, 정해진 업을 면하기 어렵다는 '정업난면(定業難免)'의 영역을 뛰어넘지 못하는 '업덩이' 같은 존재가 업보중생인 것이다.
그러나 지장보살의 이름 아래에서는 '정업난면의 업보중생설'이 적용되지 않는다.
가벼운 잘못은 물론이요,
중생의 가장 무거운 죄업이 만들어낸 지옥조차도 지장보살의 자비와 신력 앞에서는 없어져 버린다

곧, 업보중생이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보살을 향하면 지장보살과 하나가 되고, 지장보살과 하나가 되면 모든 업이 지장보살의 크나큰 본원력(本願力)에 의해 녹아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왜? 지장보살의 근본 서원이 끝없는 용서요 사랑이기 때문이다.

지장보살의 끝없는 용서와 끝없는 사랑! 이를 증명하는 옛 이야기를 한 편을 함께 음미해 보자.

중국 당나라의 옹주(擁州) 운현(雲懸) 지방에 이씨(李氏) 부인이 살고 있었다.
신심이 매우 두터웠던 그녀는 불교를 받듦에 있어 정성을 다하였고, 집에서도 꾸준히 수행을 하였다.

어느 날 이씨 부인은 집안에 불상을 모시면 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약 50cm 크袖?목조 지장보살상을 모시게 되었고, 그 뒤부터 집안에는 좋은 일이 날로 더하였다.

하지만 이씨 부인에게는 소견이 삿되고 불교를 믿지 않을뿐더러,
주인이 지장보살을 모시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50세 가량의 여종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여종은 이씨 부인이 외출한 틈을 타서 지장보살상을 들고 나가 앞산 기슭의 풀숲에다 던져버렸다.
외출을 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온 이씨 부인은 지장보살상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찾을 수 없자 슬픔을 가눌 길 없어 해가 저무는 것도 잊은 채 눈물을 짓고 있었다.
그때 문 밖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씨 부인이 밖으로 나가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앞산 기슭의 풀숲에서 기이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아!'
직감으로 느낀 이씨 부인은 풀숲으로 달려갔고,
그곳에는 생명처럼 모시던 지장보살상이 모로 누운 채 빙긋이 웃고 계셨다.
이씨 부인은 지장보살을 정성껏 다시 봉안하고 눈물과 웃음이 섞인 감동으로 예배하고 염불하였다.

그러나 이씨 부인은 그것이 여종의 소행이라는 것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자 여종이 갑자기 쓰러져 인사불성의 상태에 빠져버리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이씨 부인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구완하자, 여종은 얼마 뒤 부시시 깨어났다.

그리고는 통곡을 하며 말하였다.
"마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용서하여 주십시오.""용서라니? 도대체 왜 그러느냐? 자세히 말하여 보아라."

"저는 조금 전에 말을 탄 누군가에게 잡혀 정신없이 끌려가다가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그곳은 명부(冥府)였으며, 관리 하나가 서첩을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대왕이시여, 이 죄인은 성상(聖象)을 내다버리는 대죄를 범하였습니다.
마땅히 지옥의 큰 고통을 받게 해야 합니다.'
염라대왕은 곧 심판을 내리려 하고, 저는 큰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떨고 있을 때.
한 스님께서 그곳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러자 상석에 앉아 있던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내려와 공손히 맞이하고는 저의 죄과를 자세히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이 여인은 나의 단월(檀越:신도) 집에서 일하는 종입니다.
비록 나의 형상이 보기 싫다고 하여 내다버리기는 하였으나, 나는 저 여인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저 여인을 불쌍히 여겨 다시 살려주십시오.'

'저 죄인은 지옥에 떨어져 혹독한 고초를 받아야 마땅하나. 보살님의 말씀이니 따르겠습니다.'염라대왕은 곧 저를 방면하였으며, 저는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제가 불교를 좋아하지 아니했고 지장보살님을 내다버린 것을 뼈아프게 참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꿇어앉아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무지장보살'
그러자 명부 안의 죄인들에게 채워져 있던 고랑쇠가 모두 벗겨져 버렸습니다.
그때 스님께서 저의 손을 이끌어 염라청을 벗어나게 하는 순간, 저는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마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야기를 마친 여종은 이씨 부인 앞에 엎드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이씨 부인은 그녀를 달래어 지장보살상께 예배를 드리며 참회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고을 사람들은 크게 신심을 일으켜

불교를 받들고 지장보살을 깊이 신봉하게 되었다.
"지장보살영험기'에 수록되어 있는 이 이야기는 불자인 우리를 너무나 따스하고 편안하게 해주고 있다.
만약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종교의 절대신이었다면,

자신의 상을 혐오하고 내다버리기까지 한 그 여종을 어떻게 하였을까?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더한 징벌을 가했을지도 모른다.
자비를 베풀지라도 '죄없는 자는 돌을 던져라'고 하는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그런데 지장보살은 어떻게 하였는가? 염라대왕에게 부탁하여 그녀의 죄를 용서토록 하였을 뿐 아니라, 그녀를 깨우쳐 새 삶의 길로 인도하여 주었다.
나아가 '나무지장보살'이라는 그 한마디 소리에 명부 중생의 고랑쇠를 모두 벗겨버렸다.

정녕 지장보살은 죄의 무겁고 가볍고를 따지지 않는다.
믿고 따르는 이는 물론이요, 돌아서고 욕하고 해하는 자들까지 인연있는 중생이면 누구나 다 수용하신다.
오직 중생애민(衆生愛愍)의 비심(悲心)으로 끝없이 사랑하고 끝없이 용서할 뿐이다.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또 불쌍히 여기는 지장보살! 중생을 용서하고 또 용서하며,
모든 죄업의 감옥을 부수어 버리는 지장보살! 지장보살의 존재 목적은 중생 구제와 성불의 길을 열어주고자 하는 것뿐이다.

그 어떤 중생이라도 지장보살을 염할 때 고통의 현실은 사라지고 고난의 감옥은 부서진다.
우리가 살아 있건 죽어 있건 지장보살의 사랑은 끝이 없다.
열 번 백 번도 용서할 수 있는 지극한 사랑으로,

중생의 업(業)이 만들어 낸 갖가지 장애와 부자유의 감옥들을 부수고,
행복의 세계로 성불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실로 우리가 지장보살의 끝없는 용서와 사랑을 배워 우리들 마음속에 간직한 응어리들을 풀고 탐착을 떠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도 또한 지장보살과 같은 신통력과 방편력과 자비와 지혜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이어늘.

♣ 명부세계와 지장보살

이제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있는 명부전(冥府殿)의 내부를 조명해 보면서,
죽은 이가 심판을 받는다는 명부세계와 지장보살의 관계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 곧 명부세계를 사찰 속으로 옮겨 놓은 전각이다.
이 전각 안에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고,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필자가 옛 사찰들의 사적기(事蹟記)들을 조사해 본 결과,
적어도 조선 초기 이전까지는 '명부전'이라는 전각이 사찰 안에는 없었고,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신 전각이 각각 '지장전'과 '시왕전'이라는 이름으로 분리 독립되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지장보살과 시왕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명부전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특유의 사찰 전각이라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만 지장보살과 시왕을 함께 모신 명부전이 생겨나게 된 까닭은 무엇이며,
언제부터 명부전이 사찰 속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일까?
그 해답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교의 신앙 형태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 땅의 특수한 상황에서 찾아야 한다.

불교 자체를 말살시키려 했던 조선 왕조의 억불정책 속에서도 불교가 인정받을 수 있었던 그나마의 명목은 조선 왕조가 숭상했던 효(孝)에 관한 불교 의식이었다.
비록 조선 왕조가 불교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부모에게 효도하고 죽은 부모를 좋은 세상으로 보내게 하기 위한 불교 신앙과 의식만은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그 어떤 의식보다 망인천도(亡人薦度)의 재의식(齋儀式)이 발달하였고,
지장보살 또한 모든 중생을 성불시킨다는 맹세보다,
명부시왕의 무서운 심판에서 망인을 구하여 주는 유명계의 교주 역할만이 크게 강조되었다.

그 결과, 망인의 형벌 및 새로 태어날 세계를 결정하는 심판관 시왕과 망인을 자비로써 인도하는 지장보살과의 결합은 보다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마침내 독립되어 있었던 지장전과 시왕전을 명부전이라는 이름으로 결합,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 최초의 시기는 고려 말 조선 초기로 추정된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시대 불교는 철저한 억압으로 인한 재정적 빈곤 때문에 새로운 전각인 명부전의 건립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다행히 임진왜란 때의 승병 활동으로 나라에서 다소나마 억압의 고삐를 늦추게 되었고,
불교계에서는 이 시기를 맞아 유교의 이념에도 맞는 명부전을 많이 건립하였던 것이며,

오늘날 오래 된 대부분의 사찰에 명부전이 있는 까닭도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현존하는 여러 명부전의 구조를 살펴보면 중앙에 위치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를, 오른쪽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봉안하여 삼존불을 이루게 한다.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하며, 시왕상 앞에는 시봉을 드는 동자상 10구를 안치한다.
이밖에도 대왕을 대신하여 심판을 하는 판관(判官) 2인,
기록과 문서를 담당하는 녹사(錄事) 2인,
문 입구를 지키는 장군(將軍) 2인 등을 마주보게 배치하여 모두 29체(體)의 존상을 갖추게 된다.
또한 지장보살의 뒤쪽 벽에는 지장탱화(地藏탱畵)를 봉안하고,
시왕의 뒤편으로는 명부시왕탱화를 봉안하게 된다.

이들 가운데,
중생이 죽은 뒤 명부의 대왕들 앞에서 생전에 지은 죄를 심판받는 모습을 묘사한 시왕탱화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보통 시왕탱화를 명부전에 봉안할 때는 1대왕씩 10폭으로 묘사하거나

5대왕씩 2폭으로 묘사하여 봉안하며, 중앙 지장보살의 왼쪽에는 1, 3, 5, 7, 9의 홀수 대왕 그림이, 오른쪽에는 2, 4, 6, 8, 10의 짝수 대왕 그림이 배치된다.

또한 각 그림의 내용은 크게 상단과 하단부로 대별된다.
상단부에는 10대왕을 중심으로 시녀(侍女), 판관(判官), 외호신장(外護神將)들이 둘러 서 있고, 그림의 상 하단을 구름으로 구분한 다음,

그 아래 하단부에는 형벌을 받은 죽은 사람과 형벌을 가하는 사자(使者)와 귀졸(鬼卒),
죄인의 앞에서 지은 죄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읽어주는 판관 등이 그려져 있다.

상단부의 10대왕 가운데 마지막 전륜대왕(轉輪大王)만이 투구와 갑옷을 입은 장군의 모습일 뿐,
나머지 아홉 대왕은 관을 쓰고 붓과 홀(笏)을 잡고 있는 왕의 모습이다.
모든 대왕의 앞에는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필기 도구들이 마련되어 있다.

이제 하단부의 그림을 살펴보자.
제1 진광대왕도(秦廣大王圖)에는 죽은 자를 관에서 끌어내는 장면,
이미 끌려온 자들이 목에 칼을 차고 판관의 질책을 듣는 장면,
관 속에 든 죄인의 배를 징으로 내리쳐 가르는 모습 등이 묘사된다.

제2 초강대왕도(初江大王圖)에는 관에서 나온 이가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거나 칼을 차고 고통을 받는 모습,
배꼽에 호스를 연결하여 살아 생전에 축적한 탐욕의 기름을 뽑아내는 장면 등이 묘사된다.

제3 송제대왕도(宋帝大王圖)에는 형틀에 맨 죄인의 혀를 길게 뽑아내고,
소가 쟁기로 밭을 갈 듯이 죄인의 뽑혀진 혀를 쟁기로 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제4 오관대왕도(五官大王圖)에는 죄인을 가마솥의 끓는 기름 속에 넣어 고통을 가하는 모습이,

제5 염라대왕도(閻羅大王圖)에는 업경대(業鏡臺)로 죽은 이의 지은 죄를 비춰보는 장면과 죄인을 방아에 넣어서 찧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제6 변성대왕도(變成大王圖)에는 무수한 칼이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솟아있는 도산(刀山) 속에서 죄인이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고,

제7 태산대왕도(泰山大王圖)에는 죄인을 형틀에 넣어 톱으로 써는 모습,

제8 평등대왕도(平等大王圖)에는 죄인을 바윗돌로 눌러서 압사시키는 모습,

제9 도시대왕도(都市大王圖)에는 죽은 이의 지은 죄를 적은 두루말이를 저울로 달아 무게를 다는 모습과 죄인들이 얼음 속에서 발가벗은 채 떨고 있는 모습,
대왕 이하 모든 권속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장보살을 우러러보며 합장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제10 오도전륜대왕도(五道轉輪大王圖)에는 모든 재판과 명부의 형벌을 끝낸 중생들이 다시 아귀, 축생, 인간 등으로 태어나기 위해 길 떠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명부는 고통이 매우 심한 곳이고, 10대왕은 고통받는 명부의 죄인을 관장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왕의 위덕을 비는 10재(齋)를 베풀도록 하고 있다.

이는 ,예수시왕생칠경,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시왕이 각각 망인을 심판하는 초 7일, 2,7일, 3,7일, 4,7일, 5,7일, 6,7일, 7,7일과 100일째 되는 날, 1주기, 2주기 때 재를 베풀어 죄업을 사하도록 한 것이다.
앞의 일곱 번을 우리는 49재,
그리고 뒤의 셋을 백재(百齋), 소상재(小祥齋), 대상재(大祥齋)라 지칭하고 있다.

시왕의 심판 및 시왕탱화에 나타난 망인의 고통과 관련된 이와 같은 재는 후손들이 망인을 위해 대신 공덕을 쌓아,
망인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좋은 세상에 태어나도록 하기 위한 효심의 발로라는 사실을 다같이 기억해야 한다.

지장보살이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하였듯이, 참된 효심이야말로 조상을 죄업의 고통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왕탱화에서, 우리가 특별히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각 탱화 속에 반드시 묘사되어 있는 지장보살의 모습이다.

지장보살은 시봉하는 제자를 데리고 명부의 고통받는 중생들 옆에 서 있다.
때로는 판관에게 죄인을 용서해 줄 것을, 때로는 죄인에게 죄업을 면하는 방법을 일러주신다.
슬픈 표정으로 두 손을 모으고 죄인들과 함께 하는 지장보살로 인해 시왕의 신앙까지 참다운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명부전! 그곳을 들어서면 우리는 섬뜩하다.
그곳은 명부에 간 조상을 깨우치는 곳만이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승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이 생을 끝내고 명부에 이르렀을 때,
10 대왕으로부터 받게 될 심판을 생각해 보는 곳이기도 하다.

옛날 한 부자가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어 시신을 장지(葬地)로 옮길 때, 나의 두 손은 반드시 상여 밖으로 나오도록 하라."
유언에 따라 가족들은 상여를 메고 갈 때 두 손을 상여 밖으로 내어놓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사람들아 보아라.
나는 돈도 많고 집도 크고 권속들도 많지만,
오늘 이때를 당하여 나 홀로 간다.
부귀영화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더냐.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 평생 모은 재산도 가져갈 수 없으며,
오직 지은 바 업(業)만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이처럼 죽음과 저승을 느끼며 현세에 내가 해야 할 바를 생각해 보는 곳이 명부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볼 때, 명부전은 두려움의 장소가 아니라 진정한 자비를 느끼는 곳이다."한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않는 이가 있으면 나 또한 성불하지 않으리라."고 하신 지장보살의 본원을 되새겨 보는 크나큰 자비의 도량이다.

우리는 명부전을 지성의 참회 도량으로 만들어야 한다.
단순히 명복을 비는 장소가 아니라,
참되게 사는 길과 스스로의 진실을 체험하는 본원(本願)의 도량으로 가꾸어야 하리라.

파지옥(破地獄)

마지막으로 사랑과 용서의 극치를 여실히 나타내어 주는 '지장보살의 파지옥'을 이야기하면서 이번 호의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불교에서는 지장보살을 '파지옥의 대보살'이라 칭한다.
결코 죽은 이로 하여금 명부시왕의 심판을 잘 받을 수 있게끔 하는 것으로 끝내는 분이 아니라,
지옥을 완전히 없애고자 하는 분이 지장보살이기 때문이다.

파지옥. 원래 지옥이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중생의 악한 마음, 지극한 이기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가 지옥이다.
자유로운 하늘의 세계와는 달리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무거운 업보가 땅속 감옥인 지옥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옥은 한없이 고통의 세계이다.
그 고통은 평범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아니,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불생의 양상을 모아놓은 곳이 지옥일 수도 있다.
잠시
"지장경" <지옥명호품>에 묘사되어 있는 지옥중생의 처참한 모습을 살펴보자.

어떤 지옥은 죄인의 혀를 뽑아내어 소로 하여금 갈게 하고,
어떤 지옥은 죄인의 심장을 빼내어 야차(夜叉)가 먹으며,
어떤 지옥은 죄인의 몸을 끓는 가마솥 물에 삶으며,
어떤 지옥은 죄인으로 하여금 벌겋게 달군 구리쇠기둥을 안게 하며,
어떤 지옥은 맹렬한 불덩이가 죄인을 쫓아다니며 태우고,
어떤 지옥은 온통 차가운 얼음뿐이며,
어떤 지옥은 끝없는 똥오줌이며,
어떤 지옥은 빈틈없이 화살이 날며,
어떤 지옥은 죄인을 많은 불창으로 찌르며,
어떤 지옥은 쇠몽둥이로 죄인의 가슴과 등을 치며,
어떤 지옥은 죄인의 손과 발만을 태우며,
어떤 지옥은 무쇠로 된 뱀이 죄인의 온몸을 감으며,
어떤 지옥은 무쇠 개가 죄인을 쫓으며,
어떤 지옥은 무쇠 나귀가 뒤에 매단 채 끌고 다닌다.

한마디로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지옥,
그 지옥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 고통받는 지옥중생을 남김없이 구하고자 하는 분이 있다.
그 분이 바로 지장보살이시다.

지장보살은 지옥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그곳으로 들어가는 중생을 못 들어가도록 막는다.
때로는 여말대왕의 몸으로,
때로는 지옥졸(地獄卒)의 모습을 나타내어 고통받는 지옥 중생에게 설법을 한다.
때로는 지옥 그 자체를 부수어서 모든 지옥 가족을 천상이나 극락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중생과 함께 하는 한, 지옥은 계속 생겨난다.
그리고 지옥이 있는 이상 지장보살은 지옥을 떠나지 않는다.
지장보살은 수많은 분신들을 지옥의 요소 요소에 배치하여 고통받는 중생의 해탈은 물론 그릇된 마음의 중생을 교화하고 영원히 지옥을 없애고자 잠시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지장보살의 자비와 원력은 '파지옥'에만 이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장보살은 현세의 행복과 내세의 안락을 함께 보장하며,
나아가 뭇 생명있는 자들을 성불토록 하여 이 윤회하는 세계 자체를 없애고자 하는 '파사바(婆娑婆)의 보살'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원력과 자비를 담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윤회를 벗어나 적멸위락(寂滅爲樂)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지장신앙의 참뜻이며, 지장보살이 존재하는 진정한 까닭임을 기억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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