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손길로 단장하는 마지막 길


사람이 죽고 나면 바로 제단을 마련하고 장례식을 치릅니다. 그 기간은 보통 3일 정도로 이루어지는데 이때 생전에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 찾아와 영가의 넋을 기립니다.


이 3일 동안 임종자를 염습하고 입관식까지 마치게 됩니다. 앞서도 얘기를 한 바 있지만 이 시기는 영가가 채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해 황망해하는 시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족들의 진심어린 기도와 배려가 필요합니다.
혹여 영가가 생전에 삼귀의와 오계를 받지 않았다면 스님을 모시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케 하여 계를 받도록 하면 좋습니다. 그리고 염습, 착의, 착관, 입관의 절차가 이루어지는 동안 내내 무상계를 독송해 주고 틈틈이 나무아미타불 계속 염송해 주십시오.


이때 가족들은 그저 입으로만 염송할 것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왜 아무타불을 염송해 주는지, 왜 무상계를 독송해 주는 지 영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그래서 영가가 그 뜻을 바로 알고 함께 아미타불을 염송하도록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일러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열반의 세계로 떠나시는 영가시여!
삼라만상이 흩어져도 변함없으며 생사에도 걸림이 없으며 천지만물보다 먼저 존재하였고 천지 만물보다 오래 존재하는 한 물건의 정체를 바로 아시고 평화로운 열반의 세계로 향하도록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일러드리고자 하오니 이 법단에 오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 인연 다해 목숨이 사라졌으니 모든 것이 덧없음을 다 알아 열반을 얻으면 즐거움이 되오리다.
또한 평생 동안 지은 죄도 임종시에 일념으로 염불하거나 자손들이 한마음으로 염불하면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선업으로 변하나니 함께 아미타불 명호를 부르시옵소서.

3일 간의 장례 절차가 끝나고 나면 영구를 상여로 옮겨서 장지로 떠나게 되는데 이때 지내는 제사를 발인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떠나는 의식을 영결식이라고 합니다. 불자님 가정의 경우라면 이때에도 스님을 모시고 불보살님의 위신력에 의지해 영가를 천도해 주면 좋습니다.


불교의식으로 치르는 발인제 절차를 대략 살펴보면, 부처님을 청하는 거불, 영혼을 법단으로 불러오는 창혼과 반혼착어, 향과 차 등의 공양물을 올리며 영가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가지공양, 보공양진언, 아미타불 정근, 그리고 영구를 옮기는 기감, 관을 들고 절을 하는 보례로 이루어집니다.


발인제와 영결식은 임종자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평생 애지중지 해 왔던 육신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영가에게 참을 수 없는 큰 슬픔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발인제와 영결식문은 영원한 안식처로 인도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시는 중생 몸 받지 말고 극락으로 향하소서. 이 한마디는 임종자의 마지막 가는 길에 가장 보배로운 마음의 전언인 까닭입니다.

49재에 읽으면 좋은 경전


부처님 말씀 어느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 아니고 지혜의 말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9재를 맞아 유독 읽혀지는 경전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금강경인데 그 중 사구게(四句偈)가 자주 독송되고 있습니다.


금강경은 부처님 십대제자 가운데 해공제일 즉, 공(空)사상의 으뜸인 수보리존자와 부처님이 대화로 이루어진 경전입니다.
금강경의 주된 내용은 한 마디로 공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無@住而生@心)” 즉 일체의 것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의 주인이 되라는 메시지가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금강경은 다른 경전에 비해 유독 선사들에게 더욱 많이 읽혀졌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육조 혜능조사도 이 금강경을 읽고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금강경은 그만큼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고 마음의 주인이 되는 법등과 같은 경전인 것입니다.


또한 금강경 사구게에 보면 “모든 모습을 모습 아닌 것으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라는 경구가 나오는데, 이는 중유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환영으로부터 영가가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친숙하게 여기는 천수경과 반야심경 또한 49재 때 빠지지 않고 독경됩니다. 천수경은 제불보살 모두를 칭송하면서 그 공덕으로 집착을 여의고 마침내 부처가 되기를 서원하고 다짐하는 경전입니다.
천수경은 그 내용이 구체적이라 다른 경전에 비해 독경할 대 그 내용이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영가에게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홀로 가기엔 두렵고 막막하기만 한 저승길에 듣는 천수경은 제불보살님에 의지해 반야선을 탄 듯 한결 마음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대반야경 600권의 사상을 260자로 짧게 함축해 부처님 가르침의 진수만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육신이나 감각에 구애되지 말고 또 그 모든 것이 허구임을 바로 알아 무상정각(최고의 깨달음)을 얻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자라면 누구나 수지 독송하면서 피안을 향하는 수행의 걸음을 늦추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49재 때에 빠지지 않고 항상 독송하는 것으로는 무상계가 있습니다. 무상계는 영가에게 무상의 법을 설하는 내용으로 49재 뿐 아니라 모든 불교의례 과정에서 항상 읽혀지고 있습니다. 육신이 어떻게 흙으로 돌아가며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떻게 소멸되어 가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 줌으로써 영가가 비로소 무상의 도리를 깨달아 불국토에 들 수 있도록 인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무상계란 열반에 들어가는 문이요 고통의 세계를 뛰어넘는 문이다”라는 첫 구절이 말해 주듯이 무상을 바로 아는 것이 깨달음을 이루는 길임을 영가와 남아 있는 우리 모두가 깊이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아미타경과 지장경 또한 49재에 빼놓을 수 없는 경전입니다.

 

아미타경은 서방정토 즉 극락세계를 관장하시면서 법을 설하고 계신 아미타부처님의 대원력과 위신력을 설해 놓은 경전입니다. 고통도 미움도 괴로움도 없는 극락정토는 사바세계에 사는 중생들에겐 그립고 또 그리운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아미타경을 읽어보면 극락세계로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중생구제의 원력이 큽니다. 그러므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생각하면 정토에 왕생할 수 있습니다. 임종자에게나 영가에게 아미타불을 염송하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을 정리하면서 일어나는 복잡한 마음을 오로지 아미타불께 의지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왕생극락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이며 위신력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갑작스럽게 아미타불을 염송한다고 입에서 술술 나오지는 않습니다. 매순간 틈틈이 계속해서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염원해야 삼매에 들듯이 아미타불과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영가의 가족과 친지들은 영가가 다른 환영에 끄달리지 않도록 49일 동안 정성을 다해 들려 주어야 합니다.


지장경은 대원본존 지장보살님의 원력을 설해 놓은 경전입니다.

 

지장보살님은 일찍이 정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되기를 마다하신 분입니다. 지옥의 중생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 또 사바의 중생들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 고통받는 중생들 곁에 있겠다는 대원력을 펼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지장보살님께 귀의 참회하면 그 동안 쌓아온 크고 작은 모든 업이 지장보살님의 원력으로 소멸됩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지장보살님을 일념으로 염하면 업장이 소멸되어 더 이상 업에 끄달리지 않습니다. 업이 두터운 영가는 중음신으로 떠돌면서 무섭고 험악한 환영 때문에 큰 괴로움을 겪게 되는데, 이럴 때 지장보살님께 의지하게 해 준다면 영가의 업장은 소멸 되어 바른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외에도 법성게를 비롯해 법화경, 원각경 등 다른 대승경전도 영가에게 들려주면 좋습니다. 그리고 삼칠일 동안 영가를 위해 광명진언(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타야 훔)을 외우는 것도 좋은데, 광명진언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힘으로 영가가 좋은 인연을 맺도록 하는 신령스러운 힘이 있다고 합니다.
49재를 맞아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경전을 읽어 주는 것은 영가의 바른 천도를 위해서입니다. 어느 경전이 더 좋다 나쁘다 할 것 없이 모두 다 영가에게는 법등(진리의 등불)의 역할을 해 줍니다. 영가가 생전에 특별히 가까이 했던 경전이 있다면 그 경전을 읽어 주면 더욱 좋습니다.


그리고 여유가 있으시면 49일 동안 위의 경전들을 사경(손수 베껴 씀)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법보시를 한다면 그 공덕이 수승할 것입니다.

1백 개의 돌을 물 위에 띄우는 힘


‘아미타불을 진심으로 염원하면 극락왕생한다’ ‘지장보살님을 염원하면 업장이 소멸된다’ 그 외 다른 경전에도 이러한 불보살님들의 위신력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구를 대할 때 한편으로는 의지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그럴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한평생 지은 악업이 수미산만한데 아미타불을 한 번 염송했다고 해서 왕생극락할 수 있는 것인지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밀린다왕문경에 보면 밀린다왕과 수행자 나가세나와의 흥미로운 대화가 나옵니다.
밀린다왕이 어느 날 수행자 나가세나 스님에게 여쭈었습니다.


“스님! 세상에 있으면서 백 년 동안 악행을 한 사람이라도 임종시에 염불을 하면 죽은 후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 나가세나 스님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왕이시여! 조약돌 한 개라도 물 위에 올려 놓으면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1백 개의 돌이라도 배 위에 올려 놓으면 가라앉지 않고 물 위에 뜹니다. 부처님을 염원하는 것은 바로 1백 개의 돌을 뜨게 하는 배와 같습니다.”


한 개라도 가라앉는 돌을 1백 개라도 뜨게 만드는 배, 부처님은 이러한 배와 같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설사 그 업이 수미산만큼 두터운 영가라도 진심으로 염불을 한다면 반드시 천도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장경에도 보면 죄를 많이 지은 어미를 찾아 한 바라문녀가 지옥을 찾아가는 대목이 나옵니다. 지옥으로 들어선 바라문녀 앞에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환영이 나타납니다 이때 바라문녀는 환영에 끄달리지 않고 염불로써 두려운 마음을 씻어내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만큼 염불의 공덕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력으로 수행 정진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마음이란 늘 흔들리고 정처 없는 방황을 거듭하는 터라 수행의 마음을 곧게 지켜 나가기란 어렵습니다. 그때마다 제불보살님께 의지한다면 언제고 반드시 피안의 세계로 가 닿을 것입니다.

불보살님을 닮는 마음으로


우리가 제불보살님께 귀의하는 것은 그 분들이 세상을 바로 보는 지혜를 증득하셨기 때문이며, 집착하고 탐하고 성내는 사바의 삶이 무상함을 깨달으신 선각자인 까닭입니다.
귀의한다는 것은 그 분들을 존경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존경한다는 것은 그 분들처럼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증득해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되고 싶다고 해서 부처를 단박에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면 불보살님들의 행을 따라야만 합니다.


경전을 보면 수많은 불보살님이 등장합니다. 깨달음을 가르쳐 주시는 석가모니불을 비롯해 자비의 손길을 펴는 관세음보살님, 중생구제의 대원력을 세우신 지장보살님 등등, 이렇게 저마다 다른 손길로 다른 음성으로 그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타정신입니다. 남을 위하는 마음, 남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자비를 바탕으로 제불보살님들은 수많은 원력을 세웠습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소원이나 서원을 세웠던 분은 다 한 분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수많은 중생들을 정토 세계로 이끌까, 어떻게 하면 수많은 중생들을 고통없는 마음을 가지게 할까, 오로지 중생들의 눈빛과 마음을 헤아리는 데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불교에 귀의하였다면 우리는 이러한 이타정신을 따라야 합니다. 나를 비우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자비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49재는 그러한 행보의 하나입니다. 세상을 떠난 사람, 더 이상 내게 득이 될 것도 해가 될 것도 없는 사람, 그의 열반과 극락왕생을 위해 49일 동안 일념으로 기도 정진하는 것이 49재의 참뜻입니다.


그러기에 49재를 올리는 동안만은 부처님을 닮는 마음으로 아니 부처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영가는 좋은 인연으로 새로운 생을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49재에 스님을 모시는 이유


살다 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의식에 휩싸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은 찾을 수 없고 현실에 대한 비관으로 방황을 하게 됩니다. 이럴 때 친구의 다정한 위로, 부모님의 따뜻한 포용은 큰 힘이 됩니다. 하지만 힘은 될지 모르나 그 해답은 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평소 존경하고 진심으로 경외하는 이로부터 듣는 좋은 말 한 마디는 때로 해답으로 다가옵니다. 문득 마음이 열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보입니다.


그 말씀이 아주 특별해서라기보다는 존경하는 사람이 들려 준 말이기 때문에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까닭입니다.
49재 때 법력 있는 스님을 모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들이 건네는 한 마디보다는 법력 있는 스님이 무상의 이치를 설명해 줄 때 영가는 더욱 깊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부처님의 말씀을 빌어 영가에게 법문을 들려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지혜로써 관할 수 있는 부처님의 위신력이야말로 영가에게 큰 경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찰에서 제불보살님을 모두 모시고 법력 있는 스님의 집전으로 올려지는 49재, 거기다 가족과 친지들의 불심이 더해진다면 여법하게 영가 천도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혹시 식순이나 순서를 잘 모르더라도 집전하는 스님의 말씀을 잘 따라 하면 됩니다.

영가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49재를 올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마음가짐입니다.

건성으로 하거나 아니면 슬픔에 젖어 울며 불며 49재를 지내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극락왕생으로 염원해야 하고 진심으로 불법을 전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영가의 생각을 결코 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도 간혹 누군가에게 나의 의견이나 생각을 이해시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다행히 상대방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만약 상대방이 나름대로 자기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대충 성의 없이 설명을 한다든가 스스로도 확신이 없어서 어물어물 얘기를 하면 상대방은 절대 나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진심어린 자세와 확신에 찬 설명을 할 때 상대방은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고 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게됩니다. 한 사람의 생각을 돌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영가는 우리들보다 의식이 무려 아홉 배나 밝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이야기를 하는지 진심이 아닌 건성으로 이야기를 하는지 영가는 다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얽힌 어느 스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49재를 집전하기로 한 스님이었는데, 그날따라 스님은 하루 종일 너무 바빠서 한 끼도 공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49재를 집전하면서 내내 떡 생각만 했습니다.
제단 앞에 올려진 떡을 보면서 빨리 재가 끝나서 저 떡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식순에 맞게 염불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영가는 49재가 올려지는 두 시간 동안 불경 소리는 전혀 듣지 못하고 스님이 마음 속으로 외치는 ‘떡, 떡’하는 소리만 들었다고 합니다. 영가 또한 입으로 외는 소리가 아닌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만큼 49재를 올릴 때 가족들은 진심으로 영가의 해탈과 극락왕생을 염원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영가가 감응을 받고 한 생각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스스로 윤회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하고 49재의 중요성을 바르게 인식하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 봐도 얼마나 작은 습관 하나에도 끄달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사람, 하고 싶은 일 모두 다 자신의 오랜 습으로 선택하는데,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하면 당장 그만둘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커다란 의식의 변화를 겪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영가 천도 또한 그러합니다. 한 평생 짓고 또 지어왔던 업을 한순간에 놓아버리고 해탈을 하라고 그냥 말 한 마디 한다고 영가가 수긍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49재를 매 칠일재마다 일곱 차례에 걸쳐 올리는 참뜻도 이러한 영가에 대한 깊은 배려에서 비롯합니다.
선근이 있고 죽음을 통해 삶의 무상을 느낀 영가라면 법문을 듣고 바로 깨우침을 얻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해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수시로 정법(正法,올바른 가르침)을 들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가의 마음을 흔들어 삶의 무상을 뼈아프게 깨우치게 할 수 있습니다. 삶의 무상함도, 윤회의 이치도, 극락왕생의 염원도 자꾸만 들려 주어야 영가도 듣고 또 들으면서 점차 좋은 쪽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아 가족들은 49재를 올리는 49일 동안 단 하루도 마음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나쁜 일도 하지 말고 험한 말도 하지 말고 오직 불심으로 영가 천도를 염원해야만 합니다.


9재에 임해 서로 나눠야 할 이야기


반드시 지켜야 할 일들


예로부터 상갓집에 가서 쌈밥을 먹으면 안 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상추쌈을 싸서 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먹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아서입니다.


영가는 세상을 떠났는데 조의를 표하려고 온 사람은 입을 크게 벌리고 먹거리를 탐한다면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언제부턴가 상갓집에 가면 곡소리보다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이야기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영가를 위해 곡을 하는 것은 크게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너무 잔칫집처럼 마음껏 술자리를 벌이는 것 또한 좋지 않습니다. 보기에도 그렇고 영가에게도 외람된 일입니다.


임종 후 49일 동안 우리는 내내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떠나간 사람을 위해 마지막으로 지켜줘야 할 도리입니다. 이제 49일 동안 지켜야 할 것들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살생을 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영가 천도를 위해 49재를 올리면서 정작 본인은 악업을 짓고 있다면 오히려 영가에게 큰 해가 됩니다.


지장경 제7품에 보면 지장보살이 부처님께 영가 천도를 위해 지켜야 할 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추려 보면 “산 목숨을 죽이거나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으로는 털끝만큼도 망자를 이롭게 하는 일이 못 될뿐더러, 업연만 맺어서 더욱 죄를 깊고 무겁게 한다. 또한 영가가 내세나 현생에 성스러운 인연을 만나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하더라도, 임종할 때에 그 가족들이 악을 지으면 그 원인으로 죽는 사람에게 큰 해로움을 주게 되는데, 어찌 차마 권속들이 업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49일 동안 살생과 악업을 짓는 것은 자신 스스로에게도 해가 되지만 영가를 위해서는 돌이킬 수 없는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 장례음식에는 고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가족들도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49일 동안 영가를 위해 염불을 해야 합니다. 모든 중생들이 임종할 때에 부처님 명호나 보살님 명호만 들어도 모두 다 해탈하게 된다고 지장보살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영가가 생전에 자신이 염불을 하였다면 더욱 좋을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권속들에 의해 염불소리만 들어도 그 업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넷째, 늘 정성스럽게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해 영가 천도를 기원하는 것이 49재입니다. 그런 만큼 그 정성이 지극해야만 합니다.
49재를 마련할 적에 또는 49재가 끝나기도 전에 음식을 먼저 먹는다거나 혹은 음식을 함부로 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를 어겨 먼저 먹거나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영가는 복력을 다 얻지 못하고 맙니다 매사에 정성과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자세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공덕을 많이 지어야 합니다. 목련존자가 죄 많은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 기도할 때 부처님께선 목련존자에게 스님들을 비롯해 사부대중에게 공양을 올리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바라는 마음보다는 베푸는 마음이 먼저 앞서야 모든 일이 여법하게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남에게 베풀 줄 모르면서 바라기만 하는 것은 업을 더 두텁게 할 뿐입니다. 그러니 영가를 위해 거룩하고 자비로운 일을 많이 행해야 합니다.
지장경에 죽은 이를 위해 재를 올리면 그 공덕의 7분의 6은 재를 지내준 사람에게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공덕을 쌓는 것은 자신에게나 영가에게 좋은 일이 됩니다.
여섯째, 유흥장소에는 되도록 가지 말아야 합니다. 술집, 노래방, 나이트클럽, 도박장 등등 유흥을 목적으로 하는 곳은 정신이 흩어져 영가를 위한 오롯한 마음을 지켜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영가의 왕생극락을 염원하는 발원문과 자신의 서원을 적어서 하루에 한 번씩 읽어주십시오. 그리고 49재에 부처님전에 올렸다가 회향 때 태우십시오. 영가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큰 공덕이 될 것입니다.
이외에도 생활 곳곳에서 마음을 잘 써야 할 것입니다. ‘49재는 스님이 알아서 해주겠지, 절에 위패 올려 놨으니까’ 하면서 자신은 아무렇게나 생활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비용은 형편껏


49재를 올릴 때 가족들은 비용 때문에 마음 한편이 무겁습니다. 형편이 넉넉해서 마음껏 비용을 낼 수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겠지만 어려운 형편에선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을 겁니다. 적게 내자니 스님께 죄송스러운 마음도 들고 한편으로는 영가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그렇다고 많이 내자니 형편이 어렵고,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합니다. 그러나 정성을 들이는데 정해진 값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빈자(貧者)의 등불’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부처님이 계실 때였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길을 단장했습니다. 꽃을 한아름 사서 공양하는 사람, 금은보화를 길 위에 뿌려 놓는 사람, 화려한 등을 밝히는 사람, 저마다 부처님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가난한 난다 여인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처님께 등 하나도 공양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궁리 끝에 머리카락과 옷을 팔아서 촛불을 하나 샀습니다. 화려한 등 사이로 놓인 작은 촛불이었지만 그녀는 부처님께 등공양을 올릴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온 거리가 불을 밝힌 채 밤이 지나고 마침내 새벽이 왔습니다. 모든 등불은 새벽을 맞아 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작은 촛불만은 꺼지지 않고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아난존자가 촛불을 끄려고 했지만 촛불은 꺼지지 않고 더욱 밝게 타올랐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촛불을 끄려고 하지 말라. 그 촛불은 정성으로 밝힌 등이라 꺼지지 않을 것이다(현우경 근본약사품).”
부처님께서는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49재를 올리는 데 있어 비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정성껏 그리고 형편껏 지내는 것이 49재에 드는 적절한 비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9재에 필요한 준비물은 미리미리


49재는 보통 사찰에서 올리는 까닭에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찰의 스님이 웬만한 것을 다 알아서 준비해 주시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정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냥 무심히 참여하지 마시고 가기 전에 49재 의식 순서를 한 번 잘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스님이 49재를 집전하실 때 한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스님대로 집전하고 가족은 가족대로 슬픔에 젖어 있거나 어리둥절해 있으면 산만해지기 쉽습니다. 요즘 각 사찰에서 나오는 법요집을 보면 49재 의식의 순서가 실려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도 준비해야 할 점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영가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발원문을 작성하십시오. 그리고 49재가 시작될 때 조용히 영가에게 읽어 주고 부처님 전에 올리시면 됩니다.
둘째, 49재에 동참할 인원을 점검하고 사찰에 통보하십시오. 그래야 사찰에서도 준비하기가 수월하고 참여하는 이의 입장에서도 산만하지 않습니다.
셋째, 49재 비용을 가족들이 함께 상의하여 전하도록 합니다.
넷째, 극락세계로 가는 해탈복을 입혀드리는 관욕의식에 쓰일 수건, 비누, 치약, 칫솔, 고무신, 영가의 옷 등을 미리 준비합니다.
다섯째, 상복을 깨끗이 하여 정갈하게 입을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여섯째, 독경 때 필요한 경전과 법요집을 준비합니다.
일곱째, 국화 등 꽃을 준비합니다.
이 외에도 49재에 필요한 사항을 잘 헤아려 49재를 무리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 한 생명의 마지막 가는 길이며 또 새로운 생을 준비하는 의식인 만큼 그 정성이 각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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