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 반드시 가지고 가야 하는 것


무언가 하려고 해도 잘 풀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흔히 업이 두텁다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좋은 말을 아무리 해줘도 요지부동인 사람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줘도 그 가르침의 수승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두터운 업이 지혜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엔 부처님 말씀을 한 번만 듣고도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선근이 있어서 단박에 진리를 터득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법회에서든 스님들이 법문을 하시기에 앞서 “할”을 하거나 주장자를 한 번 내리치면서 좌중을 둘러봅니다. 선근이 있는 사람들은 굳이 말로 하지 않더라고 이 ‘할’소리(큰 고함 소리) 한 번으로, 주장자 내리치는 소리 하나로 한 생각이 퍼뜩 돌아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말로써 법문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향해 쉼없이 정진하는 스님에게 “힘들지 않으십니까?”하면 “금생에 성불하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이 업으로 내생에 다시 스님이 되어 수행하고 또 그 다음 내세에 다시 수행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부처를 이루지 않겠습니까?”하고 대답합니다.


지장경이나 아미타경 그리고 그 외 수많은 경전을 보면 많은 불보살님들이 부처님으로부터 수기(授記,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보장을 받는 것)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어떤 불보살님도 현세에 단박에 부처를 이룬 분은 없습니다. 몇 겁에 이르도록 수행 전지해 온 결실로 부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무량수경에 보면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비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법장비구는 어느 날 부처님을 친견하고 불국토를 건설하겠다는 48대원을 세웁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법장비구에게 앞으로 부처가 되리라하고 수기하셨고, 법장비구는 무려 다섯 겁이 지난 다음에야 불국토를 건설하고 부처가 되었습니다.
업이란 이런 것입니다. 쌓이고 쌓여 이루어지는 하나의 힘과 같은 것입니다. 나쁜 힘이 커지면 더욱 험악해지고 좋은 힘이 쌓이면 더 널리 그 뜻을 펴게 되는 이치입니다.


지금이 ‘나’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업이 윤회하는 것입니다. 한 평생 수행 정진해온 이는 그 수행력이 업력이 되어 내세에도 그러한 삶을 살게 됩니다.


전생에 닦아놓은 바가 있으니 그 근기가 다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남의 것을 탐하고 욕심만을 부렸던 사람이라면 좋은 곳으로 가려고 해도 그가 쌓아놓은 업력이 무거워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누가 못 가게 해서가 아니라 세세생생 쌓아온 습관이 그러하기에 그가 지은 선악에 따라 내세애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세의 과보를 두려워하며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이유가 지금의 ‘나’를 아끼기 때문입니다.
내세에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을 ‘나’, 가난과 불행에 찌들지도 모를 ‘나’를 생각하면 그만큼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윤회하는 존재가 지금의 ‘나’가 아니라면, 그리고 지금의 ‘나’를 전혀 기억할 수도 없는 새로운 존재라면 인과나 윤회를 굳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영겁에 이르도록 거듭된 또 다른 ‘나’가 항상 험난하고 어두운 무명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그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오직 평소에 지은 선과 악밖에 없습니다. 재물도 명예도 사랑하는 이도 어느 것도 죽음에 이르러서는 다 놓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한평생 지어온 업만은 그대로 지니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업을 바탕으로 내세의 과보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화엄경에 보면 “업이 보(報)를 어기지 않고 보(報)는 업을 어기지 않는다”는 경구가 나옵니다.
금생에서 좋고 나쁜 일들, 금생에서의 인격과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업’이라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 ‘업’이란 윤회의 뿌리이고 생사윤회의 원인이며 종자인 셈입니다.


그런데 업 가운데 의업(意業)이란 것이 있습니다. 의업은 다음 생의 내용을 결정할 수도 있는 것으로 임종 직전의 마지막 의식,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할 때 지난날을 떠올리게 됩니다. 자연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좋았던 기억들을,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면 회환과 아쉬움이 남는 일들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 마지막 의식이 바로 내세의 인연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만큼 마지막 의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지나온 삶이 어떠 했던간에 임종을 맞아 한 생각 돌이켜 마음을 크게 비울 수만 있다면 그의 내세는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임종을 맞는 사람에게 주변 가족들이나 친지들이 생전에 그가 했던 좋은 일들을 떠올리게 해 주고 좋은 마음을 갖도록 도와 준다면 그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그를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도록 도와 무상(無常, 덧없음)의 이치를 깨우치도록 한다면 그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을 준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인연만큼 소중한 재산은 없다.


불자님들 중에는 ‘나는 전생에 불교와 인연이 깊었던 것 같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나 다른 종교 단체에 가면 마음이 편하질 않는데 절에만 가면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든지, 불교를 접해 본 적도 없는데 어쩌다 한 번 들은 불경소리가 그렇게도 가슴에 남을 수가 없다든지 하며 전생에 불교와 인연이 있어도 보통 있는게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부처님과 전생에 맺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불교에 쉬이 귀이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과는 유독 마음이 잘 맞고 어떤 사람과는 뭘 해도 삐걱거리고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음식 ,책, 취미, 등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나와 잘 맞는 것이 있고 나와 잘 맞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윤회를 거듭하면서 쌓아온 인연에서 비롯됩니다. 전생을 뚜렷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가지고 나온 업연이 그렇게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가 다 인연에서 비롯됩니다. 나쁜 것은 지난 생의 나쁜 인연에서 생겨나고 좋은 것은 지난 생의 좋은 인연에서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나와 무관한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싫든 좋든 모두가 인연에 의해 빚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조은 인연만큼 소중한 재산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좋은 인연은 어려울 때 힘이 되고 좋을 때 벗이 되어주지만, 악연은 회복하기 힘든 깊은 상처만을 남깁니다. 그러나 현재의 모든 인연을 전생의 업보려니 하면서 돌릴 일은 아닙니다. 금생의 인연은 전생에서 빚어졌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인연은 내세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금생의 삶을 지어야 내세에 좋은 인연을 만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임종하는 사람에게 불경을 들려 주고, 영가에게 천도재를 지내는 것은 금생의 좋은 인연을 짓는 일이며 궁극적으로는 내세의 좋은 만남을 기약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해탈문을 향해서


모든 생명체는 육도를 윤회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우침이 있기 전까지는 그러한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육신을 통해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잘못된 믿음으로 빚어지는 갖가지 현상에 대해 집착을 하고, 생로병사를 겪으면서도 그 무상함을 깨닫기보다는 오히려 삶에 집착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우리 모습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이 집착이 윤회의 원인임을 알아 이로부터 벗어나 대해탈의 길로 들어선 인류의 스승이십니다.
윤회를 벗어나는 길, 그것은 무상을 깨달을 때 가능합니다. 무상을 깨닫는다는 것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주변 환경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한생각 돌이키는 데 해탈의 길이 있음을 부처님은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열심히 수행 정진해서 한 생각 돌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비록 근기가 부족하고 인연이 닿지 않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면 49일 간의 중유기가 또 한 번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49일 간의 중유기는 윤회의 대기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생을 마감하고 또 다른 생을 준비하는 단계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49일 동안 한 번이라도 마음을 바르게 돌릴 수 있다면, 49일 간의 중유기는 깨달음을 위한 더 없이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영성이 맑을 뿐 아니라 육신에 대한 집착도 없어진 상태라 불법을 보다 간절하게 받아 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한 번 돌아봅시다. 순간 순간마다 변하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고 또 나타났다가는 다시 사라지는 그야말로 요지경 같은 것이 우리네 마음입니다. 도무지 마음먹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써봐도 뜻대로 잘 안 되는 게 이 마음입니다.
절에 가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경을 읽을 때면 ‘아, 정말 공부해야겠구나’ ‘이 세상에는 미련을 둘 게 하나도 없구나’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바로 뒤돌아서면 자식문제로 아웅다웅하게 되고 돈 문제로 욕심이 슬슬 머릿속을 까맣게 덮고 맙니다.
단지 한 생각 돌리는 일이지만 그 한 생각을 돌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법문을 듣고 수행 정진해야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세세생생을 두고라도 윤회를 벗어나겠다는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을 맞이함에 있어 항상 허둥지둥 합니다. 평생을 그렇게 일상사에 묻혀 마음을 내놓고 살아온 까닭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맞아 육신을 벗고 나면 전생의 습(습관)이야 남아있지만 그 영혼은 맑아 참으로 법문의 이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죽음을 맞이해서야 비로소 삶을 냉철히 관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49일간의 중유기가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삶의 무상을 깨닫는 시간, 우리는 영가로 하여금 49일 간의 중유기를 육도윤회에서 성도해탈관문으로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고 떠나간 사람을 위해 진실로 49재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죽음

겨자씨 한 톨로 건진 슬픔


부처님 당시 기사고타미라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삶에 대한 의욕도 없고 오로지 아들을 다시 살려 내야 겠다는 생각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은 부처님을 찾아가 아들을 살려달라며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여인에게 지금까지 사람이 한 번도 죽지 않았던 집을 찾아 겨자씨 한 톨을 얻어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마을을 돌며 집집마다 찾아다녔지만 사람이 죽지 않았던 집은 한 집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여인은 부처님이 왜 자신에게 이러한 일을 시켰는지 그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죽음이란 피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자연의 이치임을 비로소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아함경)


지장경에선 49재의 공덕에 대해 “죽은 이를 위해서 재를 지내 주면 그 공덕이 7분의 1은 죽은 이에게 가고, 나머지 7분의 6은 재를 지내는 사람들에게 간다”고 합니다. 이 말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 살아 있는 동안 스스로 선업을 쌓으며 수행 정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49재의 공덕 중 7분의 6은 재를 올린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죽은 이를 위해서 49재를 올리는데 왜 그 공덕 가운데 7분의 6이 재를 올리는 자신에게 돌아가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덕이란 우리가 좋은 일을 했기 때문에 받는, 흔히 말해서 복을 받는다거나 좋은 일이 생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49재를 올려줌으로써 또 49재를 올리는 과정에서 남은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지게 되는데 그 자체가 공덕이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데만 급급하고 죽음에 대해 무관심하고, 하물며 내세를 생각하는 일에는 신경쓸 겨를조차 없었지만, 49재를 올려 영가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면서 자연 재를 지내는 이들의 마음도 달라져야 하며 윤회를 바로 생각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의례적으로 치르는 일쯤으로 대충 49재를 올린다면 우리는 그러한 공덕을 스스로 저버리는 꼴이 되고 맙니다.
죽음은 누구나 언제고 맞이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열심히 사는 것, 열심히 수행 정진하는 것, 다시 말해 열심히 오늘을 가꾸는 것이 바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고 내세를 만드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동안에 있는냐?


어느 날 부처님께서 여러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동안에 있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또는 “밥 먹는 사이에 있습니다.”등등 나름대로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아직 공부가 덜 되었다고 하시면서 다시 다른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그 제자는 “숨쉬는 사이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대는 도를 잘 알고 있구나.”하시면서 그를 칭찬해 주었습니다(사십이장경).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우리의 목숨, 그러나 그 목숨은 들숨과 날숨 사이 그 찰나에 존재합니다. 한번 들이쉰 숨을 다시 내쉬지 못하면 곧 죽음인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말하고, 듣고, 웃고, 울던 모든 작용도 정지합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가락을 움직이며 서로 손을 맞잡았는데 한 찰나에 그 움직임을 멈춥니다. 들숨과 날숨이 멈추고 서로 간절히 마주보던 눈빛도 온데 간데 없어지고 맙니다.


죽음이란 그렇듯 명백하면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믿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죽음이라 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사대(地,水,火,風)가 흩어지는 작용이라고 설명합니다. 조건과 인연에 따라 모인 네 가지 기운이 생명체를 이루었다가 그 조건의 스러짐으로 인해 흩어지는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생명체가 죽음을 통해 흙(地)과 물(水) 그리고 불(火) 바람(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모든 인식작용도 사라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이치를 자세히 일러 주시면서 ‘나’에 대한 집착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계는 성주(城主壞空), 현상계는 생주이멸(生住異滅), 인생은 생로병사(生老病死), 이 네가지 과정은 결코 변치 않는 엄연한 법칙이므로 모든 중생이 이를 바로 알아 무상의 이치를 깨닫기를 염원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죽음이든 간에 늘 우리는 느닷없이 맞이했다는 절망감에 빠집니다. 그러나 죽음은 탄생 이후 꾸준히 진행되어 온 과정이지 돌발사건이 아닙니다. 들숨과 날숨이 멈추고 사대가 흩어져 자연으로 돌아가 다시 새로운 생명의 윤회를 준비하는 한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을 바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은 지금의 삶을 새롭게 정비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와 무관한 죽음은 없다


초봄에 피어나는 목련의 순백함과 초여름에 빨갛게 웃음 짓는 들장미의 싱그러움은 언제 보아도 상쾌하고 반갑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때가 되면 곱고 아름다운 꽃잎에 거뭇한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오고, 더 없이 빨갛게 물들어 오른 장미꽃도 흙빛으로 시들어 갑니다. 죽음의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현상은 아름답지 않지만 그 이치만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때가 되면 돌아갈 줄 아는 모습, 새로운 생명을 위해 흙이 되고 거름이 되는 모습이 바로 거뭇거뭇한 죽음 속에 담겨 있는 자연의 이치인 까닭입니다.
만약 꽃이 시들지 않는다면 나뭇잎이 낙엽으로 지지 않는다면 지금의 자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즘 많이 얘기되는 엘리뇨현상이나 라니뇨현상으로 여름에 눈이 오고 겨울에 꽃이 피는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의 순리가 뒤엉키면서 세상은 점점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순리란 세상을 풍요롭게 하며 아름답게 하는 거대한 질서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네 죽음도 이러한 자연의 순리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흙으로 돌아간 죽음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토양이 되듯이, 편안한 죽음은 다음 세상에 좋은 인연으로 깃들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나와 무관한 죽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듯이 말입니다.


절에서 예불을 드릴 때 무주고혼을 위한 축원을 빼놓지 않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입니다. 특히 요즘엔 스님들이 원력으로 위령제를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징용되었다가 외롭게 숨긴 영령들을 기리는 위령제가 해마다 일본에서 올려지고 있고, 또 우리나라에서도 6․25 당시 전투지에서 뜻 있는 스님들에 의해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자리가 여러 곳에서 마련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각 사찰에서 스님들이 무주고혼 천도를 염원하면서 천일기도를 드리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기나긴 세월에 묻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 석자도 모르는 그들의 죽음을 이제라도 천도를 하는 이유는 자연의 도리에 순응하기 위함입니다. 태어나면 죽기 마련이고 그 다음에는 또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이에 순응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중음신들에게 제 자리를 찾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물론 중생구제에 뜻이 있겠지만 더 나아가서는 세상을 밝게 하는 데 있습니다. 꽃이 피고 질 때를 알아야 자연이 풍요로워지듯이 사람 사는 세상도 떠나야 할 때 떠나줘야 세상이 밝고 넉넉해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중음신의 장난으로 신이 들리고 또 가정사에 괴로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무당 들을 따라다니면서 자신을 잃어버린 채 신들이 시키는 대로 믿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결국 세상은 어지러워지고 혼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에서 무주고혼들까지 모두 구제하려는 참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와 무관한 죽음은 없습니다. 꽃, 나무, 동물 어느 하나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람의 죽음이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자신과는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이라도 임종소식을 접하면 시간을 내서라도 가능한한 천도재나 49재에 참여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행스럽게 요즘 불교계에서는 재가불자님들이 뜻을 모아 비록 생전에 인연이 없었다 하더라도 임종 시달림(임종시에 행하는 염불의식)을 위해 기꺼이 달려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불자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생을 구제하고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하는 그 걸음마다 소중한 불연이 영글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며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일은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큰 슬픔입니다. 더 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절망감으로 숨이 끊어질 듯 괴롭습니다. 살아 생전에 못다 한 일들로 가슴을 메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막 임종을 맞아 떠나려는 사람의 몸을 흔들면서 가지 말라고 애원을 합니다.
자식들은 다 놓고 이렇게 갈 수 있느냐? 할 일이 아직도 많은데 어떻게 하려고 벌써 가느냐? 등등 애절한 심정을 마음껏 토로합니다.


그러나 이는 임종을 맞이하는 이를 위해서 그리 바람직한 태도는 아닙니다. 가뜩이나 떨어지지 않는 발 걸음을 주저앉히는 경우라 할 것입니다.
부처님 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가 되어 제자들에게 곧 열반에 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모든 비구들은 비통함에 몸을 구르며 슬픔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은 근심하고 슬퍼하지 말라. 천지나 사람이나 물건이나 어느 한 가지 나서 죽지 않는 것이 있는가.”


죽음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임을 알아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임종 맞이도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가능하면 임종을 맞이하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세상을 떠나려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아쉬움도 많을 것이고, 또 한도 많을 것입니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미안함과 걱정으로 저승길이 까마득하기만 할 것입니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죽긴 왜 죽느냐면서 흥분을 하고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슬퍼하는 것은 임종자의 갈 길을 더욱 험난하게 할 뿐입니다.


예전에는 임종을 맞아 주변 가족들이 우는 소리를 내며 슬픔을 표현하곤 했습니다. 망자의 제단 앞에서 목을 놓아 곡을 함으로써 슬픔을 베가시켰고, 그것이 하나의 도리요 망자에 대한 마지막 애정의 표현으로도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지 망자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행동입니다.


이보다는 오히려 담담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그가 갈 길을 설명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망자가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의식(意識)을 놓게 되면 금생에 그랬던 것처럼 맹목적이고 혼돈된 상태 그대로 다음 생으로 넘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임종을 맞은 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도록 해 주고 차분하게 도리에 맞도록 대답을 해 주어야 합니다. 모든 집착과 탐착을 훌훌 털어버리고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염불이나 부처님 말씀을 자주 들려준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아미타경을 들려주고 독송케 한다면 한결 임종을 맞이하는 이의 마음이 조용해질 것입니다.
또한 주변 가족들과 임종자가 함께 불경을 독송하면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채 죽음을 맞이한다면 업보에 끄달려 방황하지 않고 극락세계를 향해 그야말로 편안하게 떠나갈 수 있습니다.

떠나는 이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어야


죽음에 임박했을 때 가족들은 우선 가까운 친지들에게 급히 연락을 취해 임종자의 운명을 함께 지켜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네 삶이라는 게 만남과 만남으로 이어져 온 까닭에 삶의 마무리 또한 그 만남을 정리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끝내 보지 못하면 그 애달픔이 두고두고 남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한 노인은 숨이 몇 번이나 넘어갔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7일 동안 반복했습니다. 멀리 있는 딸이 보고싶었던 까닭에 차마 이승을 떠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7일째 되는 날 외국에 있던 딸이 급히 왔고 그 노인은 딸의 손을 잡자 마자 바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자손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하는 고종명을 오복 가운데 하나로 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임박한 듯이 보이면 서둘러 가까운 사람들에게 연락해 임종을 함께 지켜보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임종자의 유언을 잘 받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꼭 하고 싶었던 일이라든지, 당부하고 싶었던 말을 잘 들어 기록하고 임종자에게 뜻을 받들겠노라고 반복해서 말을 해 주어야합니다. 그래야 임종자가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마무리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임종자를 위해 미리 수의를 준비하는 것도 좋습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막막한 임종자에게 수의란 죽음을 준비했다는 안도감을 줍니다.


그리고 임종자는 죽은 뒤 자신의 모습이 가능하면 깨끗하고 청결하게 남기를 원하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에 깨끗한 수의를 준비하면 여러 모로 임종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마침내 숨이 넘어가 임종을 맞이하면 우선은 정확하게 생사여부를 판단해야 합니다. 섣불리 판단했다가 큰 잘못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으니 가능하면 의사를 불러 생사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운명했음이 확인되면 망자의 팔과 다리를 곧게 펴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이 굳기 마련이니 나중에 염습을 하고 입관할 때 구부러진 채 팔이나 다리가 굳어 있으면 이를 펴기 위해 험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략적인 준비가 끝나면 부고장을 만들어 임종자의 죽음을 알리고 장례의식 준비를 하나하나 시작합니다.
이때에도 남은 가족들은 망자의 곁에서 아미타경과 지장경 등 부처님의 경전을 계속해서 들려 주십시오.


설사 외형상으로는 숨이 끊어졌다고는 하나 망자의 넋은 49일이 지날 때까지는 중음기에 남아 떠돌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후 삼일까지는 망자가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가족들 곁에서 맴돌면서 극한 외로움과 절망감에서 시달리게 되는데, 이때 부처님 말씀을 자주 들려 주고 불보살님 명호를 불러 주면 망자에게는 어두운 저승 길에 밝은 등불을 얻은 듯 큰 의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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