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의 공덕

누구에게나 소중한 등불
부처님 말씀은 언제 들어도 좋은 말씀입니다. 마음이 편할 때는 편한 대로 더없이 그윽하고, 마음이 불편할 때는 의원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고요해집니다.
영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업이 두터운 영가에게는 등불이 될 터이고 복을 많이 지은 영가에게는 지혜를 밝히는 법등이 될 것입니다. 설사 영가가 좋은 곳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천도재를 지내 준다면 불법에 의지해 해탈의 길로 성큼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수행을 많이 해서 깨달음을 얻는 선사들에게도 재를 올립니다. 깨달음을 얻은 영가를 각령이라고 하는데 이분들은 이미 해탈에 이르렀지만 우리는 재를 통해 공경하는 마음을 염불로써 전합니다.
또한 사바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다시 사바세계에 와 주시기를 청하는 종사영반이라는 의식도 거행합니다. 이것은 영가를 좋은 곳으로 이끄는 천도의 의미는 아닐지라도 남아 있는 이들에게는 큰 공덕이 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천도재는 영가에게나 남아 있는 이에게나 큰 공덕이 되므로 가능한한 천도재를 올려 주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이 기회를 통해 지난날의 죄업을 참회하고 업장을 소멸하여 단지 명복을 비는 재가 아니라 수행의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임종한 지 오래된 영가를 위한 천도


영가법문은 저승길을 밝혀 주는 등불입니다. 혼미하기만 한 저승길에 업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방황하는 영가에겐 나침반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극락정토문이 있으며 해탈문이 있는지 영가는 영가법문에 의지해 찾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임종 후 49일 동안 영가를 위해 49재를 지내줍니다.


그러나 미처 49재를 지내주지 못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전쟁으로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자령 영가(낙태한 아이의 영혼)까지 그 사연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비록 때가 늦었더라도 반드시 천도재를 지내주어야 합니다.
중음신으로 떠도는 영가는 무척 외롭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위해 천도재를 올려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비록 때를 놓쳐 오랫동안 중유기에 머물렀지만 늦게라도 천도재를 올려 주면 영가는 그 법문을 듣고 극락왕생할 수 있게 됩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수많은 무주고혼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주인을 찾지 못한 영가는 이승 주변을 맴돌게 되는데, 그것은 영가에게도 대단히 괴로운 일이지만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피었던 꽃도 흙으로 돌아가야 비옥한 토양이 되고 풍요로운 내일을 준비할 수 있듯이, 사람도 죽으면 이 세상을 떠나야 세상이 편해집니다.


그래서 절에선 세상이 어지럽고 혼탁해지면 무주고혼을 위한 천도의식을 올립니다. 영가를 위한 배려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맑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란분재를 잘 아실 겁니다. 목련존자가 무간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제한 것을 두고 기리는 의식입니다. 이 우란분재라는 말뜻은 “거꾸로 매달려 있는 중생을 말과 입과 뜻을 깨끗이 함으로써 구제한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만큼 큰 공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외로운 영가를 남이라 여기지 말고 불자님들은 적극적으로 천도를 해 주어야 합니다.
천도재는 49재와 달리 보통 7일 동안 지내는데 49재를 못 올린 영가를 위해서는 49일 동안 지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49재를 올릴 때도 더불어 무주고혼의 천도까지 함께 배려하는 자비심을 내신다면 더욱 여법한 49재가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무병의 고통은 천도로서 이겨내야


영가가 49일 간 천도되지 않으면 이승 주변을 떠돌게 됩니다. 이때 영가는 새로운 몸을 받지 못하고 그저 정처 없이 방황하느라 몹시 지치게 됩니다. 따라서 외로움과 이승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져 살아 있는 사람 곁으로 자꾸만 찾아옵니다. 그래서 간혹 ‘신들렸다’ ‘신을 받았다’는 등등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들리고 나면 몸과 마음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뚜렷한 병명도 없이 병을 앓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신병(神病), 무병(巫病)이 그것입니다. 한번 신을 받아들이고 나면 신의 뜻을 거역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거역하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다 신의 뜻대로 살겠다고 마음을 먹고 내림굿을 받으면 무병은 씻은 듯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의 뜻대로 말을 하고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무속인이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병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을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귀신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영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루빨리 가야할 곳으로 떠나야 하는데 받아 주는 사람이 있으니 더욱 집착만 커져서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당장은 머물곳이 있는 듯 싶지만 결국 방황의 시간만 더 길어지는 셈입니다.


이렇게 신들린 사람은 반드시 법력 있는 스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대게의 경우는 무속인을 찾아가 상담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궁극적인 해결방법이 아닙니다. 스님을 찾아가서 무병의 고통을 상담하고 영가천도를 받아야 합니다.
이를 절에서 구병시식이라고 하는데, 사람의 몸에 들어와 있는 영가를 부처님 위신력으로 잘 다스려서 가야 할 곳으로 떠나보내는 의식입니다.
며칠이고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나면 영가는 괴로워 하면서 떼를 쓰지만 마침내는 저승길로 떠나 새로운 몸을 받게 됩니다. 영가에겐 천도를 해 주어서 좋고, 남아 있는 사람은 건강한 자유인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니 더 없이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도재에 음식을 차려 놓는 이유


영가는 자신의 업에 따라 나타나는 여러 가지 환영에 시달립니다. 그 괴로움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고 합니다. 영가는 업에 따라 중음기에서 여러 괴로움을 겪으면서 몹시 지치게 되는데 이때 심한 배고픔을 느끼게 됩니다. 육신이 사라져 먹을 수가 없는데도 생전에 음식을 먹던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어 음식에 대해 대단히 집착하게 됩니다.
식(識)이 맑은 스님들은 천도재를 지낼 때 영가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데, 합동재를 지낼 때 보면 수많은 영가들이 모여 음식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도재를 지낼 때 영단에 음식을 차려 놓는 것입니다.
물론 영가는 육신이 없는 까닭에 입으로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냄새로 음식을 먹게 됩니다. 냄새가 많이 나는 부침개나 전을 천도재나 일반 제사 때 빼놓지 않고 올리는 것도 바로 그러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 음식을 영단에 올리기 전에 항상 부처님 전에 먼저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천도의식이 시작될 때 부처님전에 음식을 차려 놓았다가 영가를 청하는 고혼청을 하고 음식을 베푸는 향연청을 할 때 비로소 불단에 놓여 있던 음식을 영단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음식을 준비할 때 영가에게 올릴 음식 이전에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이란 사실을 잊지 마시고 공경과 지극한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가 끝날 때까지 그 음식을 입에 넣거나 함부로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배고픔을 풀어 주고 난 다음에 영가의 죄업을 씻겨주고 해탈복을 입혀 새로운 마음을 갖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리고 나서 영가의 마음을 돌리는 법문을 들려 주는 의식이 시작됩니다.
죽어서까지 남아 있는 무서운 습관과 업으로부터 벗어나 해탈하라는 부처님 말씀은 영가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장 습관이 사라지진 않지만 천도 기간 내내 여러 번 경전 읽는 소리를 들으면서 영가의 마음은 조금씩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49일이 되고 나면 좋은 곳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천도란 영가를 위해 베푸는 법회의식입니다. 업을 참회하고 마음을 다스려 좋은 곳으로 태어나게 하는 의식입니다. 나의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영가의 괴로움을 나몰라라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문명과 과학의 발달로 점점 조상천도재를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상이 편해야 자손이 번성하고 영가가 편안해야 세상이 맑아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마음에 뿌린 씨앗
“모든 죄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다 행하라(@惡@@ @善@行)
아함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불교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향산거사 백낙천에게 조과도림 선사는 이 경구로써 대답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착한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다 행하고 나쁜 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짓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어찌 보면 진부하기도 하고 누구나 다 아는 시시한 소리로도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되짚어보면 이것만큼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스스로 작은 잘못을 짓는 일에는 관대해지고 작은 선행을 쌓는 일에는 무관심해지는 것이 우리네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왜 착한 일은 다 해야 하고 나쁜 일은 티끌만큼도 하지 말라고 하는 걸까요? 불교사상 가운데 하나인 윤회사상과 인과사상은 그 이유에 대해 답해 주고 있습니다.
인과라는 것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요즘 인과에 대해 간혹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노력한다고 다 되는게 아니라는 회의적인 생각, 혹은 나쁜 사람들도 잘만 살더라는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생각들입니다. 실제로 주변을 돌아보면 그렇게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보이는 것과 다릅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좋은 일을 하고 나면 누구라도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뭔가 부자가 된 듯한 느낌도 들구요. 반대로 나쁜 일을 하고 나면 공연히 조급해지고 또 다른 욕심으로 마음자리가 쉴 틈이 없어집니다. 품행이 바르지 않은 사람이 떵떵거리면서 잘 사는 것이 부럽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담긴 일그러진 얼굴까지 염두에 둔다면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진 못 할 겁니다.


인과란 보이는 결과로도 나타나지만 그 이전에 마음속에 먼저 결실을 맺기 마련입니다. 선업이 드리우는 자비의 빛, 그것만큼 보배롭고 소중한 수확이 어디 있겠습니까. 윤회사상은 이 인과사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윤회라는 것은 말 그대로 바퀴가 돌듯이 돌고 도는 것입니다. 한 생이 끝나면 다른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생을 시작해야 하고, 그 다음엔 또 다른 생을 이어갑니다.


이렇게 전생과 현세 그리고 내세로 모든 생명은 거듭거듭 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작정 윤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인연과 인과(因果)즉 업에 따라 윤회를 합니다.
선업을 많이 지은 이는 자연 좋은 곳으로 태어나게 되고 악업을 많이 지은 이는 나쁜 곳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꼭 심판을 내려서라기보다는 자신이 그렇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한평생 나쁜 마음과 나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새삼스럽게 죽음을 맞아 좋은 생각을 어떻게 낼 수 있겠습니까?
업이란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 속에 씨앗을 뿌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다 행하라”는 가르침은 내일을, 그리고 나아가서는 죽음과 그 너머의 삶까지를 준비하는 첫걸음입니다.

업을 따라 도는 수레바퀴


삶이란 각자가 굴리는 바퀴와 같습니다. 열심히 굴리면 그만큼 멀리 나갈 수 있고, 게으르게 굴리면 제 자리 걸음을 반복하게 됩니다. 또한 향기가 나는 곳을 향해 굴리면 우리의 삶은 향기로워지지만 험하고 가파른 곳으로 가면 언제 어떤 곳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맙니다.


이러한 이치는 현재의 삶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전생과 현세 그리고 내세 영겁에 이르도록 이어집니다. 오늘의 삶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내세의 삶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윤회의 고리는 그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고민하고 번뇌하고 마침내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았던 것도 바로 윤회하는 삶을 끊는 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눈앞의 현상에만 급급해 내일의 일은 나몰라라 합니다. 그리고 고난에 처했을 때 근본 원인을 되돌아보지 않고 신세를 한탄하기만 합니다.
모든 일의 원인을 생각하고 내일을 미리 준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윤회사상입니다.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기에 내일이 있을 수 있듯이 현세의 삶은 윤회의 어느 한 지점임에 불과함을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죽음이 또 다른 시작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치입니다. 그러기에 49일의 중유기는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간 동안에 결정되는 새로운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윤회는 흔히 육도윤회라고 말합니다. 각자의 업연에 따라 윤회하게 되는 세계가 여섯 곳이라는 것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짐승), 아수라, 인간, 천상 이렇게 여섯 곳인데, 지옥은 누구나 알고 있는 곳으로 악업을 아주 많이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아귀는 몸은 수미산(큰산)만하며 탐욕 또한 아주 많은데 그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해서 아무것도 먹을 수 가 없습니다. 수미산만한 몸과 탐욕스러운 마음을 충족시키고 싶어도, 먹을 것이 쌓여 있어도 먹지 못하는 고통, 그것이 아귀들의 고통입니다. 이곳은 만족을 모르고 끝없이 욕심을 부리던 사람이 죽어서 가게 되는 비참한 세계입니다.


축생은 아시는 바와 같이 네 발 달린 짐승과 새, 벌레들, 미물들의 세계를 말합니다.
아수라는 우리가 흔히 “아수라장이다”라는 말을 하는 데 늘 싸움과 다툼이 그치지 않는 세계로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싸움을 많이 한 업보로 가는 세계입니다.


그 다음은 인간과 천상의 세계입니다. 인간세계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되풀이 하는 세계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몸을 가지고 깨달음을 이룰 수 있기에 선업을 많이 쌓은 이라야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곳입니다.
끝으로 계유를 잘 지키고 공덕을 많이 쌓은 이가 가게 되는 곳이 천상입니다. 우리는 언뜻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해탈과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천상은 육도윤회의 세계 가운데 하나입니다.


비록 그 세계가 다툼이 없고 조용하며 모두가 즐겨 수행을 한다고 해도 만약 이곳에서 나태해지면 그 과보가 다해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다만 그래도 천상이 육도윤회 가운데 좋은 세계라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다섯 곳 보다는 고통이 적은 살기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육도를 윤회하고 있는 한 우리는 삶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업력에 이끌려 육도 이곳 저곳을 떠돌게 되기 때문입니다.
윤회를 벗어나 대 자유인이 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수행의 힘으로 다시 태어나는 원인을 없애 열반에 이르는 성도해탈문이 그 하나이고, 아미타불의 원력에 기대어 육도윤회에서 바로 벗어나는 왕생정토문이 또 하나입니다.
그러니 육신이 있을 때 부지런히 수행 정진과 염불 정진으로 마음을 밝혀야 합니다. 혹시 선근이 부족해 공부를 하지 못했더라도 세세생생을 두고 부지런히 정진한다면 반드시 대자유인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윤회의 과정을 유가지도론에서는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중유(中有), 이렇게 사유(四有)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생유(生有)는 우리가 어머니의 태 안에서 태어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탄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인 본유(本有)는 어머니의 태 내에서 세상 밖으로 나와 나이가 들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말합니다.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사유(死有)인데 수명이 길고 짧은 것에 관계 없이 오로지 죽는 그 순간을 의미합니다. 숨이 끊어진 자리, 이 육신과의 인연이 마침내 다 소진되는 순간입니다.


마지막 단계가 바로 중유(中有)입니다. 죽은 후부터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기 직전까지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 때가 바로 49일 간의 중유기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서 각자의 인연대로 살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고 또다시 49일 간의 중유기를 거쳐 어머니의 태 안에 잉태되는 과정을 영겁토록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의 존재를 그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존재로 여기는 것은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공간만을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지 우리는 인연에 따라 업연에 따라 늘 새로운 모습으로 윤회를 거듭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윤회의 이치는 주변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이 얼음이 되고 우유가 버터가 되는 것, 꽃이 피었다 지지만 이듬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피어나는 것, 늘상 일어나는 일이기에 이 모든 현상은 극히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면서도 윤회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역시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자연의 이치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란 없습니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입니다. 피고 지는 꽃처럼, 뿌린 대로 수확하는 대지처럼 우리의 생명도 그렇게 윤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생의 ‘나’ - 현세의 ‘나’


부처님께서는 윤회를 일러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기셨습니다.

업을 짓는 자도 발견할 수 없고
과보를 받는 자도 볼 수 없다.
실체없는 현상만이 유전할 뿐
이렇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다.

각자가 지은 대로 내세의 과보를 받는 것이 윤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왜 ‘업을 짓는 자도 과보를 받는 자도 볼 수가 없다’고 하셨을까?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 윤회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업을 짓는 사람, 과보를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키가 160센티에 몸무게가 55kg이 나가고, 성격은 급하며 학력은 어느 정도며, 아이는 몇 명을 두었고, 나이는 몇 살이고, 음식은 어떤 것을 좋아하다는 등등이 것들로 뭉쳐진 존재가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승에서 인연에 따라 상황에 따라 또 전생의 업연에 따라 형성된 ‘나’일 뿐입니다. 이 몸을 지녔을 때만 존재하는 ‘나’인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러 육신을 벗고 나면 그 이전에 ‘나’란 존재 하지 않습니다.
사후 49일 간의 중유기를 거쳐 새로운 몸을 받으면 그 이전에 ‘나’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새로운 몸과 주변 조건 속에서 어떻게 예전의 ‘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라고 여기는 자아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수한 변화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물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업이라는 바다에 그때 그때의 바람과 주변 상황에 따라 잠시 ‘나’라는 자아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격히 말해 생명의 모체는 다름 아닌 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음에 이르러 49일 간의 중유기를 거칠 때까지는 누구나 기억을 할 수 있습니다. 49일 간의 중유기에는 육신은 없지만 육신이 있었을 당시의 감정과 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49일이 지나면 새로운 생명으로 환생하게 됩니다. 악업이 두터웠던 사람은 지옥이나 축생으로 가게 될 것이고 선업이 많았던 사람이라면 인간세계나 천상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단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됨과 동시에 이전에 ‘나’라고 하는 의식은 없어집니다. 49일 간의 중유기를 지나 새로운 탄생을 위하여 모태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영가는 기절(과거 전생의 모든 것을 잊어버림)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보다 무려 식이 9배나 맑았던 영가지만 잉태되는 순간, 그 찰나에 영가는 전생의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새로운 환생을 그렇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간혹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어디어디에서 살았다’, ‘누구 집안 자손이었다’등 등 제법 상세하게 기억합니다. 또한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낯선 길을 가는데 익숙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거나 전생에 한 번쯤 왔던 곳 같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과거를 기억한다기보다는 생명체에 내재된 직관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사람은 지금의 몸을 벗고 새로운 몸을 받은 다음에는 전생을 전혀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49일 간의 여정을 상세하게 그려놓고 있는 티베트의 성전 《사자의 서》를 보면, 태 안에 들어서는 순간 영가는 기절을 하고 동시에 모든 의식이 캄캄한 무(無)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전생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깨달은 이들의 환생은 조금 다릅니다. 부처님께서 부처님 전생을 이야기하듯 깨달음을 이룬 분들은 중생제도를 위해 스스로 환생을 선택한 까닭에 전생을 기억합니다. 어쩔 수 없이 육도윤회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해탈의 경지에서 중생구제라는 큰뜻을 펴기 위해 선택한 환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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