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우도(十牛圖)' 심우도


불가(佛家)에서는 오래 전부터 ‘소’를 진리의 상징으로 보고 심법전수의 수단으로 삼았다.

절마다 ‘소를 찾는 그림(尋牛圖)’을 벽에 둘러가며 그려 붙인 것이 그것이다.

최초로 심우도를 그렸던 송나라 때의 곽암 선사는 화엄경이 말하는 미륵불(彌勒佛)의 출세를 상징화하여 그렸다.

그러나 심법(心法)을 닦는 것이 본 업이 되다보니 현재 불교의 심우(尋牛)는 미래불(未來佛-미륵불)과 관계없는 심우(心牛)가 되고 말았다.


심우(尋牛)
첫 번째는 동자승이 소를 찾고 있는 장면이다.



망망발초거추심 (茫茫撥草去追尋)
수활산요로갱심 (水闊山遙路更深)
역진신피무처멱 (力盡神疲無處覓)
단문풍수만선음 (但聞楓樹晩蟬吟)

망망한 수풀을 헤치고 소의 자취를 찾노니
강물은 넓고 산은 험하여 길은 더욱 깊기만 하다.
힘이 다하고 기력이 떨어져 지쳐도 찾을 길이 없는데
다만 숲속 나뭇가지엔 매미 우는 소리만 들리네.

심우(尋牛)의 의미는 소를 찾는다는 것으로 여기서 소는 곧 내 마음, 나 자신 또는 어떤 목표를 말한다.
그러나, 우선 중요한 것은 소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아는 것, 즉 우리가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시달리고 있다.
자기의 본성을 잊고 수많은 유혹 속에서 소의 발자취를 잃어 버린 것이다.



견적(見跡)
두 번째는 동자승이 소의 발자국을 발견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수변임하적편다 (水邊林下跡偏多)
방초리피견야마 (芳草離披見也마) (마 - 잘, 어찌, 그런가)
종시심산갱심처 (縱是深山更深處)
요천비공즘장타 (遼天鼻孔즘藏他) (즘 - 어찌)

물과 나무 아래 수많은 발자국
풀이 우거졌으나 이를 헤치고 찾아본다.
비록 이곳이 산이 깊고 골짜기가 깊다 해도
요천(遼天)의 비공(鼻孔)이 어찌 그것을 감출 수 있겠는가

견적(見跡)이란 흔적을 보았다는 것으로 소의 발자국을 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는 것으로 스승들 선인들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향기로운 풀밭에도, 마을에서 먼 깊은 산 속에도 소 발자국이 있다.
마치 하나의 쇠붙이에서 여러가지 기구가 나오듯이 수많은 존재가 내 자신의 내부로부터 만들어짐을 배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견우(見牛)
세 번째는 동자승이 소의 꼬리를 발견하는 그림이다.



황앵지상일성성 (黃鶯枝上一聲聲)
일난풍화안류청 (日暖風和岸柳靑)
지차갱무회피처 (只此更無回避處)
삼삼두각화난성 (森森頭角畵難成)

나뭇가지 위에 지저귀는 금빛 꾀꼬리
따뜻한 날 화창한 바람에 언덕 위 버들가지 푸르네.
다만 이것이니 어찌 다시 회피할 것인가?
삼삼한 두각 그림으로도 그릴 수 없노라.

견우(見牛)란 소를 보았다는 것으로 우리의 감각 작용에 몰입하면
마음의 움직임을 뚜렷이 느낄 수 있으며, 우리는 소의 꼬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득우(得牛)
네 번째는 득우(得牛), 즉 '소를 얻다' 이니,



갈진정신획득거 (渴盡精神獲得渠)
심강역장졸난제 (沈强力壯卒難除)
시유재도고원상 (時有재到高原上) (재 - 겨우, 비로소/실사변)
우입연운심처거 (又入煙雲深處居)

정신을 가다듬어 소를 얻었지만
사납고 힘이 세어 다루기 어렵도다.
어느 때는 높은 산 위에 이르고
혹은 깊은 구름 속에 숨으려 한다.

동자승이 드디어 소의 꼬리를 잡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발견하긴 했지만 아직도 마음은 갈 길을 잡지 못하고 헤메고 있다.




목우(牧牛)
다섯 번째는 동자승이 소에게 꼬뚜레를 꿰어 끌고 가고 있는 모습으로 이제 우리는 마음을 잡은 것이다.



편색시시불리신 (鞭索時時不離身)
공이종보입애진 (恐伊縱步入埃塵)
상장목득순화야 (相將牧得純和也)
기쇄무구자축인 (羈鎖無拘自逐人)

채찍과 고삐를 쉼 없이 사용하여 곁에서 여의지 말라
그대가 한 걸음 한 걸음 애진(埃塵)으로 들어감이 두렵다
그러나 끌어내어 길들이고 순화되어
채찍과 고삐에 구애되지 않더라도 스스로 사람 따르네

하지만 아직도 오랫동안의 습관으로 제멋대로인 마음을 고행과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길들여 나가야 한다는 뜻에서 소를 기른다는 의미로 목우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 또 이 소가 어떤 진흙탕, 어떤 삼독(三毒)과 유혹 속에 빠질지 모른다.
길을 잘 들이면 소도 점잖아질 것이다. 그 때에는 고삐를 풀어줘도 주인을 잘 따를 것이다.




기우귀가(騎牛歸家)
여섯 번째는 동자승이 소에 올라타고 피리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기우이려욕환가 (騎牛이麗欲還家) (이 - 비스듬할 이 / 책받침+베풀시)
강적성성송만하 (羌笛聲聲送晩霞)
일박일가무한의 (一拍一歌無限意)
지음하필고진아 (知音何必鼓唇牙)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가네
강적의 피리 소리 저녁 노을 속에 울리고 있네
한 박자 한 곡조마다 무한한 뜻이 담겨 있으니
그 지음 어찌 헛된 말하리

천신만고 끝에 소를 잡아서 채찍과 고삐를 달고, 드디어 그 소를 타고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 모든 투쟁은 끝났다.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다.

아니 본래 그러한 것들이 없었던 것이다.




망우재(존)인(忘牛在人)
일곱 번째는 소는 없고 동자승만 앉아 있다.



기우이득도가산 (騎牛已得到家山)
우야공혜인야한 (牛也空兮人也閑)
홍일삼간유작몽 (紅日三竿猶作夢)
편승공돈초당간 (鞭繩空頓草堂間)

소를 타고 본향으로 돌아오니
소는 간 곳 없고 사람은 한가롭다
해가 석 자나 떴는데도 늦잠을 자니 오히려 꿈이려니
소용없는 고삐와 채찍은 초당간에 던져두노라

망우재인, 소는 잊고 사람만 있다.
이제 때가 왔으니 우리는 채찍과 고삐를 다 내버리고, 초가집에서 살아간다.

모든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인우구망(人牛俱忘)
여덟번째 인우구망, 사람도 소도 완전히 잊었다.



편삭인우진속공 (鞭索人牛盡屬空)
벽천요활신난통 (碧天遼闊信難通)
홍로염상쟁용설 (紅爐焰上爭容雪)
도차방능합조종 (到此方能合祖宗)

채찍과 소와 사람이 모두 공하니
맑고 푸른 하늘 먹고 높아 소식 전하기 어려워라
끓는 솥에 어찌 흰 눈이 남아 있겠는가
이에 이르러 비로소 조종(祖宗)과 하나가 되도다

모든 것이 무(無) 속으로 사라졌다.
무(無)는 바로 한계가 없음이요,
모든 편견과 벽이 사라진 자리이다.

하늘은 너무나 광대하며 어떤 메세지도 닿을 수 없다. 의심, 분별, 차별은 지혜속에 존재할 수 없다.
여기에는 수많은 스승들의 발자취가 있으며, 범용한 것은 사라졌다.
마음은 한없이 한없이 열려 있다.
우리는 더 이상 깨달음 같은 것은 찾지 않는다.

또한 나에게 깨닫지 못한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어떠한 상태에도 머물지 않아 눈으로는 나를 볼 수 없다.




반본환원(返本還源)
아홉번째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만본환원이비공 (返本還源已費功)
쟁여직하약맹롱 (爭如直下若盲聾)
암중불견암전물 (庵中不見庵前物)
수자망망화자홍 (水自茫茫花自紅)

본향으로 돌아옴도 이미 헛된 공이니
모두 장님과 귀머거리와 같이 되어
암자에 앉아 앞의 것을 보지 않아도
물은 저절로 잔잔하고 꽃은 스스로 붉다

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빨갛게 피어 있는 여실한 모습.
진리는 맑디 맑다.

고요한 마음의 평정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든 형상들을 바라 본다.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 자는 어떠한 꾸밈도, 성형(成形)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이 근원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발걸음을 옮겼다.
또한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었다.

그러나, 참된 집에 살게 되어 그 무엇도 꺼릴 것이 없는 소중한 나를 찾았다.




입전수수(入전垂手)
마지막으로는  손을 드리우고 세상에 나간다.



노흉선족입전래 (露胸跣足入廛來)
말토도회소만시 (抹土塗灰笑滿시) (시 - 뺨(思頁) / 頁부 + 생각 思)
불용신선진비결 (不用神仙眞秘訣)
직교고목방화개 (直敎枯木放花開)

가슴을 헤치고 맨발로 거리에 서니
흙을 바르고 재투성이지만 얼굴 가득한 웃음
신선의 비결 쓰지 않고
바로 가르쳐 마른 나무에 꽃이 피게 한다

옷은 누더기, 때가 찌들어도 언제나 지복으로 넘쳐 흐른다.
술병을 차고 시장 바닥으로 나가 지팡이를 짚고 집으로 돌아온다.
술집과 시장으로 가니, 내가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

도(道)를 세상에 돌리니, 남과 내가 하나가 된다.

포대화상이 누구인가?
십우도를 그린 곽암 선사에 의하면 바로 이 포대를 짊어진 화상이 미륵 부처님이다.
결국 십우도는 저자거리로 나서는 미륵부처를 찾아야 산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왜 소를 찾아야 하는가?

우리가 찾는 ‘소’는 대개벽의 정신(精神)을 소유하여 천지의 질서를 바로잡는 진리(眞理)의
주체(主體)이다.

개벽의 열쇠, 생명의 활방(活方)을 가진 절대자이다.

이를 우리나라의 예언용어[秘訣]에서는 ‘소의 성품(性稟)을 가진 진인’이라는 뜻으로 우성진인(牛性眞人)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진인(眞人)은 도대체 어떠한 경지를 표현하는 말일까?

동양의 한자 문화권에서의 진인(眞人)은 철인(哲人), 성인(聖人), 불타(佛陀) 등을 뛰어 넘는 신성(神聖)의 반열을 뜻하며 조화권능의 영역을 아우른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정신사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이 진인(眞人)의 출세를 갈망하고 있으며, 이것이 비결 곳곳에 예정된 미래로 자리잡고 있다.

결국 선가의 그림 '십우도'의 참뜻은 "내 마음의 미륵 부처님"을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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