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623년 5월 보름날, 네팔 변경에 있는 까삘라와투에서 석가족의 왕자, 고따마 싯닷타가 태어났으니 그분은 장차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이 되실 분이었다.
왕자는 열여섯 되던 해 아내를 맞았고 아들 라훌라를 두었다. 스물아홉이 되기까지 그는 아내와 더불어 행복하고 호사스러운 삶을 살았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생각이 깊고 자비로웠던 싯닷타 왕자는 세속적 쾌락만을 안겨주는 덧없는 왕궁 생활을 즐기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랐으나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에 대해 깊은 연민을 느꼈다. 안락하고 유복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는 세상 어디에나 고통이 있게 마련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장래에 부처님이 될 분에겐 온갖 세속적 유혹들이 있는 왕궁은 더이상 머무를 곳이 못 되었다. 즉 그분이 출가할 때가 무르익었던 것이다. 범부들이 그토록 구해마지 않는 감각적 쾌락이 얼마나 무익한 지를 깨닫고, 현자들이 환희심을 구해 떠나는 출리(出離)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깊이 인식하자, 왕자는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온갖 세속의 쾌락을 등지고 사문(沙門)의 황색 가사 하나만을 두른 채 진리와 평화를 찾아 홀홀히 방랑의 길에 나섰다.


출가 사문 싯닷타는 당대의 빼어난 스승들을 찾아 가르침을 구했다. 그러나 그 어떤 스승도 그가 구하는 바를 줄 수는 없었다. 그가 몸소 겪은 갖가지 뼈아픈 고행(苦行)들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어떤 도움도 받지않고 스스로 명상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볼 도리밖에 없었다. 그는 깊은 명상 속에서 찾고 또 찾았다. 마침내 스승들에게서 얻지 못한 진리를 혼자의 힘으로 깨달았다[智慧]. 밝음[明]이 생겨났고, 모든 사물을 참 모습대로 밝히는 빛[光]이 생겨났다.


6년에 걸쳐 초인적 고투를 벌인 싯닷타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의 도움이나 인도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지혜에 의지하여 모든 번뇌를 뿌리 뽑고 집착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통찰지로 모든 사물을 여실히 볼 수 있는 깨달음을 얻어, 서른다섯 나이에 정각자, 부처님이 되었다.
부처님은 몸소 가르치신 모든 덕성의 완전한 구현체이시며 심오한 지혜와 그에 걸맞는 무량한 자비심을 타고난 분이시다. 45년동안 사사로운 정을 떠나 쉴새없이 모든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노력하신 부처님은 8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드실때 당신을 대신할 어떠한 후계자도 남기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다만 당신의 법(法)과 율(律)만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당부하셨다.


그분의 굳건한 의지, 심오한 지혜, 보편적인 사랑, 무한한 자비, 자기를 돌보지 않는 이타행, 위대한 포기, 완벽한 청정, 비길 데 없이 독특한 생애, 가르침을 설하는데 쓰셨던 훌륭한 방법들과 성공적인 결과, 이 모든 점들로 미루어 볼 때 부처님은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서 온 인류의 존경을 받으시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부처님이 설하신 도덕적, 철학적인 체계는 법(法)이라고 불리우며, 널리 불교라고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이 체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신앙과 숭배의 체계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초자연적 신에 대해 충성을 바칠 의무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하다. 불교는 부처님의 제자들을 이끌어 청정한 삶을 살게 하고 또한 그들의 생각 자체를 청정하게 만들어 마침내 최상의 지혜[大覺]를 얻게 하고 모든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는 길이다.


불교에선 맹목적 믿음은 설자리가 없고 오직 지혜를 바탕으로한 확신이 있을 뿐이다. 불자는 부처님을 유일무이의 지도자와 스승으로 받들어 그에게 귀의하지만 맹목적으로 복종하지는 않는다. 불자는 경전에만 얽매이는 사람도 아니요, 또 부처와 같은 존재에 예속된 노예도 아니다. 불자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닌 채로, 자유로운 의지를 활용하고 지혜를 계발하여 끝내는 부처의 경지에까지도 이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佛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불자들은 물론 부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받들지만 부처님은 한번도 자신이 초자연적 권능자라는 식의 주장을 하신 적이 없다. 불교에서는 '지금 여기에서'의 직접적 깨달음만이 진리를 점검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그 깨달음의 관건은 합리적인 이해[正見]이다.


불자들이 불단에 꽃이나 다른 공양물을 올리는 등 부처님을 공경하는 의식을 행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살아 계신 동안 사람들로부터 높이 추앙을 받으셨으나 한번도 자신을 신격화한 적은 없었다. 그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다만 놀랄 만큼 비범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부처님만큼 신이 아니면서도 또한 그렇게 신처럼 거룩했던 스승도 없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부처님께서 불자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맹종이 아니라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준수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나를 제대로 공경하는 사람'이라고 일깨워 주셨다.
더더욱 '세속적 욕망을 성취하려는 기도'나 '자기중심적 사고를 강화시키는 기도'등은 불교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와는 정반대로 불교에서는 자제와 극기와 심신의 정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하는 명상수행이 핵심을 이룬다.


불교에는 불교도가 복종하고 두려워해야할 창조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인간 위에 보이지 않는 전능의 신을 설정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올바른 가치를 인정하여 그 위상을 정립하셨다. 불교는 인간이 하나님이나 성직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기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여기에는, 이해가 되지않는 것을 굳이 믿어야하는 교리도 없고, 이치를 떠나 믿음으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교의도 없으며, 신자가 되기 위해 치뤄야 할, 허례적 의식이나 예식도 없고, 속죄를 위해 해야한다는 무의미한 희생이나 고해의식도 없다.
칼 막스는 "영혼(靈魂)이라고는 없고 순전한 조건일 뿐인 이 세상에서 영혼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종교이고, 또한 무정한 세상에서 마음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종교이니 종교야말로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불교는 정녕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종교가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구원의 체계라고 한다면, 불교는 종교 중의 종교인 것이다.


불교의 근간은 이른바 모든 존재에 연관이 되는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인 사성제(四聖諦)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감각[想]능력과 의식[識]을 갖춘 이 한 길 몸뚱이 속에 세상과 세상의 기원, 세상의 소멸 그리고 세상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나는 천명하노라."(상응부 I.p.86)이 중요한 구절은 부처님이 스스로 직관력을 통해 발견한 사성제를 가리키고 있다.
이 진리는 부처들의 출현과 관계없이 항상 존재하는 것인데 미망에 빠진 세상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밝혀주는 이는 부처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도 않고 변할 수도 없는 이 진리를 부처님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체득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 그것은 전대미문의 진리였다. 따라서 불교가 힌두교에서 파생되었다는 주장은 온당치 못하다. 양자가 어느 정도 근본교리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 그것은 일부 근본 교리들이 영원한 진리인, 법(法:Dhamma)에 부합되기 때문인 것이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첫번째 진리는 고(苦:Dukkha)를 밝히고 있다. 이 빨리어의 둑카(Dukkha)는 고(苦)를 의미하며 영어로 흔히 suffering(괴로움) 또는 sorrow(불행, 슬픔)로 번역되고 있다.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삶이 곧 괴로움(苦)이다. 모든 존재는 태어나게 되어있고 태어난 것은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생 노 병사라는 괴로움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또한 괴로움이다. 한마디로 이 몸뚱이 자체가 바로 괴로움의 근원인 것이다.
고성제(苦聖諦)는 이른바 존재를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와 삶의 여러 측면들에 관한 진리로서, 면밀히 분석 검토, 고찰해야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점검을 해야만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 괴로움의 원인을 갈애(渴愛), 애착(愛着)으로 파악한 것이 두번째 성스러운 진리인 집성제(集聖諦)이다. 이 갈애는 보이지는 않으나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강력한 정신적 힘이며, 다양하게 나타나는 삼라만상의 근본 원인이면서, 그 현상 뒤에 가려진 실체들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 집성제는 간접적으로 지나간 과거생과 금생 그리고 다가올 내생의 태어남들을 밝히고 있다.


첫번째 진리인 고성제에 대한 올바른 정견은 갈애를 없애주며

두번째 진리인 집성제에서는 중생들이 감각의 대경*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밝히고 있다.

이 갈애가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윤회를 되풀이하게 하고, 인생의 온갖 고통을 겪게 하는데 그것이 거칠든 미세하든간에 그 힘은 몹시 위력적이다. 이 무서운 적인 갈애를 굴복시키는데는 그것을 무찌를만한 힘을 동원해야만 한다. 그 힘이 곧 팔정도(八正道)이다.

세번째 성스러운 진리인 멸성제[滅聖諦]는 괴로움(苦)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으로 그것은 모든 종류의 갈애를 남김없이 없애버림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괴로움의 소멸은 열반이며 바로 불교의 최고선(最高善)으로서 만일 구도자가 이를 목표로 정진해 나간다면 바로 이 생에서도 성취될 수 있다.
물론 열반의 성취는 자기 스스로 해내야할 일이면서도, 그 성격이 논리적 사유를 넘어서는 것이고 따라서 고성제, 집성제가 세간의 진리인 반면, 이 세번째 진리인 멸성제는 출세간적 진리이다. 여기에서 멸이란 순수한 깨달음이다. 그것은 완전한 끊음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진리, 곧 정신적인 눈으로 이해될 수 있는 법(法)인 것이다. 완전한 끊음이란 단지 감각의 외적 대상과의 관계를 끊는 것만이 아니고 실은 외부 세계에 매어달리는 내적 집착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열반이란 탐 套치의 불꽃을 끄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해서 열반이 단지 이 불꽃을 끄는 것만이라고 해서도 안될 것이다. 수단은 목적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불꽃을 끄는 것은 열반을 얻는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열반은 단순히 괴로움을 멈추게 하거나 갈애가 사라지게 하는 것만이 아님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멸이라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열반은 절대적인 상태이고 조건지워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거기에서는 단멸될 것이라고는 없다.
불교는 영구불변하는 영혼, 즉 아트마(Atmaa)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 열반에서 단멸 운운은 어불성설이다.

열반에 관해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태어난 것도 아니요, 영원한 것도 아니요, 만들어진 것도 아니요, 형성된 것도 아닌 상태가 있다. 만일 태어나지도 않고, 생성되지도 않고, 만들어지지도 않고, 조건지워지지도 않은 상태가 없다면 태어나고,생성되고, 만들어지고 조건지워진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리라."* (감흥어 8장 3절)깨달음의 가르침인 세번째 진리[滅聖諦]를 실현하려면 성스러운 네번째 진리[道聖諦]인 팔정도를 닦지 않으면 안된다. 팔정도는 곧 중도(中道:중용Majjhima Pa.tipadaa)로서 - 그것은 올바른 견해[正見], 올바른 의도[正思],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위[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마음챙김[正念], 올바른 정신집중[正定]이라는 수행방법이다. 팔정도는 강력한 도덕적 정신력을 떨쳐일어서게 하여 인간의 내면에 잠복해있는 악의 힘인 갈애를 쳐부수게 하는 수행방법이다. 이 중도가 바로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이기도 한데, 다음의 아름다운 게송 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모든 악행은 삼가고
선한 일 두루 행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법구경: 183)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세 가지 진리는 부처님 가르침의 철학적 측면이고, 네번째 진리인 도성제는 그 철학에 따른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는 평범한 철학이나 윤리체계에 머물지 않는다. 일반적인 철학이나 윤리체계는 괴로움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과는 무관하게 이론에만 치중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인간사에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일지 몰라도 불교에서는 단지 기초적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법(Dhamma)은 개인적 체험으로 검증되고 증명될 수 있는 확고한 사실들에 바탕을 둔 도덕적, 철학적 체계이다. 또 불교는 합리적이고 실천적이며, 비밀교의나 강압, 박해, 광신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불교가 2500여 년 동안 부처님을 내세워 한방울의 피도 흘린 적이 없고, 한번도 억지로, 반발심을 사면서까지 개종을 강요한 적이 없이 평화롭게 전파되었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달리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훌륭한 일이다.


실로 불교는 온전한 너그러움으로 흠뻑 배어있고 그 정신은 사람은 물론이고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에 두루 미친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노예제도를 없애고저 한 분은 바로 부처님이었다. 그리고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카스트제도에 반대하고 모든 이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역설한 분도 부처님이었다. 그분은 신분계급, 피부색,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자격을 갖춘 남녀를 위해 비구 비구니 교단을 세우셨으니, 그 교단의 구성이야말로 참으로 민주적이었다.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성들에게 자각시킨 분도 바로 부처님이었다.

무고한 동물을 희생으로 죽이는 것을 금하게 하고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모든 중생들에 대해 메따(Mettaa, 혹은 자애심을 펼칠 것을 간곡히 권하신 분도 또한 부처님이었다. 오로지 불교의 이 자비심만이 분리주의를 조장하는 모든 벽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 불자에게는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이 따로 없고 적대자나 이방인도 없으며 배교자(背敎者)나 불가촉천민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적 사랑이 정견을 바탕으로 실현될 때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을 한 형제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진정한 불자는 지방이나 국가에 대한 편견, 애착 따위는 초월한 세계시민이다.


불교는 이치에 맞고, 실천 가능하고, 효험이 있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참으로 독자적인 가르침이다. 또한 모두를 화합시키는 힘 가운데 가장 수승하고, 사바세계의 중생을 향상시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지렛대인 것이다.


불교의 진수인 사성제만큼이나 기본을 이루는 교의는 업과 윤회인데, 이 둘은 서로 밀접하게 맞물려있는 관계이다. 이 업과 윤회사상은 부처님 이전시대에도 인도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체계화시키신 분은 바로 부처님이셨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업이란 도덕적 인과율이다.


궁극적으로 볼 때 업은 선한 의도와 불선한 의도(kusala akusala cetanaa)를 뜻한다. 업은 지금까지 지은, 그리고 현재 짓고 있는 행위의 총화(總和)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이며 또 미래의 우리는 현재 자신이 하는 행위들이 가져올 결과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과거에 지은 업이 한꺼번에 드러난 총체적 결과는 아니고 미래의 우리 역시 지금 짓는 업이 한꺼번에 드러난 총체적 결과는 아니다. 현재는 정녕 과거의 소산이자 미래의 모태이기는 하나 그렇다고해서 현재를 항상 바로 앞의 전생이나 바로 이어지는 내생을 그대로 가리키는 적확한 지표라고 할 수는 없다. 그만큼 업의 법칙은 실로 대단히 복잡하다. 요는 누구나 심은대로 금생이나 내생에 그 과보를 거둘 것이며, 지금 거두고 있는 것은 과거나 현재 어느 때엔가 우리가 심었던 것이다.
업은 하나의 독자적인 법칙으로서 밖으로부터 별도의 지배요인의 간섭없이 자기 고유의 장(場) 속에서 스스로 작용한다. 이 업의 법칙으로 고통의 문제, 운명의 불가사의성, 타종교에서 주장하는 예정설, 신동의 탄생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류의 모든 불평등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윤회는 지은 업이 있으면 반드시 따라오는 결과이다. 또한 성불을 목표로 하는 보살도(菩薩道)의 이상과 그와 관련된 해탈의 원리는 이 윤회사상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재생을 조건짓는 것은, 다름아닌 업이다. 과거생에 지은 업은 현생의 태어남을 조건짓고, 금생에 지은 업은 과거의 업과 결합하여 내생을 조건짓는다. 현재가 실재하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므로 아무런 증명도 필요없으나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과 기록에 의존함으로써만 알 수 있고 미래의 모습은 예견과 추리에 의해 헤아릴 수 있다.


불교의 윤회사상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재육화(再肉化)나 하나의 영혼이 한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가 태어난다는 환생(還生)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신이 창조했거나 또는 최고아(最高我:Paramaatmaa)에서 나온 전생불변(轉生不變)하는 영혼의 실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살아있는 존재[有情]란 마음과 몸[名色]이 끊임없이 변천하며 유전(流轉)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부단히 생성되고 소멸되는 이 정신적, 물질적 현상의 전 '과정'을 부처님은 때때로 통상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자아(自我), 즉 아따(Attaa)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과정에 붙인 이름일 뿐, 그렇게 명명(命名)될 수 있는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눈에 보이는 개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불변하는 주체나 영원한 실체는 부정하지만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과정마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철학에서 개별아(個別我)를 가리키는 용어는 흐름 또는 연속을 의미하는 산따띠(santati)이다. 오로지 팔정도 수행을 통해 끝을 내지 않는한, 업에 의해 조건지어진 명색의 끊임없는 흐름 또는 연속은 과거 어느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고, 또 언제까지 이어질런지도 알 수 없다. 다른 종교에서 주장하는 영원한 자아나 항구적인 영혼을 두고 불교는 끝없이 이어지는 흐름이라고 설명한다.
토마스 헨리 헉슬리는 말한다.

"불교는, 서구식 개념의 신(神)을 부정하고, 인간에게 영혼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며, 영생에의 믿음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어떠한 기구(祈求)나 희생제물의 효험도 인정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구원을 찾되, 고유의 순수성에 의지할 뿐, 복종을 맹세하지 않고 결코 세속 권력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 사상체계이다. 놀랍게 불교는 아주 빠른 속도로 세계의 많은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뛰어난 신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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