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불교적 극복방법

  죽음에 대한 불교적 극복은 윤회고(輪廻苦)를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갈애를 극복한 사람은 일체가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라고 해도 결코 놀라거나 화를 내지 않는 것처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고 한 것처럼 인간이 당면한 죽음에 대해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죽음에 대한 투철한 이해만이 그것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12연기에 따르면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게 되고, 이 행은 바로 업을 말한다.  업을 짓게 되면 이 업력으로 윤회하게 되고 결국 계속하여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업을 짓지 않으려면 반대로 행이 없어야 하고, 무명을 떨쳐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임종 당시 심적으로 어떤 갈등이나 고통도 없으셨다고 한다.  이는 누구보다 부처님 자신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진실 그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성을 지닌 사람인 이상 누구나 마음이 전환으로 생사의 초월이나 극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일차적 목표는 무심(無心)이다.  이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무명(無明)에서 오는 것을 깨닫고,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로 설해지는 현상계의 직시(直視)를 통해 무명을 소멸하고, 번뇌를 끊고 업을 형성하지 않는 열반적정에 들 수 있게 한다. 



열반(涅槃)

  불교에서 설하는 최고의 이상향(완성된 깨달음의 세계).'반열반(般涅槃)’이라고도 하며, ‘멸(滅)·적멸(寂滅)·이계(離繫)·해탈(解脫)·원적(圓寂)’의 의미를 가진다. 이 열반에 관한 사상은 우리 나라에서 열반종(涅槃宗)의 창종 이래 널리 연구, 전승되었다. 원래 열반은 불을 입으로 불어 끄는 것, 불어서 꺼진 상태 등을 나타내며,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없애서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말한다.

  이는 곧 생사를 넘어선 각(覺)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표이다. 인간이 망집 때문에 괴로워하고 업을 짓게 되는 것은 결국 자아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일 고(苦)와 무상(無常)과 비아(非我)의 이치를 바르게 깨달아서 바른 지혜를 완성한다면, 생사윤회의 근본인 망집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까닭은 이러한 인식을 긍정하게 될 때, 이미 그 무엇을 자아 또는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여 추구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지를 실현하고 진리에 대한 인식을 터득하기 위하여서는 수행에 힘쓰고 계율을 지켜 선정(禪定)을 닦아야 한다. 그러한 수행의 결과로 진리를 터득하고 망집을 단절한다면 인간은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탈의 경지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불사(不死)·안락(安樂)·적정·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은 마치 바람이 활활 타오르는 불을 끄는 것과 같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의 바람으로 불어 꺼서 모든 고뇌가 사라진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열반은 탐욕과 괴로움과 근심을 추월한 경지이기 때문에 인간의 유한한 경험 안에서는 그 어떠한 말로써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다만 체득한 자만이 이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실천적인 문제에 있어서 불교는 세속적인 평범한 생활로는 결코 참다운 열반에 도달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 세속에는 극단적인 두 가지 생활방식이 있다. 하나는 감각적인 쾌락에 탐닉하는 생활이며, 다른 하나는 많은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는 고행의 실천이다.

  이 환락과 고행이라는 양극단을 피한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중도에 의하여 진실에 대한 바른 인식, 바른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열반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열반에는 8종의 법미(法味)가 있다. 열반은 생멸변화가 없이 항상 머물러 있는 상주미(常住味)가 있고, 다시는 미혹된 생사가 계속하지 않는 적멸미(寂滅味)가 있으며, 영원히 늙지 않고〔不老〕, 다시는 죽지 않으며〔不死〕, 청정하고〔淸淨味〕, 허허로이 통하며〔虛通味〕, 움직이지 않고〔不動味〕, 항상 행복한 맛〔快樂味〕을 갖추고 있다.

  또 이 열반에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사덕(四德)이 있다. 상덕은 상주의 뜻으로 열반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멸변화가 없는 덕을 갖추고 있음을 밝힌 것이고, 낙덕은 안락의 뜻으로 생멸변화가 없는 세계에는 생사의 고뇌가 없고 무위안락한 행복만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아는 망아(妄我)를 여읜 진아(眞我)를 말하는데, 아덕은 8대자재(八大自在)를 갖춘 아를 표시하는 것이다. 정은 청정의 뜻으로, 혹(惑)·업(業)의 고통을 여의고, 담연하게 청정한 과덕이 있음을 말한다. 이 상락아정을 현대적 용어로 바꾸면 영원·행복·자재, 번뇌가 없음으로 풀어 볼 수 있다.

  열반에 대해서는 2열반·3열반·4종열반 등의 분류가 있다. 2열반은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으로 구분되는데, 이에 대하여서는 소승과 대승이 그 주장을 달리한다. 소승에서는 열반을 번뇌가 다 없어진 상태라고 본다. 소승의 경우, 유여열반은 번뇌는 다했지만 육체는 아직 남아 있는 경우이고, 무여열반은 회신멸진(灰身滅眞)의 상태로서 모든 것이 아주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대승에서는 열반을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하여 상락아정의 4덕을 갖추지 못한 소승의 열반을 유여열반이라 하고, 4덕을 갖춘 열반을 무여열반이라 칭하여 이것을 최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대승에서는 소승의 무여열반에 아직 미해결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첫째는 삼계(三界) 안의 진리와 일에 대한 미혹은 없지만 삼계 밖의 무명번뇌가 남아 있고, 둘째는 삼계 안의 유루업(有漏業)은 없지만 삼계 밖의 무루업은 남아 있으며, 셋째는 삼계 안의 분단생사(分段生死)는 없지만 삼계 밖의 변역생사(變易生死)는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를 삼여(三餘)라 하여 번뇌여(煩惱餘)·업여(業餘)·과여(果餘)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천태종에서는 3열반설을 따랐다. 3열반은 성정열반(性淨涅槃)·원정열반(圓淨涅槃)·방편정열반(方便淨涅槃)이다. 성정열반은 만법의 실성(實性)인 진여(眞如)를 뜻한다. 이 진여가 본래 불생불멸하여 물들일 수도 없고 깨끗이 할 수도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원정열반은 지혜로써 번뇌를 끊고 증득한 열반이며, 방편정열반은 지혜로써 진리를 깨달은 뒤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출현하고, 인연이 다하면 입멸하는 것이다. 이를 나무가 다 타서 불이 꺼짐에 비유한다. 이 3열반은 열반을 체(體)·상(相)·용(用)의 이론에 맞추어 논리를 전개시킨 것이다.

  4종열반은 우리 나라에서 유식종(唯識宗)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시켰다. 여기서의 4종은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다. 본래자성청정열반은 만유와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인 진여이다. 그 진여의 성품이 청정하여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고 생멸이 없이 적정한 열반을 가리킨다.

  유여의열반은 번뇌장(煩惱障)을 끊고 나타나는 진여이다. 번뇌는 소멸하였으나 육신이 남아 있는 열반이다. 무여의열반은 유여의열반의 상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오온(五防)이 화합한 몸까지 소멸하여 완전히 몸과 마음이 없어진 곳에 나타나는 열반이다.

  무주처열반은 번뇌장뿐만 아니라 소지장(所知障)을 끊고 얻는 열반이다. 소지장마저 끊었으므로 생사와 열반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는 깊은 지혜를 얻게 되고, 대비(大悲)가 있으므로 열반에 머무르지 않고 생사계의 중생을 교화하며, 대지(大智)가 있어 생사에 머무르지 않고 영원히 미계(迷界)를 여의었으므로 무주처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주처열반은 대승보살 정신에 입각한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이 열반에 대한 학설을 가장 논리정연하게 전개시킨 이는 신라의 고승인 원효(元曉)이다. 그는 ≪열반경종요 涅槃經宗要≫를 통하여 당시의 열반에 대한 이설들을 총정리하고 독창적인 그의 학설을 전개시켰다.
≪참고문헌≫ 涅槃經宗要(元曉), 佛敎槪論(金東華, 寶蓮閣, 1954).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 - 수행

  불교에서의 죽음이란 그것이 없는 삶은 없고, 삶이 없다면 죽음이 없는 것이며, 죽음이란 새로운 삶을 향한 변화의 계기이며, 전환에 불과하다.

  부언하자면 삶과 죽음은 대립도 아니고 독립된 실체도 아니다.  삶은 이미 죽음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죽음을 내포하고 있는 삶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곧 죽음을 극복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결국 죽음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로 귀결되고 그 해결도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갖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그 마음은 이 생에서의 애욕을 끊는 무심(無心)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깨달음을 위해 팔정도(八正道)와 같은 부단한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이것은 생사가 열반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중생의 人性과 생멸의 법상(法相)은 본래 여(如)한 까닭에 다르지 않은 것이다.
  불멸(不滅)이 멸(滅)하는 까닭에 멸(滅)이 곧 생(生)이 된다.  불생(不生)이 곧 생(生)하는 까닭에 생이 곧 적멸(寂滅)이다.  합하여 말하자면 생이 곧 적멸이지만 멸을 고수하지 않으며 멸이 곧 생이 되지만 생에 머무르지 않으니 생과 멸이 둘이 아니요."

  지눌의 <진심직설(眞心直說)>에서는 죽음을 극복하는 네 가지 단계를 밝히고 있다. 

   “생사의 없음을 아는 단계와 생사의 없음을 체험하는 단계와 생사의 없음을 계합(契合)하는 단계, 그리고 생사의 없음을 활용하는 단계이다.” 

  혜심(慧甚)<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에서 죽음은 깨달음에 의해 극복되는 것이요,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법은 스스로도 생기지 않고 남에 의해 생기지도 않으며 함께 하지도 않고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생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이 네 글귀를 환하게 깨달으면 맑은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묘한 작용은 항하의 모래처럼 많을 것이요, 혹 그렇지 못하면 념념(念念)이 일어날 때를 보라.  그것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생기는 것인가?  사라지는 것인가?  만일 생긴다고 한다면 생기기는 어디서 생기며 사라진다고 한다면 사라지는 것은 어디로 가는가?  있고 없으며 생기고 사라지는 데에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의 반연을 떠나고 이름을 떠나고 말을 떠날 것이며, 그러하다면 모든 법도 그럴 것이니 이른바 한 잎이 떨어지면 천하의 가을이요, 한 티끌이 일어나면 온 땅을 거둬들이는 것이다.  끝내는 어떠한가?”

  원효와 지눌, 혜심 스님의 위와 같은 법문처럼 ‘생사일여(生死一如)’한 무상(無常)의 진리를 확연하게 깨닫고 자성(自性)을 회복하는 순간이 바로 해탈이요, 열반인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불교적 죽음의 극복의 순간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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