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녹색연합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98년 6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이 글은 편집 과정에서 약간 삭제되었는데 여기서는 그 원문을 올립니다.

<명상, 마음의 속도를 줄이는 일>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체제가 갖추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해 줄 것이니 인간은 시간적 여유가 많아질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게다가 시간을 단축시키는 문명의 이기들이 속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시간에 대해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수많은 기계들이 발명되어 인간의 노동량의 상당 부분을 덜어준 것이 사실이다. 기계는 처음에는 산업의 현장에서 인간의 일을 대신해 주더니 나중에 가서는 가사 노동에 있어서도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인간이 해야할 수많은 일들을 기계가 대신해주고 있다.
그뿐인가?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과거에는 몇 달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는 일들을 몇 시간 내에 마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 외에도 시간을 벌어다주는 기계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그들의 예측처럼 그렇게 여유롭고 한가한 삶이 된 것은 아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기계를 이용해서 시간을 많이 벌면 벌수록 인간은 더욱 바빠지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빠름을 두고 경쟁을 하기 때문이다. 경쟁에는 많은 분야가 있지만 산업사회 이후에 사람들은 특히 빠름을 중시하게 되었다. 산업사회에서는 빠른 것은 살아남고 느린 것은 점차 도태된다. 그러나 보니 점차 사회 전반에 걸쳐 빠름이 미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현대는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간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도 바쁘게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부랴부랴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서 직장에 출근을 해야 한다. 직장에 가서는 시간에 맞추어 제품을 완성하거나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에 맞추어 사람을 만나야 되고 전화를 걸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일선의 산업 현장에서 이렇게 빠른 것이 미덕이 되다 보니 문화 생활에서도 빠른 것이 유행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의 대중 가요를 보자. 전반적으로 빠른 템포에 자극적인 멜로디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라디오를 듣거나 TV를 보다가 느리고 조용한 노래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다. 광고 또한 마찬가지이다. 짧은 시간 안에 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전광석화처럼 지나가는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뿐인가? TV연속극이나 영화도 극의 전개가 빠르고 다이나믹한 장면이 많은 것이 사람들의 인기를 끈다. 특히 영화는 그런 현상이 더욱 심하다. 그래서 쾌속질주하는 자동차 위나 기차 위에서 아슬아슬한 액션을 벌이거나 분초를 다투는 긴박한 장면이 많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다.


빠른 것도 좋고 바쁜 것도 좋다. 그러나 문제는 바쁘고 빠름이 지나칠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쉬 지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때로는 느리고 한가함 속에서 깊은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러할 때 조화와 균형을 유지할 수 있고 건강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삶은 그렇지가 못하다.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빠르고 바쁜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전히 경쟁의 대오에서 탈락하거나 혹은 스스로 이탈하기 전에는 깊고 편안한 휴식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육체적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허덕이면서 삶의 수레바퀴에 끌려 다니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모순이다. 시간을 단축시키는 기계를 발명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시간을 벌어서 삶의 여유를 즐기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도리어 그로 인해 더욱 더 시간을 빼앗기고 시간에 허덕이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하기야 산업 사회의 모순이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의학의 발달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게 하였지만 동시에 무기의 발달은 한꺼번에 대량살상을 할 수도 있게 하였다. 물질적인 풍요 뒤에 감추어진 어두운 그림자인 자연파괴와 환경오염 문제 등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모두는 산업 사회라는 이름의 기차를 타고 정신없이 어디론가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중이다. 어떤 사람은 그곳이 행복이 넘치는 낙원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곳이 파멸의 낭떠러지라고 한다. 그러나 목적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 큰 문제는 기차를 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기차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차의 속도에 맞추어 석탄을 퍼붓느라 바빠서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서로 부지런히 석탄을 퍼붓기 때문에 기차의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이에 따라서 사람들도 더욱 부지런히 석탄을 퍼부어야 한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도 위태로운 일인가?


이제는 우리가 타고 가는 기차의 방향과 속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낭떠러지에 가까이 간 뒤에는 방향을 틀 수도 없고 속도를 줄일 수도 없다. 그 때는 모두가 파멸이다. 일단 먼저 속도를 줄이자. 속도를 줄이면 우리가 타고 있는 기차의 방향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생길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여러 가지 생산 시스템이나 사회 작동 시스템은 당장 그 속도를 줄이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일단 먼저 우리 마음의 속도를 줄여야 한다. 명상은 우리 마음의 속도를 줄일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다.


명상에는 여러 가지 효능이 있다. 일단 명상을 하게 되면 마음이 느긋해지고 평화로워진다. 명상을 하면 정신적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아울러 육체적인 이완도 가져다준다는 것은 이미 임상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바삐 돌아가는 삶의 수레바퀴에 지친 사람들에게 휴식을 줄 수 있다.
명상의 효능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바람직한 명상법은 마음에 휴식과 평안을 주는 일차적인 기능을 넘어서 자신의 삶을 여유롭게 관조하게 하고 나아가 삶을 조율시키는 효능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마음에 여유가 있고 삶을 관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모두가 타고 가는 기차가 지금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그리하여 그 방향도 조정하고 속도도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명상은 단순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삶의 전체적인 차원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명상은 좀 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기술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명상이라고 하면 일상의 삶과 괴리된 신비하고 낮선 세계 내지는 깊고 오묘한 종교적인 세계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명상에 너무 깊이 빠지게 되면 일상의 삶으로부터 일탈될까봐 두려워 감히 명상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일상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명상이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정신적 사치로 비치기도 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명상을 추구해온 사람들이 일상의 현실과는 괴리된 채 고원한 내면 세계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이제 명상은 좀 더 평범한 일상의 영역으로 내려와야 한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명상법들은 주관적인 느낌이나 인식을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주관적 착각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한 두명의 개인적인 착각은 그것이 착각인지 쉽게 알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착각을 일으킬 경우 그것이 착각인지 구분하기는 쉽지가 않다.


특히 명상의 세계에서는 자신들의 종교권이나 문화권에 따른 집단주관척 진리를 마치 절대객관적 진리로 착각하는 사례가 많다. 바로 이러한 집단주관적 착각 때문에 수많은 명상법들이 서로 모순되고 충돌한다. 이러한 모순과 충돌은 명상을 보다 보편적인 삶의 기술로 인식하는 데 방해물이 되고 있다. 지금은 지구촌 시대이다. 이제는 구시대적인 집단주관을 극복하고 보다 보편적인 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오랜 세월 명상을 추구하였다. 그 사이 다양한 명상법을 접하였고 다양한 명상의 세계도 체험하였다. 그런 가운데 다양한 명상법의 이면에 흐르는 우리 의식의 원리와 구조에 대해서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되었으며 삶에 대해서도 보다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집단주관에 얽매이지 않고 일상적인 삶과 괴리되지 않는 명상법을 개발하여 사람들에게 보급하려고 하는 중이다.


여기서는 쉽고 간단하면서도 오래 가는 명상법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자기의 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명상법이다. 필자는 그것을 숨 바라보기라고 부른다. 그 요령은 다음과 같다.
먼저 편안하고도 바른 자세로 앉는다. 다리는 결가부좌 내지는 반가부좌를 취한다. 이것이 안 되는 사람은 반가부좌도 좋고 의자에 앉아도 좋다. 다만 허리를 바로 세우고 어깨와 가슴에 힘을 빼는 것만 지키면 된다.


먼저 심호흡을 몇 차례 한다. 아랫배에서부터 숨을 차곡차곡 쌓아서 가슴까지 가득 숨을 채운 다음 천천히 내뱉는다. 이 때 들숨은 코로 천천히 들이마시고 날숨은 입을 최대한 작고 둥글게 만들어서 마치 누에고치가 실을 뽑아내듯이 가늘고 길게 내쉰다.


이 때 단전 등의 특수한 지점에 의식을 집중하거나 상상력을 동원하여 억지로 기를 느끼려 할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집단주관적 착각을 강화할 따름이다. 다만 자신의 호흡 자체를 의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심호흡을 몇 차례 하면 금새 마음이 차분해지고 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몇 차례 심호흡을 한 다음에는 인위적인 호흡을 그만 두고 호흡은 그냥 자연스럽게 둔다. 일체의 인위적인 상상이나 특이한 대상에 대한 집중을 하지 않고 자신의 숨을 있는 그대로 느끼면서 바라보아야 한다. 단지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좀 더 명확히 느끼기 위해서 코끝에 마음을 모으는 것은 무방하다. 이렇게 코끝에 마음을 모으고 호흡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면 호흡은 자연스럽게 점차 느려지고 가늘어진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만 의식을 모으려고 하지만 초보자들은 잡생각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이때 잡생각을 뿌리치려고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오면 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가면 가는 것을 알아차리면 된다. 소리가 들리거나 느낌이 일어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바라보면 된다.


중요한 것은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바라보기를 하다가 호흡을 놓쳐버리고 잡생각이나 다른 현상에 마음을 빼앗겼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차린 뒤에는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면 된다. 처음에는 자주 호흡을 놓치고 엉뚱한 대상을 좇아 다니겠지만 나중에는 점차 호흡을 바라보는 것을 놓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명상법의 핵심은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데 있다. 이 속에는 특정한 종교적 도그마도 없고 특정한 집단주관도 없다. 그리고 일상의 삶과 괴리될만한 유별난 신비적인 요소도 없다. 단지 자신의 호흡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자신의 호흡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고 그에 따라 자신의 마음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관조의 힘과 여유가 생기게 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과 이 세상에 대해서 보다 거시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은 바쁜 시대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무작정 삶의 굴레와 시대의 흐름에 끌려 다니지 말자. 이럴 때일수록 더욱 느림의 여유를 갖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사색하고 관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 모두가 타고 있는 이 기차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 자그마한 명상법이 사람들의 마음에 느림의 여유를 주고 나아가 자신의 삶과 이 세상을 관조하는 지혜를 가져다 줄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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