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의 불교역사에서 깨달음의 문제, 즉 ‘돈오돈수 돈오점수’ 논쟁만큼 치열하게 전개된 논쟁도 없을 것이다. 깨달음(인식)과 수행(실천)의 입장과 관련해 치열한 논전을 벌였던 돈점논쟁은 1981년 당시 조계종 종정이던 퇴옹(退翁) 성철(性徹?1912~1993)스님이 <선문정로(禪門正路)>를 통해 이 문제를 끌어냄으로써 달아올랐다. 다시 말하면 ‘돈오점수와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논쟁은 성철 스님이 보조(普照)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선문에서 바른 길잡이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역기능을 했다고 지적하면서 제기됐다.

  성철 스님의 문제 제기가 있기 전까지 보조국사의 돈오점수는 한국 불교의 정맥으로 수용되고 있었고,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는 조계종의 종조 문제 등과 맞물려 쉽게 고개를 들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래서인지 <선문정로>가 나온 지 10년이 되는 1990년에 가서야 비로소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문제가 학술적으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이 주제에 대해 불교계 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관심과 논의가 이어졌다. 논쟁은 대개 세 갈래로 나뉘고 있다. 첫째는 성철 스님의 돈오점수에 대한 비판을 재비판하면서 돈오점수설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보조사상연구원측의 입장을 들 수 있다. 둘째는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설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해인총림측 스님들의 입장이다. 셋째로는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각각의 입장이 가진 근본 취지를 최대한 받아들여, 당면한 한국불교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실마리로 삼고자 하는 박성배 교수의 ‘돈오돈수적 점수’설의 입장이 있다.

- 보조와 성철의 주장 그리고 반박들
  “스스로의 불성을 깨달은 뒤에도 자기 속에 배어 있는 습기를 수행으로 닦지 않고는 깨달음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돈오점수론에 대해 “깨달음 뒤에도 닦을 번뇌가 있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는 돈오돈수론에 대한 반박으로 이어지는 돈점논쟁은 중국 당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불교사에서 지속적이고도 치열하게 전개돼온 쟁점이다. 한국 불교에서는 돈?점의 융화를 꾀한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론이 정통수행론으로 자리잡았고, 조계종은 60년대 통합종단이 발족되면서 보조를 종조로 모심으로써 그 정통성을 확인했다.

  그러나 1981년 당시 종정 성철 스님이 저서 <선문정로>에서 700여 년간 한국불교 선문의 수행지표인 보조의 돈오점수론을 통박, 이를 선문의 이단 사견(邪見)으로 정죄하고 나섬으로써 돈?점논쟁이 재연됐다.

  성철 스님은 돈오점수사상에서 ‘돈오’는 해오(解悟 ? 도리를 깨닫는 것)인데, 이는 곧 지해(知解 ? 知見解會의 준말로 思量分別에 의한 지식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알음알이’ 정도의 뜻을 지니고 있다)라고 한다고 주장했다. 지해는 깨달음을 이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깨달음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며 선문 최대의 금기이고, 따라서 돈오점수를 따르는 것은 지해종도이며, 지해종도가 주장하는 돈오점수는 선문의 이단사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돈오돈수의 돈오는 해오가 아닌 궁극적 깨달음인 증오(證悟)요, 제8아뢰야식의 미세망념(微細妄念)마저 끊어진 완벽한 깨침인 구경각(究竟覺)이라는 것이다.

  양자의 중요한 차이는 돈오에 대한 입장과 돈오 후의 수(修)에 관한 것이다. 보조국사는 돈오를 해오라고 하지만, 그가 말하는 돈오는 견성(見性?見自本性)이며 부처와 다르지 않다고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다만, 자기의 본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습기로 인하여 구경인 성인에 이르기 위해서는 해오인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고 또 닦아야(漸修)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철 스님은 해오는 견성이 아니고 증오라야 구경각인 견성이며, 해오에 의지해서는 증오인 구경각에 이를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증오인 돈오로써 견성하면 곧 돈수이므로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성철 스님은 깨침과 닦음이 점차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일시에 완성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선문정로>가 출판된 지 거의 10여 년이 지난 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주최로 송광사에서 열린 학술대회와 1993년 해인사에서 열린 백련불교학술대회였다. 물론 이전에도 이종익의 <보조선(普照禪)과 화엄(華嚴)>(‘한국화엄사상연구’, 동국대학교 출판부,1986), 법정의 <보조사상> 제1집 권두언(보조사상연구원, 1987) 등에서 <선문정로>의 입장을 반박하고 있으며, <수다라(修多羅)> 제3호(해인승가대학, 1988)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라는 특집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성철 스님의 주장에 대하여 보조국사의 돈오점수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과연 돈오점수가 선문의 이단이고 사설(邪說)인가?”(김호성, ‘돈오점수의 새로운 해석’)를 되물으며, 문헌 인용과 해석의 문제, 돈오와 해오, 견성의 개념, 돈점논쟁의 역사적 뿌리 등을 고증하고 논증하면서 성철스님의 주장을 비판한다. 이들은 주로 돈오에 관해서는 성철 스님의 문헌 인용과 해석에 관한 학술적 형식을 문제삼고, 수(修)에 관해서는 자비행?보살행?보현행 등 중생 구제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성철 스님을 비판한다.

  이에 비해 성철 스님의 견해를 지지하고 따르는 측에서는 보조측을 비판하기보다는 주로 성철 스님의 견해를 선양하는 데 치중하여 왔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목정배의 ‘현대 한국 선의 위치와 전망’(‘깨달음, 돈오점수인가 돈오돈수인가’)과 ‘돈오사상의 현대적 의미’(‘백련불교논집’), 윤원철의 ‘선문정로의 수증론’(‘백련불교논집’ 4)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양자의 입장을 수용하고 회통시키려는 제3의 입장도 있다. 박성배는 체용(體用)의 논리와 근기론과 경지론을 적극 도입하여 돈오돈수적 점수설을 주장하며(‘성철 스님의 돈오점수설 비판에 대하여’ ‘돈오돈수론’ ‘법성 스님의 돈점논쟁 비판에 대하여’), 법성 스님은 이론과 실천의 철저한 자기 실현이라는 입장에서 연기론에 의하여 깨달음에 관한 개념을 정리하고, 수(修)의 문제는 현실 역사 속에서의 사회적 실천행으로 파악한다.(‘깨달음의 일상성과 혁명성’ ‘초기 선종사와 돈오입도요문론’)

  결국 지눌의 돈오점수 이론은 ‘깨침의 본질’을 ‘닦음의 문제’와의 관계 속에서 이야기하는 넓은 의미의 종합적인 수행이론이라면, 성철의 돈오돈수 이론은 ‘닦음의 문제’만을 다룬 좁은 의미의 특수한 수도이론으로서 두 사람의 사상이 대립적이거나 어느 한쪽을 이단사설로 보는 견해는 지나치다는 것이다.

- 논쟁의 문제점은 없는가
  돈점논쟁은 종조 논란과 맞물리면서 증폭됐다. 조계종 종헌상의 종조는 보조 지눌(1158~1210)과 태고 보우(1301~1382)가 서로 엇바뀌면서 오락가락했다. 성철 스님은 그의 최초 저서인 ‘한국불교의 법맥’에서 종조가 보조 지눌 스님이라는 종래의 설을 뒤엎고 태고 보우 스님임을 분명히 밝혔다. 보조설의 근거로는 보조가 독자적인 한국불교 선종의 법맥을 잇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도결사를 통해 한국 불교의 선풍을 진작시킨 점이 제시된다. 반면 태고설은 태고가 우리나라에 선종의 뿌리인 중국 임제종으로부터 법통을 직접 전수받은 점을 내세운다.

  보조와 태고의 또 다른 비교점은 수행방법론이다. 보조가 깨달음에 이른 뒤에도 끊임없이 닦는 돈오점수를 택한 반면 태고는 한번 깨치면 더 닦을 게 없다는 돈오돈수에 닿아 있다. 이같은 수행방법의 차이는 지난 수년간 돈점논쟁으로 점화돼 돈오돈수를 주장한 성철 스님의 해인사와 보조 지눌의 뒤를 이은 송광사간의 싸움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논쟁이 무리하게 진행된 면도 없지 않다. 예컨대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문제는 인식론과 존재론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어두운 방에 전깃불을 켜면 일순간에 어둠은 사라지는 현상을 돈오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인식론의 얘기이다. 어둠은 사라졌지만 방바닥에 먼지는 남아 있다는 문제의식이 점수인데, 이것은 존재론적 발상이다. 결국 잣대자체가 서로 맞지 않는, 맥락이 다른 것을 무리하게 얽은 것 아닌가 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사실 돈오점수는 깨친 다음에도 업습(業習)이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고, 돈오돈수는 업습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인데 학술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논쟁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논쟁이 진행되면서 가장 중요한 실천 수행의 문제는 빠지고 말꼬리 잡는 식의 공허한 논쟁으로 변질되었다는 문제점도 제기됐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불교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깨달음의 문제를 텍스트나 학술적 형식, 개념의 문제로 논쟁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참선을 하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만 무엇이 돈오이고 무엇이 점수이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고 백날 모여서 토론해 봤자 그것은 구두선에 지나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문제는 그간의 돈점논쟁이 깨달음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 윤원철이 성철을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선불교 전통에 충실하려는 근본 문제의식’을 문제삼지 않고 문헌 해석이나 세속의 윤리적인 기준의 자비행, 보살행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데 있는 것 같다.

  깨달음(悟)과 닦음(修)의 입장에 대한 논쟁인 돈점논쟁은, 삶과 현실에 대한 참된 인식과 올바른 실천이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함으로써, 사회 세계의 존재 해명과 인간 인식의 한계, 실천의 문제를 쟁점으로 하는 사회학방법론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했다. 또 돈점논쟁을 통해 ‘사회적 사실(social facts)’이라는 대상에 중점을 두느라고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던 사회학자의 자기 성찰이 얼마나 중요하며, 성찰적 지식인으로서의 삶의 실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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