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사회 갈등을 풀 수 있는 방법은 선(禪)에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갈등의 원인은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선은 나를 바로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조계종 중앙종무기관 종무원조합 초청으로 6월 15일 조계사에서 열린 ‘선을 묻고 답하다’ 주제의 대효 스님(제주 원명선원장) 초청 법회에서 참석자들은 선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쏟아냈다. 이에 앞서 대효 스님은 생활선과 참선에 대해 강의를 했다. 참선은 어떻게 하는 것이고, 화두의심은 또 어떻게 하는 것인지, 그리고 생활선(生活禪)은 가능한 것인지를 질의응답식으로 알아본다.


참선을 하는 것은 잘 살려고 하는 것인가, 잘사는 것과 상관없는 것인가.

-잘 살려고 한다면 그 자리에는 잘못 살고 있는 ‘나’를 전제돼 있는 것이다. ‘나’가 있는 것은 순간적이고 사라질 존재로서 가슴에 ‘허망하고 부질없는 존재로서 나’를 못박아놓는 것이 된다. 잘못 사는 나, 불만족의 나, 한을 품은 나를 고정해 놓고 참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생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완전한 그런 나를 자신이라고 단정하고 또 다른 나를 찾는 꼴이 된다. 그런 것은 참선이 아니다. 깨닫겠다고 하는 생각도 이는 자신의 가슴에 미혹한 사람이라는 것을 못 박는 것이 된다. 자신을 깨달아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 선의 세계다.


▶‘나’를 버리라는 말 속에는 욕심을 버리라는 의미도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활인이 욕심을 버리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라고 하는 것은 사실 관념이고 속는 것이다. 순간적인 허상을 ‘나’라고 보고 살기 때문에 삶 자체는 잠재된 위기심리에서 재물과 권력 보잘것없는 명성에 목말라하고 이를 의지처로 삼게 되는 것이다.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 잘사는 것은 아니다.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일해야 하고, 누굴 위해 사느냐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거기에는 늘 ‘나’라는 존재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을 놓으라는 것이다. ‘나’에서 벗어나서 일하고 생활하는 것 자체가 수행이요 참선이다.


길을 갈 때 간다는 생각마저도 놓으라 하는데, 그러면 목표의식 없이 현실에 만족하고 살라는 것인가. 이것이 선인가.

-간다는 것 자체가 목표고 작용이다. 독서할 때 다른 생각이 없이 글을 읽는다. 책을 잘 읽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독서삼매를 방해한다. 읽고 있다는 생각조차 없을 때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다. 가되 간다는 생각이 없는 것이 책을 읽되 읽는다는 생각이 없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되면 갈등이 없어지며, 생활과 공부가 나누어지지 않고 하나가 된다.


생활에서 선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는데, 생활 속에서 효과적인 참선수행 방법은 무엇인가?

-참선은 긴장하고 무엇인가를 특별히 준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잠 안자고 먹지 않고 참고 견디며 하는 것으로 알고 있거나, 용맹정진으로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불교를 잘 알고 경전을 많이 읽고 외우고 지식이 뛰어나야 깨닫는 것이 아니다. 그와 정반대다. 선입관이나 기존관념, 알고 있는 것을 떨쳐버리는 것이 참선이다. 법문을 들으면서 머릿속에 담고 있는 고정관념을 비우는 것이 참선이다. 생활하면서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관념을 버리는 것이 바로 생활선이다.

자기 것을 지키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왜 지키려고만 하나. 사람들은 천근을 지고 산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 눈을 빼앗긴다. 참선은 천근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편안하고 홀가분하게 내려놓는 연습을 하면 된다. 참선은 철저하게 실리적인 것이다.


참선은 철저하게 실리적인 것이라고 했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 참선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를 말하는 것인가?

-참선을 스트레스 해소와 욕구 성취를 위해 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이것은 지극히 바람직하지 않다. 참선은 자신을 바로 보기 위한 노력이다. 경제적으로 보면 이만큼 값진 투자도 없다. 하루에 5분 10분 참선을 해서 자기를 바로 보게 된다면 이보다 더한 가치를 어디에서 찾겠는가. 그렇기에 참선은 가장 실리적인 것이다. 스트레스나 정신적 고통은 정진하는 가운데 저절로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 참선의 궁극이 아니다.


불자들이 참구하기에 좋은 화두가 있다면?

-‘부모에게 생기기 이전의 본래 나는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권한다. 이 화두는 발심을 배가시키고 신심을 굳게 한다. 순간적인 허망한 나를 벗어나 ‘본래 나’를 찾는 것은 순간순간으로 바뀌고 실재하지 않는 허망한 나를 벗어나 ‘부모에게 생기기전 본래 나는 무엇인가’를 참구하는 것이다. 이를 ‘무엇인가’라고 줄여서 화두로 삼아도 된다. 진지하게 의문을 품고 의심해 나가되, 그 뜻을 진지하고 간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어인가’나 외는 앵무새가 되고 만다.


관세음보살을 찾는 것도 화두 참선인가?

-일반적으로 이것을 염불선이라고 하며, 화두 참선은 아니다. 화두참선은 활구(活句)참선이라고 한다. 활구 참선은 출발과 배경이 전혀 다르다. 참선을 통해 화두의심을 하면 할수록 잘못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 생기고 여기서 발심과 신심이 생긴다. 화두의심만 바로 하면 잡다한 길은 저절로 정리된다. 염불선은 참선으로 나아가는 방편선이다.


▶짧은 기간 안에 화두의심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데 가능한가?

-화두참선에서 화두를 의심해서 마지막에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화두를 의심하기 시작할 때가 곧 깨달음의 출발이다. 이 화두를 의심하는 것은 ‘순간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나’를 자신으로 보고 속고 착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즉, 순간순간이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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