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의 기도

사람들은 기도를 현실적인 소원 성취 또는 현재 처한 고난을 벗어나는 방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기도의 결실은 그 정도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는 오도(吾道)의 한 방법으로서, 수행의 걸음마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또한 기도를 통하여 특별한 수행의 경지를 이루게 됨은 물론이요, 도를 깨닫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나 말만으로는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므로, 실제 있었던 일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신심을 가다듬어 보자.

1) 기도로써 수행의 기틀을
세상의 그 어떤 일이든 처음은 언제나 중요하다.
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의 시작하는 마음, 그 첫마음은 너무나 순수하고 완전히 비어 있으며, 완전히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처음 시작할 때 수행의 기틀을 올바로 정립하면, 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부처님의 깨달음을 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처음 출가한 사람들에게 신심을 다 바쳐 기도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업장을 녹이고 수행의 기틀을 잡을 것을 간곡히 권하곤 한다. 나 또한 수행 초기에 네 차례의 기도를 통하여 대발심(大發心) 용맹 정진한 일이 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용성(白龍城)스님도 그러한 고승들 중의 한 분이다.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백용성 스님은 천수대비주(千手大悲呪)를 외워 수행의 기틀을 바로잡은 고승이다.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이 불교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877년 14세 때의 일이었다. 꿈속에서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고 불경을 보기 시작했고, 남원 덕밀암(德密庵)으로 출가하였으나 부모님의 강한 만류로 집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 후 2년이 지난 16세 때 해인사로 찾아가 화월(華月)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정식으로 출가하였으며, 17세 때 의성 고운사의 수월(水月)스님을 찾아가서 소년답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나고 죽음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일입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여 날로 변합니다. 어떻게 해야 생사도 없고 변하지도 않는 '나'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까?"
그러나 당대의 대고승인 수월스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고, 먼저 천수대비주를 외울 것을 권하였다.
"지금 숙업(宿業)이 무겁고 장애가 많아 견성법(見性法)을 너에게 일러주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대비주(大悲呪)를 부지런히 외우면 업장도 소멸되고 마음도 맑아져서 저절로 길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얼마 동안은 아무 생각 말고 대비주만 외우도록 하여라."
수월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스님은 대비주를 10만번 외우기로 스스로 다짐하고 부지런히 외웠다. 9개월에 걸쳐 대비주를 10만번 외워 마쳤을 때 스님은 양주 보광사 도솔암(兜率庵)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산하 대지와 삼라만상에는 모두 근원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근원은 무엇인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근원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의문을 일념으로 생각한 지 엿새가 되었을 때, 마치 깜깜한 방에 등불이 밝혀지듯 그 근원을 확연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용성스님은 '무(無)'자 화두를 꾸준히 참구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하였으며, 일제의 대처 불교에 대응하여 대각교운동(大覺敎運動)을 전개하고 역경 사업에도 크게 공헌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스님의 깨달음과 모든 활동에 10만 독(讀)의 대비주가 힘의 원천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을 해야만 한다. '대비주'도 좋고 '관세음보살'도 좋다. '나무아미타불'도 좋고 '마하반야바라밀'도 좋다. 무엇이든 한 가지를 택하여 부지런히 염하여 보라. 특히 지금 불법의 문턱에 들어선 사람이면 꼭 한 차례 깊이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
어려운 교리나 의심도 나지 않는 화두를 들고 마구잡이로 씨름하기보다는, 스스로 마음을 정하여 업장을 녹이고 신심을 북돋울 수 있는 기도를 한바탕 열심히 하는 것이 장래의 수행에 훨씬 큰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불보살의 가피를 입을 때까지, 아니면 7일 또는 삼칠일의 용맹스런 기도나 백일기도를 올리게 되면, 처음 출가했을 때의 순수한 그 마음에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되어 해탈의 세계로 쉽게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수행 중에 장애가 있을 때
그리고 수행을 하다 보면 뜻과 같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번뇌가 치성할 때도 있고 세속일에 대한 미련이 솟구칠 때도 있으며, 몸이 공연히 아프거나 뜻하지 않은 일에 휘말릴 때도 있다. 수행자는 이러한 일을 당했을 때 포기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러한 때에 필요한 것이 기도이다.
다시금 마음을 굳게 가지고 기도를 해보라. 새로운 힘이 샘솟게 된다. 진정 참된 수행자라면 시련의 시기를 기도로써 극복하여 불보살님께로, 그리고 불보살의 경지로 더욱 가까이 다가서야 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선사 금오(金烏, 1896-1968) 스님이 젊었을 때인 1920년대 초기, 스님은 당대의 선지식인 수월(水月)스님을 뵙고 지도를 받기 위해 만주 봉천으로 향했다.
그런데 조선 땅과 만주 땅과 러시아 땅이 합해지는 회령 지방을 조금 지나 막 러시아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마적 떼들이 어느 부잣집을 털다가 반항하는 주인을 죽인 강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부잣집 안 주인은 제정신이 아니었고, 범인 검거에 혈안이 되어 있던 러시아 경찰들은 불심검문을 하다가 장비처럼 생긴 금오스님을 체포하여 그 부인에게 보였다.
"이 사람이 그 마적 떼요?"
"그런 것 같아요, 마적 떼 대장과 비슷하게 생겼어요."
정신이 반쯤 나간 그 부인의 말 한마디에 금오스님은 완전히 범인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고문을 당하면서 자백을 강요받았다.
"나는 수도하는 승려이지 마적 떼가 아닙니다."
그러나 러시아 경찰은 믿지 않고 밤낮없이 고문을 계속하였다. 그러더니 며칠이 지나자 고문을 중단하고 감옥에만 가두어 놓는 것이었다.
'웬일일까? 고문도 그만두고 감옥에만 가두어 두다니..'
이렇게 고민을 하면서 지내던 어느 날, 한국인 한 명이 그 감방에 들어왔다. 학교 선생인 그는 산골짜기에 아편을 심었다가 발각되어 잡혀 온 것이라고 하면서 물었다.
"스님이 살인 강도의 누명을 쓰고 들어온 분입니까?"
"그렇습니다."
'스님, 범인은 이미 잡혔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석방시켜 주지 않는 거요?"
"아마, 이 감옥에서 나가기가 어려울 걸요?"
"왜요?"
"우선 조선 사람은 나라가 없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힘을 써 주지 않습니다. 설사 러시아 쪽에서 풀어 준다고 하더라도, 조선 사람이 러시아 감방에서 죄없이 갇혀 있었다는 것을 구실로 일본은 러시아에 보상을 요구합니다. 러시아로서는 공연한 말썽거리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으므로, 차라리 감옥에서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보복을 두려워한 그 부잣집 안주인이 돈을 써서 스님을 풀어 주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큰일났구나. 이 감옥에서 살다가 죽어야 하다니! 이토록 난감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 있는가? 필경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탈출을 하는 수밖에는 딴 도리가 없겠구나.'
금오스님은 감옥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다. 참선도 화두도 그만두고 오로지 관세음보살의 구원만을 갈구하며 부지런히 염불하였다.
사흘째 되는 날 밤, 어떤 사람이 철창 바깥에 나타나 감방 안을 들여다보며 주위를 살피는 것이었다.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쇠창살 두 개를 잡고 쑥 뽑아 올리자, 쇠창살이 그대로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뽑힌 쇠창살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어 스님을 향해 '씩 -' 웃고는, 다시 쇠창살을 꽂아 놓고 사라졌다.
비몽사몽간에 이 일을 접한 금오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데 쇠창살 두 개를 뽑아 보았다. 이상하게도 쇠창살이 쏙 뽑히는 것이었다. 스님은 감방을 빠져나와 형무소 문 쪽으로 다가갔고, 때마침 문지기들이 졸고 있어 몰래 기어 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완전히 형무소를 탈출하여 달려가다가 다리가 아파 수수밭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말을 탄 간수들이 나타나 탈옥수를 찾는 수색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스님이 다시 안전한 곳을 찾아 피해 가는데, 한 간수가 말을 몰아 쫓아오더니 잡으려고는 하지 않고 묻기만 하는 것이었다.
"탈옥수 한 명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소?"
"보지 못했는데요."
"이상하다. 어디로 사라졌지?"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관세음보살의 가피로구나.'
스님은 불보살님의 은혜에 크게 감격하면서, 만주 봉천의 깊은 산림 속 토굴에 계신 수월스님을 찾아가, 1년 동안 모시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금오스님은 훗일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그때의 일을 자주 들려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참선하는 수좌도 가끔은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이 금오스님의 말씀처럼 참선 수행자도 장애가 있으면 한바탕 기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도를 하면서 원(願)을 새롭게 가꾸고, 가피를 입을 일이 있으면 가피를 받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한 번의 기도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도심(道心)에 걸림이 없을 때까지 거듭거듭 행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갈등이 있으면 기도하라. 장애가 많고 공부가 잘 되지 않으면 기도를 통하여 거듭거듭 발심하라. 불보살님께서는 틀림없이 큰 힘을 주실 것이다.

3) 기도의 극치는 깨달음
나아가 기도가 삼매를 이루어 오랜 시간 계속되면 곧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기도를하여 힘이 드는 것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고비를 넘기고 나면 묘력(妙力)을 얻게 되고, 참선을 하는 이라면 밥 먹고 잠자는 것도 잊는 경지에 들어서야 득력(得力)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상대적인 경계와 생사(生死)마저도 초월하는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빠져들면 오도(悟道)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 선조 때 선하자(禪荷子)라는 스님이 계셨다. 이 스님은 벽송대사(碧松大師)의 제자요, 조선시대 제일의 고승으로 추앙 받고 있는 서산대사(西山大
師)의 사숙이 되는 분이다.
스님은 경상도 울산 출생으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16세에 출가하여 전국의 유명한 사찰을 다니며 수행하였지만, 도를 이루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24세가 되던 해, 스님은 크게 마음을 다져 잡고 많은 성현이 이적(異蹟)을 나타내 보였다는 묘향산 문수암(文殊庵)으로 가서 대오(大悟)의 서원을 세우고 정진하였다.
어느 날, 문수암 주위를 산책하던 스님은 건너편 선령대(仙靈臺)에서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거닐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범속한 인물이 아닌 듯하여 쫓아가 보았으나, 노인은 인홀불견(人忽不見), 간 곳이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두 번 세 번 눈을 씻고 거듭거듭 살펴보았지만, 그 족적(足蹟)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분이 성현의 화신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 없다.'
이렇게 확신한 선하자 스님은 기도를 하여 기필코 그 노인을 만나 보기로 결심을 하고, 백일기도에 필요한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안주 땅으로 탁발을 시작했다. 하지만 단순히 필요한 양식을 구걸한 것이 아니라, 하루 일곱 집을 돌면서 정성껏 축원하며 탁발하였고, 탁발한 식량을 등에 지고 묘향산으로 돌아올 때는 한 걸음 옮기고 절을 한 번 하는 일보일배례(一步一拜禮 )를 행하였다.
비지땀을 흘리며 산 중턱쯤 올라왔을 때, 16명의 조그마한 아이들이 놀고 있다가 스님을 반겼다.
"스님, 힘드시지요? 저희들이 올려다 드리겠습니다."
아이들이 스님의 짐을 빼앗다시피 하여 문수암까지 들어다 주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아이들이 일반 세속인이 아니라 선하자 스님의 정성에 감동하여 나타난 문수암의 16나한이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선하자 스님은 직접 마지(부처님께 올리는 밥)를 지어 올리며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스님은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목탁을 두드리며 관세음보살을 염창(念唱)하였을 뿐 아니라, 마지를 올리는 시간, 밥을 먹는 시간, 화장실을 가는 시간에도 계속해서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다.나중에는 꿈속에서도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마침내 1백일이 흘러 회향날이 되었다. 스님이 마지막 마지를 지어 법당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갑자기 커다란 망태기를 짊어진 늙수그레한 포수가 나타나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스님, 여러 날 동안 굶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제발 그 밥을 저에게 주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그 밥을 주고 싶었으나,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인지라 스님은 도리어 포수에게 사정을 했다.
"영감님 사정을 보아서는 마땅히 이 공양을 드려야 하겠지만, 오늘이 저의 백일기도를 회향하는 날입니다. 잠깐만 기다리시면 기도를 마치고 상을 차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포수는 막무가내였다.
"스님께서 마지를 올리고 나면 저는 배가 고파 죽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 마지를 올리는 것보다 불쌍한 중생 하나를 살리는 것이 더 뜻있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기만 합니다만, 스스로 부처님께 깊이 맹세한 바가 있어 어쩔 수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히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이 총으로 스님을 죽이고 밥을 빼앗아 먹을 수밖에!"
포수가 총을 겨누었지만 스님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여태까지도 굶었는데 잠깐 사이를 참지 못한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나 또한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마지를 부처님께 먼저 올리지 않고는 당신에게 밥을 드릴 수 없습니다."
선하자 스님이 그를 떨치고 법당으로 올라가자, 포수는 스님의 등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 ."
총소리는 온 산중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마땅히 죽어야 할 선하자 스님은 쓰러지기는커녕 그순간 확철대오(廓徹大悟)하였다. 스님은 너무나 기뻐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가가대소(呵呵大笑)하였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니 포수는 간 곳이 없었다. 바로 그분은 포수가 아니라 선하자 스님의 정성을 시험하고 깨달음의 연(緣)을 심어 주기 위해 나타난 문수보살님이었던것이다.

죽고 사는 것까지 넘어서서 깨달음을 이루고자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깨달음이 다가서기 마련이다. 꼭 참선을 하여야만 도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하자 스님의 경우처럼 기도가 꿈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일념삼매(一念三昧)에 젖어 들게 되면, 깨달음의 문이 저절로 열리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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