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천도는 무량 공덕의 자비행이다.



생자(生者)는 필멸(必滅)이요. 회자(會者)는 정리(定離)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모두가 언젠가는 형태를 바꾸고 스러져 사라져 가며, 모여 있던 것들은 모두가 언젠가는 반드시 떠나고 맙니다. 


세상은 필멸의 이치에 따라서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 육신은 한조각의 구름덩어리같이 생겨났다가 한 조각 구름덩어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떠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영원은 이 현실의 순간과 이어져 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아귀다툼을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 어떠한 존재들, 중생들도 다 그와 같습니다. 우주의 이법(理法)인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다. 생사(生死)가 본래 하나다. 어떻게 사느냐고 하는 것은 결국 어떻게 죽느냐하는 문제와 통해 있는 것이다.  이전투구의 삶을 살지 말라. 삶을 함부로 살지 말라.” 부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습니다. 태어난 모든 것은 피할 수 없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숙명입니다. 수명은 예고 없이 별안간 끊어집니다.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도 급작스럽게 일어나기에 많고 많은 한을 남기게 됩니다.


죽음을 서서히 맞이하는 경우는 그래도 한스러움이 덜합니다. 그래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과연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부처님도 그랬고 모든 조사 스님들과 도를 닦은 도인 큰스님들은 바로 이 죽음 앞에서 자유로웠던 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처님을 위시해서 모든 조사스님들과 큰스님들을 공경하고 따라 배우는 것입니다.


존재의 참다운 실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바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나의 참모습이 어떤 것이냐는 물음인 것입니다. 육체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사실, 실상이 무형의 존재임을 바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분명 물질로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물질로 된 육체가 아닌 마음에 맡긴다면 우리는 사슬에 묶여 있어도, 쇠창살에 갇혀있다 하여도 자유인 것입니다.


자신의 실상이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허상인 육신에 대한 집착은 그다지 크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육신은 진정 참 ‘나’가 아닙니다.


깨어지고 부셔지는 세계의 허망함에 몸과 마음을 던져 갖가지 원한을 일으켜서 나누며 고통을 자초하는 영가들, 그들은 바로 상념(想念)의 희생자들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 삶을 시작할 때 어머니의 탯줄을 통해 삶을 열어 갑니다. 탯줄은 존재를 가능케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 줍니다. 우리들 모두가 영원의 탯줄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매일 무의식적으로 살아가기에 그저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호흡입니다. 탯줄에 연결되어 생명을 시작하는 어린 아이처럼 무두가 영원의 탯줄, 부처님의 탯줄과 연결된 채로 살아가지만 이를 깨닫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코의 두 개의 구멍, 그 구멍을 통해서 부처님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영가의 천도는 산 사람의 몫이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실존을 바로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상에 대한 깨달음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비결입니다. 자신의 본질이 영원이요 마음이라 했으니,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을 승화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또 어떠한 일도 수단일 뿐 목적은 될 수가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것에 애착을 갖는 것은 뜬 구름을 잡으려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세계는 우리의 마음, 즉 의식(意識)이 그려낸 그림자와도 같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아야만 죽음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모두이 같은 사실에 어둡습니다. 결국 허상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를 안타까운 존재로 만들고 있음을 모릅니다. 열심히 사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집착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고도 애착을 놓지 못해 괴로운 상태에 있습니다. 죽음은 순간에 일어나고 한 찰나 간에 이승과 저승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승에서의  정신착란과도 같이 영혼들의 세계에서도 정신병 든 영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괴로움에 휩싸인 영혼, 병든 영혼들의 제도 역시 산 사람들의 몫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이승을 등지고서도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가들은 미련 때문에 자신도 해치고 산 사람들도 괴롭히는 우주의 미아(迷兒)인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악업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던지는 한 마디 말, 하나의 생각, 행동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삶을 장애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원결(怨結)이요, 악연입니다. 우리가 ‘악연을 극복하여 없애자’ ‘기도하자’ ‘수행하자’ ‘공부하자’ 하는 것 모두가 성불의 길, 성공의 길을 그르치는 장애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믿음과 함께 수도 수행의 마음을 갖는 것은 영가들에게도 수도 수행의 마음을 갖게 하는 일입니다.


삶의 불안과 공포는 모두가 악업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우란분재는 우리들 삶의 부정적 영향력을 걷어내고 몰아내는 지름길입니다. 한 해가 시작되는 봄에 씨앗을 뿌립니다. 그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열심히 농사를 지어야만 되는 계절이 바로 여름입니다. 한 여름 우리가 우란분재를 정성껏 봉행한다면 가을 수확의 계절에는 틀림없이 기쁨을 누릴 일이 찾아들 것입니다.



너무나도 분명한 영가들의 영향력


<법화경>에는 마음을 갈고 닦는 사람들이 느끼는 파장의 세계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당에 살면서도 저 하늘나라 천인들의 생활과 그들 세계의 꽃향기가지 모두 감지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 아무런 신체적인 이상이 없는데도 고통스러운 사람, 신경성이라는 진단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가만히 살펴보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장애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 영혼이 붙어 시작된 경우는 기도를 하거나 천도재를 지내거나 하면 영혼이 제 갈 길을 가게 되어 쾌차하게 되지만, 시간이 오래되면 세포에 까지 병변이 생겨 불치의 병이 한다는 것입니다. 영가의 영향력은 우리의 삶에 폭 넓고 깊게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TV광고가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슈퍼마켓에 가면 곡 광고에서 본 그것의 이름을 대고 그것을 찾게 됩니다. 보고 듣는 것이 바로 나의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영가의 천도는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매일 밤마다 영혼들과 만납니다. 꿈속에서 TV를 보는 것입니다. 꿈속에서 만난 각양각색의 존재들을 꿈을 깨면 새까맣게 잊어버리지만 결코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나의 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으면서 그들이 끼치는 영향력이 나의 행동을 좌지우지하기에 기도와 정진을 강조하고 영가천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최근의 예를 보면 임신중절로 인한 죽은 태아령들의 집요한 원한을 참으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평상시 우리가 좋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생전 원한을 맺은 영혼들의 산자들에 대한 저주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 영가들이 인간과 꼭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영혼이 이 몸에서 빠져 나갈 때) 그를 돕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이를 저승사자라고 하는데, 저승사자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살아생전부터 그를 지켜보고 그를 옹호했던 저승의 존재들이 그를 죽음 저 너머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끼리끼리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살아생전 그의 영혼과 같은 동급의 영혼들이 서로 상응(相應)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와 정진을 하면서 청정하게 사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기에 흡사 왕과도 같은 옹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왕은 만조백관들의 옹호를 받습니다. 그 힘이 강성해 나라를 다스립니다. 기도와 정진을 하면서 천정하게 사는 사람, 바르게 사는 사람들은 허공계의 무한한 신령들과 불보살들의 가호를 힘입기에 무슨 일이던 거침없이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함부로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은 흡사 범죄자와 같아 그 누구의 옹호도 받지 못하고 곤란을 당하게 됩니다. 범죄자를 동와 주려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범죄자의 주변에는 선신(善神)들이 모두 떠나고 악령들이 들끓게 되는 것이라 필경에는 파멸의 구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정진을 통해 자신을 진보시켜 나간다면 그에 따라 그를 수호하는 영적 존재들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기에 죽은 자의 천도가 참으로 중요한 것이고, 그러므로 그들을 위해 제 갈 길을 열어주는 것이 산자의 삶에 크나큰 공덕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란분재(백중천도)는 진정 그들을 위한 부처님의 정성스런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 마음 가운데 갖가지 악업(惡業)을 함께 녹이도록 기도드리는 영원의 향연입니다. 영가 천도를 통해 우리들은 스스로는 물론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갖가지 악업을 녹여 내리며 함께 마음의 평화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와 정진으로 정성스런 영가천도를 통하여 억겁을 두고 쌓아온 갖가지 원결과 악업을 녹여 내린다면 그 공덕은 무량할 것입니다. 앞길이 막히면 흐르거나 나아가지 못하고 썩거나 망하게 됩니다. 스스로 기도 정진하는 사람은 물론 영가들이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면 우리는 물론 그들의 앞길도 올바르게 열릴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과 삼세제불보살님 전에 기도 올리는 것은 결국 우리의 앞길을 여는 것입니다.


천도란 산 자, 죽은 자 모두 크나큰 공덕을 지을 수 있는 중요한 의식입니다. 그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앞길을 열어주는 공덕은 크고도 큰 것입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여러분들을 향해 원한과 저주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영혼들이 여러분들의 앞길을 방해하고 여러분들의 몸에 질병을 야기하는 등, 두려운 실체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기도와 정진으로 보이지 않는 영가들이 악업을 극복하도록 유도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무량 공덕의 길을 열어 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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