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권인 우리는 사성제와 팔정도를 그리 자세하게 배우게

되는 계기가 흔치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초기경전(팔리어경전: 한역으로는 아함경)

들을 보면 사성제와 팔정도는 부처님 가르침의 거의 전부를 차지할 정도로 정말 많이 강조하

시고 말씀하셨답니다.(다 알고 계셨죠? -_-;;) 단순히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정진 등등

으로만 알고 있는 것보다 경전에 의

거해서 아주 자세히 설명이 되어있는 자료를 올립니다.특히 바른 기억으로만 알려진 정념은

사념처 수행(소위 위빠싸나)에 관심있는 분은 부처님께서 주시(Sati)와 알아차림, 분명한 앎

에 대해서 아주 많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부처님의 반열반 전에 마지막으로 말

씀하신 'khayadhamma sankhara appamadena sampadetha : 조건지어진 모든 것은 무상하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도 또한 더 정확한 의미는 appamada가 잊지 않음, 자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깨어있지 않아 욕망에 빠져 들어 방일하지 않고 항상 깨어있음의 의미를 가지
고 있습니다. 즉 항상 잊지 않고 마음챙김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고 방일하지 말라는

말씀이죠. 또한 법구경 제21구의 원어를 보면

Appamado amatapadam
pamado maccuno padam
appamatta na miyanti
ye pamatta yatha mata.
입니다. 이의 영역은

Verse 21: Mindfulness is the way to the Deathless (Nibbana); unmindfulness is the way to Death. Those who are mindful do not die; those who are not mindful are as if already dead. 즉 깨어있음(mindfulness)는 열반으로 가는 길이요, 잊음,깨어있지 않음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가 정확한 번역이 됩니다.

또한 appamada의 정확한 의미를 위해 다음을 참조하십시오.

1. appamada: According to the Commentary, it embraces all the meanings of the words of the Buddha in the Tipitaka, and therefore appamada is to be interpreted as being ever mindful in doing meritorious deeds; to be in line with the Buddha's Teaching in Mahasatipatthana Sutta, "appamado amatapadam", in particular, is to be interpreted as "Cultivation of Insight Development Practice is the way to Nibbana."

출처 :
http://www.tipitaka.net/pali/dhp/verseload.php?verse=021



또한 자등명 법등명이라고 많이 알려진 어구는 사실 팔리어에서는 등불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고

섬(바다 한 가운데서의 안전한 장소로서의 섬 즉, 의지처)라는 단어로 나오고 있습니다. 자

신을 의지처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으라는 것이죠.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친절하시게도 어

떻게 자신과 법을 의지처로 삼는지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념처 수행을 하

라는 것이고 잊지말고 마음챙김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법구경에서도 불방일품이 있는데 그

것의 원어가 appamada vagga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불방일로 해석해 놓으면 원어의 뜻이 잘

전달되지 않죠. 깨어있음의 장이라는 번역이 더 나을 듯 싶습니다.



다음 글은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 박사가 번역한 월뽈라 라훌라의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입니다.그 중에 팔정도에 관한 부분이고요. 원제는 what the buddha taught(붓다가

가르친 것)입니다. 경서원에서 이승훈 번역으로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라

는 책도 같은 원서를 번역한 것입니다. 전자는 팔정도 부분에서 전재성씨의 설명이 좀 첨가

되었고요, 후자책은 원서를 충실하게 번역했습니다. 더 정확한 서평은 알라딘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원서가 출간된지 꽤 오래됐고 외국에서는 이미 아주 많이 알려진 책입니다. 읽어

보시면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좀 더 바르게 이해하고 신적인 이미지가 아닌 좀 더 인간적인

부처님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감히 많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하고 싶어 이렇

게 올립니다. 항상 부처님의 지혜, 자비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






세가지 배움(계정혜)과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팔정도)
 
www.sunwoo.or.kr/윌폴라 라훌라 原著, 전재성 譯著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네번째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 길은 두가지 극단을 피하기 때문에 중도라고 알려져 있다. 하나의 극단은 쾌락주의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극단은 고행주의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붓다는 이와 같이 말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가지 극단을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무엇이 두 가지 인가? 하나는 감각적 쾌락에 관해 탐착하는 것을 일삼은 것이니 저열하고 비속하고 범부의 소행으로 성현의 법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괴롭힘을 일삼는 것이니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법이 아닌 것으로 무익한 것이다."

이러한 두 극단이 쓸데가 없다는 사실을 안 붓다는 이 두 극단적인 수행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발견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이 생기게 하고 지혜가 생기게 하며 고요함, 탁월한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이 중도는 여덟가지의 범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八聖道)이라고 불린다.

1. 올바른 견해 (正見,sammaditthi)
2. 올바른 사유 (正思惟,sammasankappo)
3. 올바른 언어 (正語,sammavaca)
4. 올바른 행위 (正行,sammakammanto)
5. 올바른 생활 (正命,sammaajivo)
6. 올바른 정진 (正精進,sammavayamo)
7. 올바른 새김 (正念,sammasati)
8. 올바른 집중 (正定,sammasamadhi)

실제로 붓다가 45년간 설한 모든 가르침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이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을 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붓다는 이해하고 따르는 능력과 수행의 정도에 따라 여러 사람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이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을 설했다. 따라서 불경에 흩어져 있는 수천이 넘는 법문은 모두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의 여덟가지 수행은 순서대로 하나를 수행하고 나서 다음 것을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붓다가 위와 같은 순서를 밝혀 경전의 어느 곳에서나 어김없이 설법을 했다. 물론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소간 동시적으로 수행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덟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각각의 수행은 다른 것의 수행을 돕는다.

이 여덟가지 수행은 불교에서 세가지 배움(三學)을 닦기 위한 것이다. 이 여덟가지의 각 요소들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의 순서적 다발로 구분된다.

1. 계행의 다발(戒蘊,silakkhandha) :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2. 집중의 다발(定蘊,samadhikkhandha) :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
3. 지혜의 다발(慧蘊,pannakkhandha)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그러나 이렇게 분류하면 계행 -> 집중 -> 지혜의 세가지 배움의 계기가 여덟가지 수행의 순서와 들어맞지 않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지혜는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의도를 수반하는 세가지 배움의 최종단계지만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의도는 예상 밖으로 경전상에 팔정도의 최초의 두 단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여덟가지 수행의 순서는 부주의한 실수의 결과가 아니라 중요한 논리적 숙고에 의한 배려였다. 붓다는 마지막 설법에서 반복해서 이러한 세가지 배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붓다] "손으로 손을, 발로 발을 씻는 것처럼 지혜는 계행을 통해 씻겨지고 계행을 지혜를 통해 씻겨진다. 계행이 있는 곳에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는 곳에 계행이 있다."

따라서 지혜를 구성하는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가 있는데 그것이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나 올바른 사유가 되면 여덟가지 수행의 출발점이 되고 출세간적인 것이 되면 궁극적인 지혜에 해당하게 된다. 올바른 견해는 출발이자 종착이므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은 직선의 길이라기보다는 수레바퀴와 같다.

윤리적인 규범인 계행은 불타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모든 생명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과 자비라는 위대한 개념위에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불타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은 올바른 견해에 해당하고 보편적인 사랑과 자비는 올바른 사유에 해당한다.

학자들이 불교에 관해 논의할 때에, 붓다의 가르침 가운데 이러한 위대한 이념을 잃어버리고,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메마른 측면으로 빠져버리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붓다는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세상사람들에 대한 자비로 가르침을 베풀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두가지 측면, 곧 한편으로는 자비와 또한 한편으로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여기서 자비는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사랑, 동정, 친절, 인내와 같은 거룩한 성품인데 지혜는 정신의 지적인 능력을 나타낸다. 사람이 지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정서적인 측면만 개발하면 그는 좋은 마음을 지닌 바보가 되어버린다. 반면에 정서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지적인 측면만 개발하면 그는 냉혹한 지성이 되어버린다.

인간이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지혜와 자비를 동시에 개발해야 한다. 그것이 불교적인 삶의 목표이다. 그 속에 지혜와 자비는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어 있다. 팔정도의 출발인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가 곧 지혜와 자비인데 이것은 모든 여덟가지 성스러운 수행에서 수반한다.




첫번째, 올바른 견해 (正見)



올바른 견해는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고 또한 아는 것에 기반을 둔 기초적인 연기법적인 진리에 대한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붓다] "사람이 만약 더러운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에 따른다. 바퀴가 소의 발을 따르듯이. 사람이 만약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떠나지 않듯이."

올바른 견해는 출발점에서 분명하게 깨달아지지 않고 단지 개념적으로 이해되어 수용되는 믿음의 과정이더라도 해탈 과정의 정신현상에 기여하게 된다. 이러한 올바른 견해에는 세속적인 것과 출세간적인 것의 두 가지가 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에는 번뇌를 수반하며 공덕을 갖추고 과보를 초래하는 것(有漏)이 있으며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에는 성스럽고 번뇌 없이 세상을 뛰어넘는 길의 요소에 속한 것(無漏)이 있다."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는 행위의 법칙, 즉 도덕적인 행동의 영향에 대한 올바른 파악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행위의 주체를 자신으로 하는 올바른 견해(業自性正見: 업을 자기라고 아는 올바른 견해)' 이다.

[붓다] "무지한 자에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생겨난다면, 그가 만든 그러한 업은 크거나 작거나 무릇 자신이 받아야 하며 남이 받을 수 없다."

업과 과보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윤회의 한계 안에서 선한 행위를 추구하고 보다 높은 존재 상태를 얻는데 합리성을 제공하지만 그 자체로서 해탈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는 궁극적인 해탈과 관계된다. 윤회의 전과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해탈은 모든 형태의 윤회를 구성하는 존재의 특성에 관한 깊은 통찰에 의존한다.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는 이러한 해탈로 이끄는 것인데,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한 통찰에 바탕을 둔 세계관을 의미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발생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을 통찰하는 것,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라고 부른다."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은 인식의 주체를 인정하는 우리의 사유에 의해 파악되는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한 개념적 이해로부터 비롯된다. 그러한 과정의 절정에 이르러서는 동일한 진리에 대한 지혜에 의한 직관적인 통찰이 성취된다. 그래서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한 올바른 견해는 괴로움의 소멸, 즉 열반에 이르는 길의 시작이자 길의 종극인 것이다.

이때 길의 시작으로서의 올바른 견해를 '진리에 따르는 올바른 견해(saccanulomika-)' 라고 부르기도 하며 길의 종극으로서의 올바른 견해를 '진리를 꿰뚫는 올바른 견해(saccapativedha-)' 라고 한다. 이러한 진리에 꿰뚫는 올바른 견해는 깊은 집중의 삼매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두번째, 올바른 사유 (正思惟)
 
올바른 사유는 모든 존재로 확산되어 갈 수 있는 무아적인 이욕 또는 사랑과 비폭력의 생각을 뜻한다.
그런데 올바른 사유는 지혜에 속하므로 무아적인 이욕(離欲), 사랑, 비폭력에 대한 생각이 지혜의 측면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사실이다.

이러한 올바른 사유는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인 어떤 영역에서든 진정한 지혜는 이러한 고귀한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기적인 탐욕, 악의, 증오, 폭력의 모든 생각은 지혜가 부족한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붓다는 [맛지마 니까야]에서 올바른 사유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1. 욕망을 여읜 사유 (出離思惟, nekkhanmma sankappa)
2. 성냄을 여읜 사유 (無애思惟, avyapada sankappa)
3. 폭력을 여읜 사유 (無害思惟, avihimsa sankappa)

이러한 올바른 사유에 비해 그릇된 사유는 각각 욕망의 사유, 성냄의 사유, 폭력의 사유에 해당한다.

붓다는 선정에 들기 이전에 숲 속에서 사유하면서 그의 사유가 위와 같은 두 가지 방향으로 갈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올바른 사유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고 그 양자를 해치지 않는다. 지혜를 증진시키고 고뇌를 수반하지 않으며 열반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으며 그릇된 사유가 일어날 때마다 그 반대로 생각했다.

올바른 사유는 올바른 견해 또는 세계관을 조건으로 수습되는 결과로서 세계 속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행위하는 도덕적 실천의 원인을 제공한다. 이때에 도덕적 행위는 도덕적인 사유를 항상 수반하게 된다. 불교의 윤리는 여타의 다른 종교처럼 보상에 대한 기대나 처벌에 대한 공포에서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올바른 사유에서 오는 것이다.

[붓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고통을 싫어한다. 그들에게도 삶은 사랑스러우므로 그들의 존재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여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아라."

1. 욕망을 여읜 사유는 감각적인 쾌락인 오욕락(五欲樂), 즉 눈에 의해 인식되는 색, 귀에 의해 인식되는 소리, 코에 의해 인식되는 냄새, 혀에 의해 인식되는 맛, 몸에 의해 인식되는 촉감의 유혹과 위험을 알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2. 성냄을 여읜 사유는 진애를 소멸시키고 치유하기 위해서 붓다는 자애(慈,metta)를 강조했다. 자애의 어원은 '우정' 을 의미하지만 그보다 깊은 의미를 지니므로 보통 자비로 번역한다. 자애는 감각적인 사랑이나 애정 또는 순간적인 동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애정이나 사랑으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뛰어넘는 데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자애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 무아적 사랑을 의미한다. 자비의 요체는 자신이 스스로 행복해지길 바라듯이 '모든 중생이 행복할 지어다' 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3. 폭력을 여읜 사유는 그것은 잔혹하고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사유를 없애는 연민(悲,karuna)의 마음으로 사랑의 보충적인 개념이다. 자애가 모든 존재의 행복과 안녕을 바라는 특징을 지녔다면 연민은 비폭력의 사유로서 모든 존재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라는 특징을 지녔다. 이러한 연민은 자애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같은 모든 존재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노병사의 고통 속에 속박되어 있다는 깊은 자각에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폭력을 여읜 사유는 성냄을 여읜 사유에 따르는 사유로 자애와 연민이 합쳐진 자비의 실천으로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세번째, 올바른 언어 (正語)
 
올바른 언어는 표현 방법으로 언어를 사용하여 일어날 수 있는 비윤리적인 것을 경계한 것이다. 올바른 언어는 거짓말을 하거나, 사람들 사이에 증오, 적대감, 불일치, 부조화를 불러오는 험담, 모함을 하거나 또는 시기를 하거나 거칠고, 조야하고, 무례하고, 악의에 차있고, 모욕적인 말을 하거나 게으르고, 어리석고, 쓸데없는 수다 또는 농담을 지껄이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1. 거짓말을 하지 말 것(不妄語)이라는 이 윤리적 덕목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계율의 덕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거짓말을 하지 말되 진실을 말하라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붓다] "여기 쭌다여,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끊고 거짓말을 삼간다. 그는 집회에, 또는 대중 사이에, 또는 친족 가운데, 또는 단체 속에, 또는 왕족들 사이에 끌려와서 증인으로 '이놈아, 와서 네가 아는 것을 말해라' 라고 심문을 받아 그가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 고 말하며, 안다면 '안다'고 말하며, 보지 못했으면 '보지 못했다' 고 말하며, 보았으면 '보았다' 고 말한다. 이와 같이 그는 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사소한 이익을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올바른 언어는 거짓말을 폐기하고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인 줄 알고 거짓말을 했다면 속일 의도가 없으므로 계율을 범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거짓말의 의도에는 탐욕, 진애, 우치의 동기가 놓여 있다. 탐욕에서 비롯된 거짓말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물질적 부, 지위, 존경, 찬양의 사적 이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진애를 동기로 하는 거짓말은 다른 사람을 해치고 파괴할 의도를 수반한다. 그리고 우치를 동기로 하는 거짓말은 탐욕과 진애를 수반하는 거짓말보다는 덜 악하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비합리적인 강박관념에서 나온 거짓말이나 침소봉대(針小棒大)의 과장법, 웃기기 위한 거짓말 등이다.

2. 중상하는 말을 하지 말 것(不兩口)이라는 이 윤리적 덕목도 '하지 말라' 는 단순한 부정적 계율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화합을 도모하라는 긍정적 측면을 갖고 있다.

[붓다] "중상하는 말을 버리고 중상하는 말을 삼가한다. 여기서 듣고 저기에서 그들 사이에 이간되도록 말하지 않는다. 혹은 저기에서 듣고 여기에서 그들 사이에 이간이 되도록 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이간된 사람들을 화합하고 화합된 사람들을 격려하고 조화에 즐거워하고 조화에 기뻐하고 조화에 환희하며 조화를 만들어내는 말을 한다."

이와 같이 중상하는 말은 한 사람을 다른 모임이나 사람으로부터 이간시킨다. 이러한 중상의 배후에는 경쟁자의 성공이나 덕망에 대한 질투나 증오가 놓여 있다. 그밖에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자 하는 잔인한 의도, 자신에게 호의를 끌고자 하는 악한 욕망, 불화를 보고 느끼는 전도된 기쁨 등이 있다. 중상하는 말은 도덕적으로 아주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 그 배후에 있는 질투나 증오는 불선업을 만들기에 충분하지만 행위에 의해 수반될 때 비로소 그 결과를 나타낸다. 중상하는 말이 거짓말일 때에는 더욱 강력한 악하고 불건전한 업을 유발하게 된다.

위에서 붓다는 중상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 대신에 우정과 조화를 증진시키는 화합의 말을 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그러한 말은 사랑과 동정의 자비를 실어 나른다. 이러한 말은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키고 상호신뢰의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시킨다.

3. 추악한 말을 하지 말 것(不惡語)이라는 윤리적 덕목은 추악한 말은 거칠고 상스러운 말로 듣는 자에게 불쾌감을 주는 말인데, 이러한 말을 하지 않는 대신에 붓다는 적극적으로 상냥한 말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붓다] "추악한 말을 버리고 추악한 말을 삼간다. 부드럽고, 귀에 듣기 좋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와 닿고, 점잖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많은 사람에게 유쾌한,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러한 말을 한다."

추악한 말은 성내고 화를 내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악한 말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욕지거리를 들 수 있다. 둘째는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셋째는 비꼬아 하는 말이다. 추악한 말은 진애를 수반하고 있다. 이 추악한 말은 의도적이 아니다. 충동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거짓말이나 이간질보다는 심각한 악업을 초래하지 않는다.

붓다는 이러한 거칠고 추악한 말을 삼가는 대신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심지어 강도나 살인자를 만났을 때도 화를 내어 악한 말을 해서는 안되며 사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양쪽에 자루가 달린 톱으로 강도들이나 살인자들이 사지를 하나씩 자른다고 하더라도 그때 마음을 더럽히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러한 때에도 역시 다음과 같이 배워야 한다. '우리들의 마음은 바뀌지 않으리라. 우리들은 악한 말을 하지 않으리라. 우리들은 측은한 마음으로 자비스런 마음을 내며 화내는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을 자비스런 마음으로 채워주십시오. 그를 비롯한 모든 세상은 크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해가 없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채워주십시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배워야 한다."

4. 쓸데 없는 말을 하지 말 것(不綺語)이라는 윤리적 덕목은 촛점이 없으며 의미 없는 횡설수설에 가까운 농담이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는 의미있고 조리있는 말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붓다] "쓸데없는 말을 버리고 쓸데없는 말을 삼간다. 올바른 때에 말하며 사실에 맞는 말을 하며 유용한 말을 하며 가르침에 합당한 말을 하며 계율에 맞는 말을 하되 가치있는 말을 적당한 때에 합리적으로 신중하게 의미있도록 행한다."

쓸데 없는 말은 가치있고 의미있는 말을 교환하지 못하며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오염시킨다. 붓다는 이 쓸데없는 말을 삼가야 하며 사실에 부합되는 말을 그것도 올바른 때에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또한 궁극적으로 가르침과 계율에 합당한 가치있는 말을 행하라고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쓸데없는 말이란 법과 율에 합당하지 않은 의미없는 말로 넓게는 희론(戱論,papanca)을 말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희론 대신에 연기법적 진리를 설하는 것이 쓸데없는 말을 삼가는 자유가 될 수 있다. 많은 사회적 분쟁이 희론적인 언어의 사용에서 온다. 조야한 이론과 거친 언어의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붓다를 비롯한 모든 성인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나쁘고 해로운 말을 삼갈 때에, 저절로 옳은 말을 하게 되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부드럽고 의미있고 유용한 말을 사용하게 된다. 부주의하게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말은 올바른 때에 올바른 장소에서 행해져야 한다. 무엇인가 유용한 말을 하지 못할 경우엔 고귀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네번째, 올바른 행위 (正業)
 
올바른 행위는 표현의 방법으로 육체를 사용하여 일어날 수 있는 불선업을 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행위는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올바른 사유나 올바른 언어에 기초하지 않는 이기주의적 행동은 불교의 가장 중요한 죄악이다.

이타적 행위는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준다. 그러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단순히 주관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강요적인 모든 내적 외적 환경과 연관되어 있다. 현대 학문도 인간의 행위는 유전적인 환경뿐 아니라 물질적 생리적 심리적 사회적 환경구조와 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올바른 행위에도 이러한 모든 제반조건을 고려하는 지혜를 필요로 한다.

올바른 행위는 도덕적으로 명예롭고 평화로운 행위를 조장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붓다는 세가지의 올바른 행위에 관해 언급했다.

1. 생명을 죽이지 말 것 2.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말 것 3.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지 말 것이다. 이들 사이에서도 생명을 죽이지 않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토대로 주어지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계기가 성립한다.

1. 생명을 살해하지 않는다는 것(不殺生)은 인간 자신의 존엄성을 모든 중생(衆生)에게까지 확대 적용한 결과로 나타나는 윤리적인 덕목이다. 생명에는 실제로 인간, 동물, 곤충을 망라한 식물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나 식물은 제 몫을 다할 수 있는 의식의 결여로 제외될 수 있다. 불살생의 덕목에서 중요한 것은 살생하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 적극적으로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다.

[붓다] "생명을 살해하는 것을 피하고 생명을 살해하는 것을 삼간다. 몽둥이를 내려놓고 칼을 버리고 부끄러워하며 동정하며 모든 생명의 이익을 도모한다."

행위에는 의도가 수반된다. 중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의도적인 살해를 피하는 것이다. 살생에 수반되는 의도에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있을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탐욕과 성냄이 수반되는 것이 더욱 심각하며 성냄이 수반되는 살생은 아주 잔인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어리석음이 수반되는 살생은 의도적인 것이 약하므로 보다 덜하다.

생명을 살해하는 범주 가운데 자살은 살해의 의도가 없으므로 실제적인 살생은 아니지만 살생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경전에서는 탐욕을 여의고, 성냄을 여읜 깨달은 자의 자살만을 허용했다. 그리고 살생의 질적 차이가 있는데 동물을 살해하는 것보다 인간을 살해한다든가 범부를 살해하는 것보다 아라한을 살해한다든가 부모를 살해하는 것이 죄가 더욱 무겁다. 이것은 생명의 정신적인 깊이와 자비심의 심도에 따라 도덕적 무게를 부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不偸盜)이라는 윤리적 덕목에서 주어지지 않은 것이란 남이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말하며 빼앗지 말라는 것은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붓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훔치는 것을 버리고 주어지지 않은 것을 훔치는 것을 삼간다. 마을이나 숲 속에서의 다른 사람의 부동산이나 동산이라면 무엇이든지 그 주어지지 않은 것을 도둑의 심보로 취해서는 안된다."

주석서들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는 이 '주어지지 않은 것을 훔치는 것' 으로 첫째는 도둑질로 남의 물건을 몰래 훔치는 것이며, 둘째 강도질로 위협이나 폭력으로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의 소유를 빼앗는 것, 셋째 소매치기로 갑자기 다른 사람의 물건을 저항하기 전에 탈취하는 것, 넷째 사기행위로 남의 소유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여 탈취하는 것, 다섯째 속임수를 쓰는 것으로 잘못된 저울이나 계량기를 써서 고객을 속여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 은 모두 탐욕이나 진애에 의해 수반되는 것이다. 대부분 탐욕이 우선적인 조건이 되지만 증오가 거기에 수반되기도 한다. 이럴 때는 그 업(業)의 결과가 더욱 무거워진다.

이렇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훔치는 것' 을 삼간다는 것의 적극적인 의미는 타인의 재산을 존중하고 그들이 사용할 권리를 인정하는 정직성이나 자신의 분수에 만족하는 만족감이며 보다 적극적으로는 자신의 부와 재산을 남을 위해 베푸는 보시의 정신을 키우는 것이다.

3. 사랑을 나눔에 관해 잘못을 범하지 않는 것(不邪淫)은 윤리적으로 재가의 신도들에게는 부부관계의 균열을 막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수행자들에게는 성적 욕망을 억제하는 청정행의 독신생활을 유지하도록 하는 도덕적인 금계에 해당한다.

[붓다] "사랑을 나눔에 관해 잘못을 범하는 것을 버리고 애욕에 관해 잘못된 행위를 삼간다. 어머니의 보호를 받고 있고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있고 형제의 보호를 받고 있고 자매의 보호를 받고 있고 친척의 보호를 받고 있거나 법의 보호를 받고 있거나 유부녀이거나 유죄를 선고받은 여자나 마지막으로 이미 약혼한 여자이거나, 이와 같은 사람과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재가자가 불법적인 성적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조목조목 명시하고 있다. 남자의 경우를 위주로 하고 있으나 남성이건 여성이건 모두에 해당한다. 아버지, 어머니, 친척, 형제, 자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여자는 그 후견인들의 동의 없이 결혼해서는 안된다. 그밖에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는, 예를 들어 나이 어린 여자나 친척 관계의 여자나 수녀나 비구니 등 독신생활을 맹세한 사람과의 성적 관계를 해서도 안 된다.

한편 사음은 본질적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며 탐욕을 수반하고 있다. 그러나 변태성욕일 경우에는 증오나 어리석음도 동시에 수반한다. 따라서 불사음도 궁극적으로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소멸과 관계된다. 불사음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측면은 청정한 생활(梵行)을 실천하는 것이다.





다섯번째, 올바른 생활 (正命)
 
올바른 생활은 '잘못된 생계를 버리고 올바른 생계를 도모하는 것' 이다. 올바른 생활은 사회적인 것이다. 붓다는 이와 같이 말했다.

[붓다] "부끄러움이 없이 철면피하고 무례하고 대담하고 죄악에 오염된 사람의 생활은 쉽다. 부끄러움이 있고 항상 청정을 구하고 집착 없이 겸손하여 청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식견 있는 사람의 생활은 어렵다."

올바른 생활의 개념은 속물적인 행동을 배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무역, 독과점, 돈의 자본적 사용 등을 비난했다. 그는 그들을 자연스럽지 못한 도덕적 생활을 증진시키는 자연적 재정과는 다른 이재학(理財學)적 행위라고 비난했다. 불교도 이러한 이재적인 경제적 조작을 비난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이윤동기는 이타적인 서비스 정신에 의한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불교의 자본윤리는 경제적 행위의 도덕적 표준인 이타주의에 의한 것이다. 더구나 불교에서의 생활은 궁극적으로 올바른 삼매에 들기 위한 준비단계에 불과하다. 경전은 생계를 도모하는 방법으로 여법(如法)하게 재산을 모을 것을 말하고 있다.

[붓다] "장자여, 세상에서 선남자는 근면한 노력으로 얻고 완력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들인 여법한 법으로 얻어진 재산을 지닌다."

붓다는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미치므로 피해야 할 다섯 가지의 여법하지 않은 직업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재가신도는 이들 다섯 가지의 판매에 종사해서는 안된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무기의 판매, 생명의 판매, 고기의 판매, 술의 판매, 독극물의 판매이다."

여기서 생명의 판매에는 인신매매나 매춘을 위시한 인간에 해당되는 것이나 가축 등 동물의 판매를 뜻할 것이다. 그밖에 피해야 할 잘못된 생활로 경전에서 들고 있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기만, 요설, 점술, 고리대부, 이것이 수행승들이여, 잘못된 생활이다."

올바른 언어나 올바른 행위를 수반하는 것이 올바른 생활이므로 당연히 올바르지 않는 삿된 생활은 기만, 요설 등의 잘못된 언어를 수반하며 무기판매, 인신매매 등의 잘못된 행위를 수반한다. 올바른 생활은 따라서 올바른 언어와 올바른 행위에 기반을 둔 직업적인 일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특히 올바른 직업에 종사할 경우에 사용자는 피고용인에게 능력과 재능에 따라 일을 하게 하고 능력에 맞는 임금을 지불하고 몸에 병이 났을 때 치료해 주고 이따금 기부금이나 상여금을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피고용인은 부지런해서 게으름을 피우지 말아야 하며 사용자의 말을 잘 듣고 사용자를 속이지 말며 열성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경제적 행위는 수단적인 실제에 불과하다. 일반적인 신도의 올바른 생활은 다음과 같다.

[붓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 일을 함에 혼란스럽지 않은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행복이다. 나누어주고 정의롭고 친지를 보호하고 비난받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행복이다."





여섯번째, 올바른 정진 (正精進)

올바른 정진은 건전하고 선한 힘은 물론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를 수반하는 도덕적 요인으로부터 나온다. 일반적인 선한 상태의 힘의 경우에는 그것이 생사윤회의 범주 안에서의 공덕을 쌓는 데 국한된다. 그러나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의 계열 속에서의 선행적인 것을 수반으로 하는 정진의 힘은 오염된 마음을 해탈된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러한 올바른 정진에는 네 가지의 노력(四精勤)이 있다. 여기서 불건전한 상태(不善法)는 지양되고 건전한 상태(善法)을 실현시키는 것을 말한다. 불건전한 상태란 행위를 유발하건 유발하지 않건 간에 오염된 사유, 감정, 의도 등의 마음의 상태를 말하며, 건전한 상태는 해탈로 이끄는 오염되지 않은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궁극적으로 불건전한 것은 해탈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방치되고 버려져야 하는 속박의 연기에 소속되며 건전한 것은 해탈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지속시키고 계발하여야 하는 자유의 연기에 소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건전한 상태가 정신의 집중과 있는 그대로의 깨달음을 방해하는 만큼 장애라고 불리우며 거기에는 다섯가지 장애(五障)가 있다.

1. 감각적 쾌락의 욕망 (愛貪, kamacchanda)
2. 분노 (惡意, byapada)
3. 해태와 혼침 (昏寢睡眠, thinamiddha)
4. 흥분과 회한 (悼擧惡作, uddhaccakukkucca)
5. 매사의 의심 (疑, vicikiccha)

앞의 두 가지 장애,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악의는 가장 강력한 것으로 선정이나 삼매의 수행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인데, 그것들은 탐욕과 성냄을 수반하고 있다. 다른 세 가지 장애는 비교적 덜하지만 장애적인 요소가 강한 것으로 어리석음을 수반하고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일반적으로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의 다섯 가지 감각의 장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쾌락(五欲樂)을 말하지만 때로는 넓은 의미로 감각적인 쾌락뿐 아니라 부, 권력, 지위, 명예 등에서 발생하는 욕망도 의미한다.

두번째의 장애인 분노는 첫번째 장애와 다른 극단적 형태의 성냄을 수반하는 것으로 자타에 대한 증오, 화냄, 원한, 혐오 등을 속성으로 한다.

세번째 장애는 해태와 혼침이다. 해태는 정신적으로 아둔한 것을 의미하고 혼침은 마음이 무겁고 가라앉아 졸리는 것을 뜻한다.

네번째의 장애는 흥분과 회한인데 흥분은 마음의 흥분, 불안정을 의미하고 회한은 걱정으로 과거에 대한 후회와 원하지 않았던 결과에 대한 근심을 뜻한다. 이것은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섯번째 장애는 의심이다. 의심은 어리석음에 수반하는 상습적인 미결정과 미해결, 신뢰의 결여 등을 뜻한다.

경전에는 이들 다섯 가지 장애에 관해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다섯 가지 색깔로 물든 물에 비유되고, 분노는 부글부글 끓는 물에 비유되며, 해태와 혼침은 이끼가 낀 물, 흥분과 회한은 바람이 불어 파도치는 물, 매사의 의심은 흐린 흙탕물에 비유된다. 이러한 장애의 물을 버리고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의 상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1. 제어에 의한 노력(律儀勤,samvarappadhana)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상태의 발생을 방지하는 것을 말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수행승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악한 상태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생겨나게 하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정진한다."

마음의 장애는 정신적인 흐름 속에 지속되지만 감각적 체험의 유입을 통해서 활성화된다. 감각적인 체험은 감각자료, 즉 시각자료(色), 청각자료(聲), 후각자료(香), 미각자료(味), 접촉자료(觸)로 구성된다. 이러한 감각자료들은 의식에 의존하는 감각과 만나게 된다.

이때 의식이 함께 수반하면서 감각자료는 지속되고 평가되고 적절한 반응을 일으킨다. 의식이 그러한 자료적인 인상을 주의 깊고 현명하게 숙고(如理作意)하지 않으면 감각자료는 불건전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 오염되어 진행된다. 이러한 오염의 경향성은 감각대상에 따라서 규정된다. 매력적인 대상은 탐욕, 혐오적인 대상은 성냄, 중성적인 대상은 어리석음을 수반하는 오염을 일으킨다. 그래서 붓다는 이러한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 감관의 제어(根律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것이 감관의 제어인가? 이 세상에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들이 시각으로 형상을 보되 그 모습을 취하지 않고 그 특징을 취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시각의 기관을 제어하지 않으면 탐욕과 근심과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유입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수행하고 시각의 기관을 보호하고 시각의 기관을 제어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다른 모든 감각기관에 대해 동일한 설명이 반복된다. 그런데 여기서 '시각으로 형상을 보되 그 모습을 취하지 않고 그 특징을 취하지 않는다' 는 말은 감관의 제어가 무엇인지를 해결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모습이란 말은 대상의 겉모습이고 특징은 사소한 특징을 의미한다. 정형화된 연기에 의하면 의식은 항상 감각영역에 수반하므로 감관이 잘 제어되지 못하면 의식은 무모하게 흐르면서 사물의 겉모습에 끄달려 탐진치의 오염을 야기시키고 사소한 특징을 조작하여 희론에 의한 오염을 증폭시키며 불건전한 상태를 유발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감관의 제어는 필수적인 것이다.

2. 버림에 의한 노력(斷勤,pahanappadhana)은 이미 일어난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는 것을 말한다.

[붓다] "이미 생겨난 악한 불건전한 상태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진한다."

감관을 제어하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장애들을 극복하였더라도 과거의 업으로부터 유래된 불건전한 사유가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 바로 이 두번째의 정진이 필요한 것이다. 이 노력을 '버림에 의한 노력' 이라고 한다. 경전은 이것이 무엇인가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버림에 의한 노력인가? 여기에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사유들, 이미 생겨난 악의에 대한 사유들, 모든 이미 생겨난 폭력적 사유들의 불건전한 상태들을 수용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파괴하고 없애는 것이다."

모든 이미 생겨난 불건전한 상태에는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의 정신적인 장애가 포함된다. 경전에 의하면 이러한 장애에 대처하는 방법은 응병여약(應病與藥)처럼 각각의 경우에 맞게 주어진다. 다섯 가지 장애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그 조건을 소멸시킴으로써 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불건전한 오염된 사유는 그와 대치되는 건전한 사유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

[붓다] "그 '불건전한' 특징과는 다른 건전한 것을 수반하는 특징을 숙고하는 자에게는 탐욕을 갖추고 성냄을 갖추고 어리석음을 갖추는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은 버려지고 소실된다. 그것들이 끊어짐으로써 안으로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해지고 하나로 되고 집중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를 없애는 것은 선하고 건전한 것에 대한 숙고를 통해 없어지지만 궁극적으로는 선하고 건전한 것에 대한 사유마저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한 것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대치하는 것은 마치 능숙한 미장이나 그 도제가 '작은 쐐기로 큰 쐐기를 제거하는 것' 과 같다고 했다. 궁극적으로는 그 선한 것도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 생겨난 다섯 가지 장애의 극복을 위한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이 있다. 자비에 대한 명상을 통해 모든 탐욕과 성냄, 또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악의 등은 사라지며, 해태와 혼침의 제거를 위해서는 빛나는 광명체에 대한 시각화, 활발한 행선(行禪)의 수행, 죽음에 대한 명상, 또는 단지 정진을 지속할 확고한 결심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흥분과 회한은 마음을 전환해서 관심 있는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고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힘으로써 제거될 수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소멸될 수 있다. 의심에 대한 해결은 질문, 탐구, 학습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미 생겨난 불건전한 상태의 장애를 몰아내는 데는 위와 같은 일대일대응의 대치법(對治法)을 첫번째로 하는 이외에 두번째로 부끄러움(慙)과 창피함(愧)이란 도덕적인 양심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사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세번째 방법은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날 때 관심의 방향을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네번째 방법은 관심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면돌파해서 상태의 속성과 그 원인을 조사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마음의 상태는 소멸한다.

다섯번째 방법은 의지의 힘으로써 억제함으로써 불건전한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마음의 노예가 아니라 그 주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태는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의 상태를 소멸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유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무엇이든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불건전한 상태를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다.

3. 수행에 의한 노력(修勤,bhavanappadhana)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붓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진한다."

불건전한 상태의 제거를 통해서 올바른 정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의 계발을 수반한다. 이것을 수행에 의한 노력이라고 한다. 수행은 다양한 측면을 가지지만 경전에서 특히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七覺支,satta bojjhanga)를 들고 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수행에 의한 노력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수행승은 멀리 떠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보내버림으로 열반으로 회향하는 새김의 깨달음 고리, 탐구의 깨달음 고리, 정진의 깨달음 고리, 희열의 깨달음 고리, 안온의 깨달음 고리, 집중의 깨달음 고리, 평정의 깨달음 고리를 수행한다."

이 깨달음의 고리들은 깨달음의 조건이 되면서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그 속성이 되는 것들이다. 깨달음의 길은 새김의 깨달음 고리를 출발으로 해서 시작된다. 새김은 장애들이 제거되고 일체의 선입견이 소멸되어 현재의 시점에서의 사물에 대한 관찰을 의미하는 깨달음의 고리이다. 이 새김에 의한 사물에 대한 관찰은 기본적으로 수동적이며 탐구의 깨달음 고리는 능동적인 인식의 측면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올바른 길을 알게 되면 정진력을 얻게 되는 정진의 깨달음 고리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정진이 진행되면 기쁨이 등장하는데 이를 희열의 깨달음 고리라고 한다. 기쁨은 점차로 형성되어 정점에 달하면 지복의 파도가 몸과 마음을 감싸면서 안정되어 몸과 마음에 괴로움이 없고 평안한 안온의 깨달음 고리에 도달한다.

이러한 정신의 집중이 깊어지게 되면 결국 깨달음의 마지막 요소인 마음의 평정을 의미하는 평정의 깨달음 고리에 이른다. 이러한 깨달음에 수반되는 요소들이 곧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로서 수행되어야 할 것들이다.

4. 수호에 의한 노력(守護勤,anurakkhanappadhana)은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붓다]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성장하게 하며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진한다."

이 수호에 의한 정진은 정신의 집중을 통해 나타나는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상기시키는 지각의 특징(現相,nimitta)을 수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수호에 의한 정진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수행승은 이미 생겨난 건전한 삼매의 특징, 즉 해골과 뼈로 구성된 시체에 대한 지각, 벌레들이 모여 우글거리는 시체에 대한 지각, 푸르게 멍든 어혈을 지닌 시체에 대한 지각, 고름이 가득찬 시체에 대한 지각, 부패해서 갈라진 시체에 대한 지각, 부푼 시체에 대한 지각을 수호한다."

경전에서 이미 생겨난 깨달음의 요소를 수호하기 위한 정진으로 이러한 존재의 궁극적인 괴로움, 즉 죽음에 수반되는 현실의 처참함을 강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존재의 속박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에서 벗어나 해탈을 수호하는 데 있다.




일곱번째, 올바른 새김 (正念)

올바른 새김은 마음이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것이며 분별적인 사유나 숙고에 휩싸이지 않고 일어나는 사건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는 무조건적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정진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다. 또한 올바른 정진은 팔정도에서 다른 선행하는 도덕적 계기들이 어느 정도 충족될 때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올바른 새김의 과정은 올바른 도덕적 관계로 열려진 마음을 통해 고요하고 민첩하게 현존하는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그때 모든 판단적 사유나 해석적인 숙고는 인지되자마자 버려진다. 마음은 확고하게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생성과정에서의 의식은 현재의 주어진 지각현상과 더불어 인식과정이 시작되면서 단순히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숙고에 의해 개념적으로 확산되어간다. 원래의 대상은 개념적으로 확산된 희론적 지각현상에 의해 오염되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현존하는 대상은 희론의 구름 속에 비치는 희미한 달처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인식과정을 소멸시켜 청정하게 할 때 올바른 새김이 성립하며 그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개현시킨다.

따라서 새김을 실천하는 것은 마음이 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평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의도나 사유는 직접적인 체험을 방해하는 장애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것이 소멸됨으로써 새김 속에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개현된다. 그렇다고 해서 새김은 그냥 수동적인 관찰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김은 강력한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우리를 현실 속에 닻을 내리게 하며 사유작용과 더불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 방황하도록 하게 하지 않는다.

새김이 없는 마음은 호박에 비유되고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돌에 비유된다. 호박은 수면 위를 떠다니지만 돌은 물 밑바닥에 이를 때까지 가라앉는다. 이처럼 강한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대상의 겉모습 속에서 떠돌지 않고 대상에 머물러 대상의 속성 속으로 깊이 침투해서 그대로의 대상을 통찰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새김의 토대에 대한 대경(大念處經)]에서의 올바른 새김의 정의는 올바른 정진을 조건으로 하는 네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와 함께 주어져 있다.

[붓다] "무엇이 네가지 새김의 토대인가?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있어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신체에 관해 신체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감수에 관해 감수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마음에 관해 마음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사물에 관해 사물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네가지 새김의 토대는 올바른 정진을 수반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기는 것을 본질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열반을 깨닫는 길이다. 붓다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붓다] "새김의 토대는 곧 뭇삶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고 올바른 길에 들어서게 하고 열반을 깨닫게 하는 하나의 길이다."

이러한 새김의 네가지 가운데 첫번째는 육체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는 주로 정신과 관계되는 것이다. 육신에 대한 관찰은 수습적으로 다른 것에 우선하며 감수를 비롯한 마음의 관찰의 조건을 형성하고 끝으로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새김이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관찰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그리고 내외적으로, 즉 공간적으로 수행되며 생성적으로 소멸적으로 그리고 생멸적으로, 즉 시간적으로 수행된다.

1. 신체에 대한 관찰(身隨觀,kaya anupassana)을 행할 때 가장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호흡에 의한 몸의 움직임이다. 그래서 호흡새김(安槃念, anapanasati)이 신체에 대한 관찰의 기본적인 토대를 이룰 뿐만 아니라 명상의 근본적 토대(根本業處-호흡에 대한 새김이나 관찰은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불린다. 호흡새김은 단지 육체적인 훈련이 아니라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를 이끄는 기반이다.

[붓다] "호흡에 관한 새김을 닦고 익히면, 네가지 마음새김의 바탕일 닦고 익히면,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원만히 하며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닦고 익히면 명지(明智)에 의한 해탈을 원만하게 한다."

호흡에 관한 관찰 내지 새김을 실천하려면 우선 숲 속의 나무 밑이나 한적한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게 세우고 새김을 현전하도록 해야 한다. [맛지마니까야]의 '호흡새김의 경(安槃念經)' 에 의하면 호흡에 대한 새김은 네가지의 기본적인 단계를 갖고 있다.

(1) 처음 두가지는 긴 들숨과 날숨을 일어나는 대로 관찰하는 것과 짧은 들숨과 날숨을 일어나는 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단지 숨이 들고나는 것을 그 길고 짧음을 알아채면서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2) 마음에 새김이 점점 깊어지면 들숨과 날숨의 시작에서 경과와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3) 전신을 분명히 지각하면서 호흡하게 되며, (4) 육체적인 기능이 고요해지면서 호흡이 극도로 미세하고 청정하게 된다.

경전은 그밖에 정신적인 상태와 관련된 호흡새김의 수행에 관하여도 언급하고 있다. 호흡의 관찰은 육체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새김의 토대나 깨달음의 고리 등의 정신적인 것에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몸에 관한 관찰로서 잘 알려진 것은 몸의 정태적, 동태적 활동에 관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1) 걷거나, (2) 서 있거나, (3) 앉거나, (4) 자거나, (5) 깨어 있거나, (6) 말하거나, (7) 침묵할 때나 어떠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주의 깊게 세밀히 관찰하는 것이다.

걸을 때는 걷는다고 알고 서 있을 때는 서 있다고 알며 자세를 바꿀때는 바꾼다고 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몸은 자아나 자아의 소유가 아니며 단지 의도라는 조건에 따라 작용하는 존재인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가거나 오거나 앞을 보거나 옆을 보거나 굽히거나 펴거나 옷을 입거나 먹고 마시거나 대소변을 보거나 잠들거나 깨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그러한 과정에 대한 충분한 이해(正知所作)를 통해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또한 몸에 대한 관찰로 중요한 것은 몸의 실재적인 모습을 분석적으로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그 가운데는 피부로 덮인 여러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신체의 각 부분이나 장기에 대한 관찰, 땅, 물, 불, 바람으로 구성된 신체에 대한 관찰 및 무덤에 버려진 사체에 대한 관찰이 있다.

이러한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신체에 대한 관찰은 갈애에 수반되는 육체적 쾌락이나 성적 충동을 제어하고 소멸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부정관(不淨觀)은 몸을 감각적으로 매력적인 것이라 인식하는 지각의 토대를 무너뜨림으로써 육체적인 쾌락의 욕구를 소멸시킬 수 있다.

감각적 욕구는 지각을 조건으로 한다. 육체적인 매력은 피상적인 관점에서 유래하며 부정관은 사실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한다. 경전은 마치 두개의 구멍을 가진 푸대자루에 여러 가지 곡물이 들어 있듯이 이 신체를 32가지 부정물 - 머리카락, 몸털, 손톱, 이빨, 피부, 고기, 근육, 뼈, 골수, 신장, 심장, 간장, 늑막, 비장, 폐, 창자, 장간막, 위장, 배설물, 뇌수,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임파액, 침, 정액, 관절액, 오줌 - 로 가득 차 있는 푸대자루처럼 하나 하나씩 그 내용물을 열거하면서 분석적으로 그 더러움을 관찰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러한 수행의 과정은 혐오감을 함축하는 성냄을 생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쾌락으로부터 싫어하여 떠나 그 조건을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다.

또 다른 신체에 대한 관찰방법으로는 네 가지의 비인격적인 요소인 땅, 물, 불, 바람의 사대로써 분석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경전은 숙련된 도살자가 소를 도살해서 네 거리에 부분 부분을 나누어 놓는 것같이 신체의 부분을 지수화풍의 네 가지 요소로 분류해서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맛지마니까야]의 '상적유대경(象跡喩大經)' 에서는 우리의 신체는 내부적인 지수화풍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반적인 지수화풍은 외부적인 것으로 나눔으로써 순환적인 생태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붓다] "(1) 내부에 각각 거칠고 견고한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예를 들어 머리카락, 털, 손톱, 등과 기타의 개체적이고 거칠고 견고한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 모두 내부적인 땅의 세계이며, (2)내부에 각각 액체나 액체적인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예를 들어 담즙, 가래, 고름, 피 등의 각각 액체나 액체적인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은 모두 내부적인 물의 세계이며, (3)내부에 각각 불이나 에너지적인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예를 들어 열, 노쇠, 소화,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는 현상 등을 수반하는 각각 불이나 에너지적인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은 모두 내부적인 불의 세계이며, (4)내부에 각각 기체나 기체적인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예를 들어 상향풍, 하향풍, 위주풍, 하복주풍, 지체순환풍, 출식풍, 입식풍 등의 각각 기체나 기체적인 것은 모두 내부적인 바람의 세계이다."

이러한 내부적인 원소들은 무상한 외부적인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신체가 죽은 뒤에 다시 흩어져 외부로 돌아간다. 이러한 신체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은 인식을 가져온다.

[붓다] "벗이여, 그 외부적인 땅의 세계가 위대할지라도 무상한 것이 알려질 것이며 소멸하는 것이 알려질 것이며 사라지는 것이 알려질 것이며 변화하는 것이 알려질 것인데, 하물며 이 갈애가 취착된 조그마한 육체에 '나' 또는 '나의 것' 또는 '나는 있다' 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없는 것이다."

외부적인 원소의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을 통해 그와 동일한 내부적인 원소의 끝없는 변화를 관찰하여 그 가운데 '나, 나의 것, 나는 있다' 라는 실체적 관념을 없앰으로써 육체에 대한 집착을 소멸시키는 것이 수행의 중요한 성과이다.

또 다른 육체에 관한 분석적인 관찰로는 죽은 후에 몸이 해체되는 사체에 대한 관찰이 있다. 사체가 묘지에 유기되어 며칠이 경과한 뒤에 시체가 팽창하고 푸르게 멍든 어혈이 있고 고름이 가득한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까마귀, 독수리, 개, 승냥이 등의 각종 생류가 잡아먹거나 뜯어먹고 남은 시체에 대한 관찰이 있으며 그밖에 사체에 살과 피가 있는 근육이 붙은 해골이나 살은 없지만 피가 있는 근육이 붙은 해골이나 살과 피가 없는 근육이 붙은 해골이나 관절이 풀어져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손뼈, 발뼈, 정강이뼈, 넓적다리뼈, 골반뼈, 척추뼈, 두개골과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해골들을 관찰하는 수행법이 있다.

이러한 관찰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그것과 비교하여 관찰하는 것을 수반한다.

[붓다] "이 몸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며 이와 같이 이루어진 것이며 이것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수행은 이미 올바른 정진 가운데 수호에 의한 노력과 동일한 내용을 함축하는 것이다. 단지 수호에 의한 노력은 해골과 뼈로 구성된 시체에 대한 지각, 벌레들이 모여 우글거리는 시체에 대한 지각, 푸르게 멍든 어혈을 지닌 시체에 대한 지각, 고름이 가득찬 시체에 대한 지각, 부패해서 갈라진 시체에 대한 지각, 부푼 시체에 대한 지각 등의 특정한 지각현상을 수호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것을 토대로 새김에서는 그러한 사체의 현상에 대한 지각이 자신의 살아 있는 육체에 대한 관찰과 병행하면서 진행된다.

2. 감수에 대한 관찰(受隨觀,vedananupassana)은 여섯 감관의 접촉의 계기마다 강하거나 약하거나 분명하거나 불분명하거나 쾌, 불쾌의 정서를 일으키므로 감수에 대한 새김은 이러한 조건에 대한 관찰을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즐거운 감수는 탐욕을, 괴로운 감수는 성냄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중성적인 감수는 어리석음을 수반한다. 이때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또한 무명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감수에 대한 새김은 이러한 오염의 조건을 알아챘을 때 그 오염을 소멸시키고 궁극적으로 감수마저 소멸시킴으로써 감수 자체를 경험의 영역으로 되돌리는 역할을 한다.

[새김의 토대경]에 나타난 감수에 의한 새김은 단순히 즐거움의 감수를 느낄 경우 즐거운 감수를 느낀다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괴로운 감수나 중성적인 감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각각의 감수는 다시 육체적인 것(자양분이 있는)과 정신적인 것(자양분이 없는)으로 분석적으로 관찰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어떻게 감수 가운데 감수를 관찰하는가? 여기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 즐거운 감수를 느끼면 '나는 즐거운 감수를 느낀다' 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육체적인 즐거운 감수를 느끼면 '나는 육체적인 즐거운 감수를 느낀다' 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정신적인 즐거운 감수를 느끼면 '나는 정신적인 즐거운 감수를 느낀다' 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새김의 원리에 따라 감수도 공간적으로 내외(자신과 타자)로 시간적으로 생멸을 통해 관찰된다. 여기서 시간적 관찰은 곧 전형적인 연기의 인과연쇄에 의한 고리로서 감수를 파악함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을 수반하는 새김은 단지 감수의 속성에 대해 '분명히 아는 것(了知,pajanana)'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그것이 감수의 점차적인 소멸로 이끄는 길이 된다. 왜냐하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감수의 속성에 대한 통찰은 곧바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소멸로 이끌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3. 마음에 대한 관찰(心隨觀,cittanupassana)이 감수에 대한 관찰 이후에 놓은 것은 정신적인 특수한 요소인 감수로부터 그것이 소속되는 일반적인 마음에 대한 관찰로 명상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의식(識) 자체가 마음(心)이라고 불린다. 마음은 사실상 모든 정신적 요소를 함축한다. 그 가운데 가장 일차적인 것이 의식이다. 의식은 전형적인 연기에서 보면 감각영역에 최초로 수반되는 정신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식의 작용(心所,cetasika)을 수반한다. 여기에는 감수, 지각, 형성 등이 수반된다. 의식 자체는 순전히 대경과 감관 사이의 순수한 체험에 불과하다. 의식은 스스로 식별되지 않으며 오로지 수반하는 그 작용들에 의해 분별된다. 의식의 작용이 마음을 물들이며 마음에 구별하는 성격을 부여한다. 우리가 마음을 관찰의 대상으로 할 경우에 마음의 작용을 수반하는 의식을 관찰하여야 한다. 경전에서는 16가지의 마음의 작용을 수반하는 의식, 즉 마음에 관해서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제시되고 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마음에 있어서 마음을 관찰하는가? 여기에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탐욕이 없는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그 밖에 경전에서는 탐욕의 유무 이외에 성냄의 있고 없음, 어리석음의 있고 없음, 과밀하거나 흩어짐, 계발되었거나 되지 않음, 열등하거나 최상임, 집중되었거나 되지 않음, 해탈했거나 하지 않음의 도합 16가지의 마음의 작용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이러한 마음의 작용에 대한 관찰은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의 상태의 유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마음이 어떠한 작용을 수반하더라도 마음의 상태로서 단지 관찰할 뿐 거기에 '나' 또는 '내 것' 또는 '나는 있다' 라는 집착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새김은 순수한 마음이건 오염된 마음이건 간에, 최상의 마음이건 열등한 마음이건 간에 탐착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오직 분명히 알아챌 뿐이다. 예를 들어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을 때 성내는 마음이 생겨났다면 그러한 감정적으로 불안한 상태를 감정적이 아닌 마음의 관찰로 대체함으로써 혼란한 감정은 소멸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새김이 깊어지면 불건전한 감정들은 점차 소멸된다. 거기에 수반하는 불필요한 사유의 확장도 막을 수 있다. 희론이나 과대망상이나 자학, 피해망상, 정신분열, 자기정당화, 위선 등의 불건전한 마음의 상태는 소멸된다. 이 과정에서 마음에 관한 더욱 많은 지식이 우리에게 알려진다. 더욱 마음의 관찰이 진행되면 어디에서부터 오지도 않고 어디로 가지도 않는 순수한 마음 또는 의식의 흐름의 지속만이 남게 된다.

[붓다] "불건전한 의도, 즉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제거함으로써 마음은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고 잘 닦여진다."

물론 이 때의 잘 닦여진 마음은 궁극적으로 번뇌로부터 자유롭고 지혜를 갖추게 되며 따라서 열반에의 도달을 가능하게 한다.

4. 사물에 대한 관찰(法隨觀,dhammanupassana)은 내적 외적인 사물에 대한 관찰을 의미한다. 내적인 사물이란 정신현상을 말하고 외적인 사물이란 외적인 감각대상을 말한다. 그러나 경전에서 일반적으로는 그것들을 움직이는 궁극적인 진리로서의 법(法)에 대한 관찰을 의미한다. 그 진리는 신비적이거나 비교적(秘敎的)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보고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붓다] "법은 현세적이고 무시간적이고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법은 현세에서 실체적인 통찰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되는 것이 새김(念,sati)이다. 법에 대한 관찰은 육체와 지각현상 그리고 의식이나 마음에 관한 관찰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때 기계적으로 따를 수 있는 보다 궁극적인 관찰이다.

[새김의 토대경]에 의하면 법에 대한 관찰은 주로 정신적 혹은 정신물리적 작용의 현상과 그것과 연관된 해탈론적인 가르침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모든 관찰은 정형화된 연기에 관한 관찰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것들이다. 그 경전에서는 법에 관한 관찰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 다섯가지 장애의 현상(五障法)에 대한 관찰은 무지의 원인이 되는 번뇌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분노,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한, 의심이 있다. 우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관찰방법에 관해 논의해보자. 나머지는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에 한 수행승이 있어 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면 '나에게는 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있다' 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없다' 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생겨난다면 생겨나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며,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버리면 버리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며, 이미 버려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다면 생겨나지 않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2) 다섯가지 존재의 취착다발의 현상(五取蘊法)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있어 물질은 이와 같고 물질의 발생은 이와 같고 물질의 소멸은 이와 같다.... 감수... 지각... 형성... 의식... 이와 같이 내적 현상에 대하여 현상의 관찰을 한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서 다섯가지 존재의 취착다발의 현상에 대하여 현상의 관찰을 한다."

역시 이 존재의 취착다발에 대한 관찰도 내적으로 자신에 대해, 외적으로 타자에 대해, 그리고 생성과 소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찰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취착다발의 소멸을 지향한다.

(3) 여섯가지 내외적 감역의 법(六內外處法)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있어 시각을 분명히 알고 형상을 분명히 알며 그 양자를 조건으로 결합이 생겨나면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결합이 생겨나면 생겨나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며 이미 생겨난 결합을 버리게 되면 버리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안다. 이미 버려진 결합이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다면 생겨나지 않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경전은 시각과 형상과 그 결합뿐만 아니라 청각과 소리와 그 결합, 후각과 냄새와 그 결합, 미각과 맛과 그 결합, 촉각과 감촉과 그 결합, 정신과 사물과 그 결합에 관해서도 동일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들 감각의 장들에 대한 관찰도 내적으로 자신에 대해, 외적으로 타자에 대해, 그리고 생성과 소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 감각의 장의 소멸을 지향한다.

(4) 일곱가지 깨달음 고리(七覺支)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있어 내적으로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있다면 '나에게 내적으로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있다' 고 분명히 알며 내적으로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없다면 '나에게 내적으로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없다' 고 분명히 알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생겨난다면 생겨나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알며 이미 생겨난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수습되어 원만해지면 수습되어 원만해지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안다."

이러한 설명은 이미 올바른 정진에서 언급한 깨달음의 다른 여섯 가지 요소에 관해서도 경전 상에서 반복될 뿐만 아니라 내적 외적으로 그 생성과 소멸에 관한 과정적 관찰도 동시에 언급된다.

(5) 네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있어 '이것이 괴로움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은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단순한 관념적 이해에서 벗어나 점점 더 깊은 새김의 차원으로까지 고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덟번째, 올바른 집중 (正定)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 가운데 마지막이 올바른 집중 내지 삼매이다. 그것은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과정이긴 하지만 미식가가 음식을 생각하던가 음탕한 자가 여색을 생각한다던가 군인이 전장에서 적을 죽인다던가 하는 데 있어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과정의 악하고 불건전한 집중은 집중이 아니라 집착이므로 제외된다. 그러므로 명상의 과정에서의 올바른 집중은 선하고 건전한 마음의 상태에서의 집중과정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는 새김을 수반하며 해탈의 계기로서 작용한다.

삼매는 건전한 집중으로 일상적으로 흐트러진 마음의 흐름을 내적인 통일로 향하게 한다. 이러한 마음의 집중은 바람 없는 곳에서 타오르는 램프의 고요한 불꽃에 비유되는 안정된 마음의 과정이다. 집중되지 않은 마음은 마치 물이 말라 마른 땅에 버려진 물고기가 파닥거리는 것에 비유된다. 집중되지 않은 마음의 상태에서 우리의 의식은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마음의 대상은 임의적인 생각의 파문에 왜곡되어 나타난다.

그러자 잘 집중된 마음은 명상의 주제인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그 속에 침투하고 거기에 흡수되어 그것과 하나가 된다. 그래서 정신적 장애의 제거와 마음새김의 확립이라는 삼매의 과정에 수반되는 올바른 집중은 마음의 멈춤(止,samatha)과 대상의 관찰(觀,vipassana)이라는 두 가지 계기를 갖고 있다. 이러한 멈춤과 관찰의 실천적 작업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바로 명상의 장(業處,kammatthana)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이러한 명상의 장으로 101가지나 열거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청정도론]에서 붓다고싸가 간추린 40가지만을 분류하여 설명해보기로 한다.

1. 열가지 지평(十遍處,dasa kasina)에 대한 집중이 있다. 이러한 열가지 지평을 토대로 초보자들도 쉽게 삼매의 집중과정에 들어선다.

[붓다] "열가지 지평이 있는데 한 사람이 있어 땅의 지평, 물의 지평, 불의 지평, 바람의 지평, 푸른색의 지평, 노란색의 지평, 붉은색의 지평, 흰색의 지평, 허공의 지평, 의식의 지평을 위로 아래로 옆으로 하나로서 무한하게 지각하는 것이다."

2. 열가지 더러움(十不淨,dasa asubha)에 대한 집중이 있다. 올바른 새김 가운데 신체에 관한 관찰, 특히 시체의 열 가지 특성에 대한 새김이 삼매의 차원으로 전이되면서 대상화된 것을 이른다. 여기에는 [청정도론]의 분류에 의하면, 부풀어 오른 시체에 대한 지각, 푸르게 멍든 어혈을 지닌 시체에 대한 지각, 고름이 가득 찬 시체에 대한 지각, 부패해서 갈라진 시체에 대한 지각, 동물이 먹고 남은 시체에 대한 지각, 흩어진 시체에 대한 지각, 살해되어 사지가 흩어진 시체에 대한 지각, 피로 물든 시체에 대한 지각, 벌레들이 모여 우글거리는 시체에 대한 지각, 해골과 뼈로 구성된 시체에 대한 지각의 열 가지가 거론된다.

3. 열가지 따라새김(十隨念,dasa anussatiyo)에 대한 집중이 있는데, 따라새김은 새김의 구체적 항목들을 열거한 것이다. 올바른 새김은 보다 심층적인 삼매의 집중과정으로 전화되어 명상의 대상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청정도론]에 열거된 새김의 종류는 통일성이 없지만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부처님에 대한 새김 (2) 가르침에 대한 새김 (3) 승가에 대한 새김 (4) 계행에 대한 새김 (5) 보시에 대한 새김 (6) 하늘사람에 대한 새김 (7) 죽음에 대한 새김 (8) 신체에 대한 새김 (9) 호흡에 대한 새김 (10) 적정에 대한 새김.

앞의 세 가지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로 부처님을 열 가지의 이름으로써 조명하여 관찰한다던가 가르침을 적절히 분류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승가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네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들(四雙八輩,四向四果)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초기경전에 잘 드러나 있다. 그 다음의 계행과 보시로 천상에 태어난다는 고대적인 도덕관에 입각한 것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새김은 존재의 필연적인 사멸에 관해서 숙고하여 관찰하는 것이며, 신체에 대한 새김은 지수화풍의 사대로 구성된 몸을 관찰하거나 32가지의 구성부분으로 된 신체에 대해 관찰하는 것이다. 호흡에 대한 새김은 올바른 새김의 장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날숨과 들숨에 대한 것인데 그 새김이 집중을 통해 깊어지면 미세하게 되어 고요한 지복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고 적정에 대한 새김을 가능하게 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이 호흡새김에 대한 집중을 수행하고 익히면 적정, 승묘, 무염, 지복에 머물러 악하고 불건전한 법들이 생겨날 때마다 즉시 그것들을 사라지게 하여 지멸시킨다."

4. 네가지 청정한 삶(四梵住,cattari brahmavihara)에 대한 집중은 모든 중생에게까지 확대되는 자리이타적인 무량한 마음인 사무량심에 대한 집중이라고도 한다. 자애(慈,metta), 동정(悲,karuna), 희열(喜,mudita), 평정(捨,upekkha)의 네가지 청정한 삶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자애는 올바른 사유 가운데 성냄을 여읜 사유를, 동정은 폭력을 여읜 사유를, 희열이나 평정은 욕망을 여읜 사유에서 비롯한다.

(1) 자애의 청정한 삶에 대한 명상 : 자신보다 사랑스런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타인도 자신을 사랑하므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보편적인 사랑을 그 원리로 한다.

[붓다] "모든 방향으로 마음을 편력하더라도 어디에도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것은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각각의 자아는 사랑스럽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남을 해치지 않는다."

(2) 연민의 청정한 삶에 대한 명상 : 연민은 궁극적으로 사랑에 수반하는 것이지만 [분별론]에 의하면 역경에 처한 사람에 대한 동정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붓다] "수행승은 어떻게 연민을 갖춘 마음으로 한 방향을 편만시키는가? 예를 들어 역경에 처한 사람을 보고 연민하는 것과 같이 모든 중생에 대하여 연민을 편만시킨다."

(3) 희열의 청정한 삶에 대한 명상 : 희열은 괴로움의 윤회에서 벗어나는데 수반되는 자유로서 [분별론]에 의하면 사랑하는 자를 보고 기뻐하는 것과 같이 모든 중생에게 희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붓다] "수행승은 어떻게 희열을 갖추어 마음으로 한 방향을 편만시키는가? 예를 들어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고 희열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와 같이 모든 중생에게 희열을 편만시킨다."

(4) 평정의 청정한 삶에 대한 명상 : 사랑, 동정, 희열은 애착의 사유(愛執作意)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항상 그러한 집착을 소멸시키는 평정은 불가결한 것이다. [분별론]에 나타난 평정의 범주의 수습은 다음과 같다.

[붓다] "수행승은 어떻게 평정을 갖춘 마음을 한 방향으로 편만시키는가? 예를 들어 마음에 들지도 마음에 들지 않지도 않는 사람을 보고 평정하듯이 이와 같이 모든 중생에 대해서 평정한 마음을 편만시킨다."

5. 네가지 무형상(四無色)에 대한 집중은 이미 선정의 단계에 깊이 들어간 자에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상태는 또한 존재의 영역으로 범천계에 속하며 화생한 범천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1) 공간이 무한한 세계(空無邊處) : 물질의 지각현상이 사라져 그 다양성이 소멸하고 공간만이 무한하게 현존하는 객관적 대상이 소멸된 경지를 말한다.

(2) 의식이 무한한 세계(識無邊處) : 공간이 무한하다는 지각의 상태가 대상없는 의식의 무한성으로 주관적으로 환원된 상태이다.

(3) 아무 것도 없는 세계(無所有處) : 의식의 무한성마저 소멸되어 객관적이건 주관적이건 아무런 의식대상도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의 상태이다.

(4) 지각하지도 않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非想非非想處) : 허공의 무한성에 대한 의식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에 대한 지각상태로서 미묘하여 지각이 소멸하여 남아 있다 또는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이다.

6. 수렴적 지각(一想, eka sanna)에 대한 집중은 자양분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나는 지각(食厭想)을 의미한다. 초기경전에 따른 그 본래의 의미는 네가지의 존재를 구성하는 자양분(食,ahara)에 대한 지각을 뜻한다. 거기에는 물질의 자양분(搏食)과 그밖에 정신적인 것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세가지의 감수를 수반하는 접촉의 자양분(觸食)과 욕망의 세계, 형상의 세계, 무형상의 세계의 존재로 되고자하는 의도의 자양분(意思食)과 태어남의 계기에 정신물리적 현상인 명색(名色)을 수반하는 의식의 자양분(識食)이 있다. 이러한 자양분에 대해 싫어하여 떠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에서 벗어나 해탈하기 위한 것이다.

(1) 물질의 자양분에 대한 지각 : 어떤 부부가 적은 양식을 가지고 황야로 여정을 떠났다. 그런데 중도에 양식이 다 떨어져서 하는 수 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외아들을 죽여 그 살코기를 먹으면서 '외아들이 어디에 있느냐' 고 외치면서 황야를 빠져나왔다면 그 아들의 고기를 즐겁게 먹을 수 없듯이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적 자양분도 그와 같이 유혹적인 대상으로 보는 미관(味觀)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연생의 실상을 보는 위험한 대상으로 보는 환관(患觀)에 의해서 괴로운 대상인 염역(厭逆)의 대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2) 접촉의 자양분에 대한 지각 : 접촉의 자양분은 가죽이 찢겨진 목우의 신세와 같다. 가죽이 찢겨진 목우가 한 담벼락에 기대서면 담벼락에 살고 있는 생물이 그를 먹어치울 것이고 나무 곁에 서 있으면 그 나무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버릴 것이다. 물 속에 있으면 그 물 속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한 데에 서 있으면 한 데에 사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치울 것이다. 존재의 다발 가운데 접촉의 자양분은 이와 같이 가죽이 찢겨진 목우처럼 위험해서 결국 생노병사의 윤회를 낳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접촉의 자양분도 유혹적인 대상으로 봄으로써 즐거운 것으로 오인돼서는 안되며 위험한 대상으로 봄으로써 싫어하여 벗어나야 하는 대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3) 의도의 자양분에 대한 지각 : 의도의 자양분은 석탄화로에 떨어지는 것과 같이 위험한 것이다. 작열하면서 연기도 내지 않고 타오르는 석탄화로에 강제로 어떤 사람을 끌어넣는다면 그 사람은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이를 정도의 괴로움을 겪게 된다. 의도의 자양분도 이와 같아서 유혹적인 대상으로 봄으로써 즐거운 것으로 오인돼서는 안되며 위험한 대상으로 봄으로써 싫어하여 벗어나야 하는 대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4) 의식의 자양분에 대한 지각 : 의식의 자양분은 아침, 점심, 저녁마다 찌르는 백개의 창에 비유된다. 사로잡힌 흉악한 도둑에게 왕이 명령하여 아침에 백개의 창으로 그를 찌르도록 했다. 저녁때에도 아직 그가 살아있으므로 다시 백개의 창으로 찌르도록 했다. 의식의 자양분도 이와 같아서 유혹적인 대상으로 봄으로써 즐거운 것으로 오인돼서는 안되며 위험한 대상으로 봄으로써 싫어하여 벗어나야 하는 대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7. 분석적 지각(一差別,ekavavatthana)에 대한 집중은 육체에 대한 분석적인 지각을 통해서 그 실체에 대한 관념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네가지 세계에 대한 분별(四界分別)을 뜻한다. 이것은 물질적으로 구성된 우리 육신을 네가지 세계, 즉 땅, 물, 불, 바람의 세계로 분석하는 것이다.

[붓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숙련된 도살자나 도살자의 제자가 소를 죽여서 네거리에 조각 내어 분할하고는 앉아 있듯이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바로 이 몸을 있는 그대로 주어진 세계를 따라 관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세계, 물의 세계, 불의 세계, 바람의 세계가 있다' 고."

붓다고싸에 의하면 소가 도살되어 죽어서 분할되어 가는 동안에 소 도살자에게는 소에 대한 지각이 소멸하고 쇠고기에 대한 지각이 일어나듯이 수행승에게도 이 몸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여 관찰하면 중생(有情,satta)이나 사람(人,posa)이나 개인(個人,puggala)이라는 지각은 소멸하고 요소로 분해된다. 이 분석방법에 관해서는 [상적유대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 내부의 땅의 세계 : 견고한 것으로 머리카락, 몸털, 손발톱, 이빨, 피부, 살, 근육, 뼈, 골수, 신장, 심장, 간장, 늑막, 비장, 폐, 창자, 장간막, 위장, 배설물 등.

(2) 내부의 물의 세계 : 습윤한 것으로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임파액, 침, 점액, 관절액, 오줌 등.

(3) 내부의 불의 세계 : 온난한 것으로 열을 내는 것, 늙게 하는 것, 연소시키는 것, 먹고 마시고 삼키고 맛본 것을 잘 소화시키는 것 등.

(4) 내부의 바람의 세계 : 동적인 것으로 상향풍, 하향풍, 위주풍, 하복주풍, 지체순환풍, 출식풍, 입식풍 등.

올바른 명상에 들어 집중하기 위해서는 명상의 장(業處)를 선정한 뒤에 올바른 명상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다리를 편하게 결가부좌하고 상체를 곧게 세운 뒤에 손을 포개고 머리를 곧추세우고 입을 다물고 눈은 반쯤 감고 숨을 고르게 하여 마음을 집중시키며 흐트러지면 알아채고 다시 집중시킨다. 이러한 단계를 예비삼매(遍作定,parikammasamadhi)라고 하며, 이때에 명상의 장이 되는 특징(現相)을 예비현상(遍作相)이라고 한다. 이렇게 예비현상을 취해서 올바른 집중을 실천하다보면 다섯 가지의 마음의 장애가 소멸되면서 다섯가지 선정의 고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음의 장애(五障)] [선정의 요소(五支)]
해태와 혼침 -> 사유
매사의 의심 -> 숙고
분노 -> 희열
흥분과 회한 -> 행복
감각적 쾌락 -> 심일경성

[청정도론]에 따르면 사유는 명상의 대상이라는 종을 치는 것과 같으며, 숙고는 그 종의 반향을 관찰하는 것이고, 희열은 명상의 대상에 대한 관심과 흥미에 따르는 기쁨으로 사막을 여행하는 자가 멀리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쁨에 해당하며, 행복은 오아시스에 도착하여 물을 마시고 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심일경성은 마음과 대상을 통일시키는 역할을 한다.

명상의 장으로서의 대상은 거친 물질적 감각자료들이거나 거친 정신적 인상이었으나 집중이 심화될수록 실제적 대상이 없이도 마음에 분명히 보이는 정신적 대상인 습득상으로 바뀌고 습득상은 다시 청정하고 밝은 대응상으로 바뀐다. 습득상은 [청정도론]에 의하면 구름 낀 달에 비유되고 대응상은 구름이 사라진 달에 비유된다. 왜냐하면 대응상이 나타나면서 선정의 요소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음은 근접적 삼매(近行定,upacarasamadhi)에 이른다. 더욱 깊이 마음의 집중과정에 들어서면 근접적 삼매는 근본적 삼매(近本定,appanasamadhi)에 들어간다. 이때 두 삼매 사이에 질적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근접적 삼매는 선정의 요소들의 정신적 힘이나 견고성이 약해서 자주 넘어지는 어린아이에 비유되고 근본적 삼매는 힘과 강도를 지녀 탄탄히 걸어가는 어른에 비유된다.

이렇게 해서 선정의 요소들이 갖추어진 근본적인 삼매는 여덟 단계 내지 아홉 단계로 이끌어진다. 이 가운데 다섯번째에서 여덟번째까지는 네가지 무형상계에 관하여는 이미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불교에만 고유한 첫 네가지 선정과 마지막 단계의 멸진정(滅盡定)에 관해서만 언급한다.

(1) 첫번째 선정(初禪)의 과정은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 선정의 요소가 기본적으로 모두 갖추어지면서 성립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감각적 욕망을 떠나고 악하고 건전하지 못한 법을 떠나서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떠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번째 선정에 도달한다."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초선에 도달한 자에게는 언어가 소멸하게 된다' 라고 또 다른 과정상의 속성이 부가되어 있으나 그것은 대상 지향적인 감각적 욕망을 떠나는 과정에 수반되는 지칭적 언어표현의 소멸을 뜻한다. 그러나 개념화된 언어로 대상을 이해하는 사유나 숙고는 아직 제거되지 않는다.

(2) 두번째 선정(二禪)의 과정에서는 사유와 숙고가 다른 요소보다 다듬어지지 않은 존재로 제거된다. 더욱 깊은 심일경성을 속성으로 하는 삼매에서 생겨나는 더욱 커다란 희열과 행복을 수반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에 내적인 평온, 심일경성에 도달하여,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번째 선정에 도달한다."

(3) 세번째 선정(三禪)의 과정에서 희열은 거친 것으로 제거되고 다섯 가지 선정의 고리 가운데 더욱 심화된 행복과 심일경성만이 남는다. 이때에 평정함이 심화되고 주의깊은 새김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희열이 사라진 뒤에 평정하고 주의깊고 올바로 알고 육체적으로 행복을 느낀다. 바로 고귀한 이들이 '평정하고 주의깊고 행복하다' 라고 한 세번째 선정에 도달한다.

(4) 네번째 선정(四禪)에서 거칠게 지각되는 육체적인 행복이 제거되고 평정하고 주의깊고 청정한 상태에 도달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버리고 이전의 희열과 우울이 사라진 뒤에 행복도 없고 고통도 없는 평정하고 주의깊고 청정한 네번재 선정에 도달한다."

여기서 삼선에서의 행복의 상태마저 제거되는 순수한 선정의 집중 상태만이 남지만 거기에 주의깊음 즉 바른 새김이 수반된다. 그런데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네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호흡이 소멸하게 된다' 라고 또 다른 과정상의 속성이 부가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첫번째와 두번째 선정에서 언어적 형성이 세번째와 네번째의 선정을 통해 육체적인 행복과 날숨과 들숨이라고 하는 육체적 형성이 소멸된다.

이렇게 나타나는 심일경성은 마음에 의한 해탈이라고 불리우며, 이 마음에 의한 해탈은 세속적이지만 탁월한 정신적 능력(세간신통)의 구사를 가능하게 한다. 이 탁월한 정신적 능력이란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의 초월지(abhinna)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초월지는 결코 일반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지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누구나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의 체험적 구조 속에서 인과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다. 우빠니샤드의 사상가들이 요가체험의 기초 위에 이러한 지식을 신비적 직관으로 여겼고 그것은 아트만이나 브라흐만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실체를 계시하는 것으로 여겼다.

여기에 비해 붓다는 이러한 지식의 생성을 조건적 발생과정으로 해체시켰다. 쁘레마씨리에 의하면 '초월적인 인식능력은 결코 불교에서 플라톤의 초월적인 이데아에 대한 지적인 직관과 비교될 수가 없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감각체험과 지적 직관은 상호배타적인 인식론적인 범주에 소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 따르면 초월지는 초감각적 실재에 대한 신비적 직관이 아니고 단지 조건적으로 발생되는 감각적 능력의 확장과 정제의 결과' 이다. 여기에는 감각적 대상과 기억과 같은 정신적 내용을 초월하는 실체에 관한 인식은 없다.

(1) 신족통(神足通,iddhi)은 정신적 능력이 정제되고 확장된 것이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의 정신적 능력을 즐긴다. 나는 하나에서 여럿이 되며 여럿에서 하나가 된다. 나는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자유로운 공간처럼 집착없이 담을 통과하고 성벽을 통과하고 산을 통과해서 간다. 나는 물 속에서처럼 땅 속을 드나든다. 나는 땅 위에서처럼 물에서도 빠지지 않고 걷는다. 나는 날개 달린 새처럼 공중에서 앉은 채 움직인다. 나는 손으로 이처럼 큰 위력을 지니고 이처럼 큰 능력을 지닌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는다. 나는 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육신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신족통에 대한 서술은 실제로 가능하지 않은 불사의한 것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난해한 문제를 던져준다. 그러나 일체의 존재가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공간, 담, 성벽, 물, 땅, 새, 달, 해, 범천, 육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유위법적으로 조건적으로 발생된 연생(緣生)이라고 한다면 무상하고 실체가 없으므로 어떠한 물질적 장애도 실제로 성립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사사무애(事事無碍)적인 자유가 가능해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이유에서 쁘레마씨리처럼 신족통을 염력과 같은 정신적 힘을 수행하는 능력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2) 천이통(天耳通,dibbasota)은 청각능력이 정제되고 확장된 것이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청정하여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 귀로 멀고 가까운 신들과 인간의 두 소리를 듣는다."

이 능력은 별반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은 아니다. 감각기관이 지극히 청정해지면 멀고 가까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텔레파시나 전파매체를 통해 얼마든지 멀고 가까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신들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신들은 우리의 정신에서 생겨나는 일종의 화생(化生)으로서 마음에서 조건적으로 생겨나는 것에 불과하다면 얼마든지 청정한 청정한 마음으로 그 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또한 궁극적으로 모든 장애의 소멸이 어떠한 소리도 민감하게 수용하는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면 천이통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3) 타심통(他心通,parassa cetopariyanana)은 타인의 마음의 상태를 헤아리는 능력이 정제되고 확장된 것이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나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다른 중생,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안다. 나는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을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알거나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을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안다. 나는 진애로 가득한 마음을 진애로 가득한 마음이라고 알거나 진애에서 벗어난 마음을 진애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안다. 나는 우치에 가득 찬 마음을 우치에 가득 찬 마음이라고 알거나 우치에서 벗어난 마음을 우치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안다. 나는 통일된 마음을 통일된 마음이라고 알거나 흩어진 마음을 흩어진 마음이라고 안다. 나는 최상의 마음을 최상의 마음이라고 알며 최상이 아닌 마음을 최상이 아닌 마음이라고 안다. 나는 삼매에 든 마음을 삼매에 든 마음이라고 알며 삼매에 들지 못한 마음을 삼매에 들지 못한 마음이라고 안다. 나는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고 알며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안다."

이 타심통은 나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이나 중생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으로 여기에 언급된 타심통의 대상은 언제나 일정한 타자의 마음 상태, 특히 그들의 조건지어진 것에 대한 속박과 그것의 소멸에 따르는 자유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4) 숙명통(宿命通,pubbenivasanussati)은 자신의 행위와 업보에 대한 기억이 정제되고 확장된 것이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한다. 예를 들어 한번 태어나고 두번 태어나고 세번 태어나고 네번 태어나고 다섯번 태어나고 10번 태어나고 20번 태어나고 30번 태어나고 40번 태어나고 50번 태어나고 백번 태어나고 천번 태어나고 10만번 태어나고 수많은 파괴의 겁을 지나고 수많은 세계 생성의 겁을 지나고 수많은 세계 파괴와 세계 생성의 겁을 지나면서 당시에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고 나는 그곳에서 죽은 뒤에 나는 여기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나는 나의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한다."

여기서 숙명통에 관해 언급되고 있는 내용은 거의 무한이지만 특정한 시간에 한정되어 소급되는 자신의 전생에 관한 초월지이다. 왜냐하면 윤회의 시작은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시간적 계기에 따라 조건지어진 존재의 계기가 흔적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조건의 소멸에 수반되는 여실지견에 의해 전생으로 기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전생의 사건에 대한 인과론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직접지각이 아니며 다중적인 전생의 삶을 회상할 수 있는 능력에 불과한 것이다.

(5) 천안통(天眼通,dibbacakkhu)은 자신의 행위와 업보에 미루어 타자의 행위와 업보에 대해 파악하는 능력이 정제되고 확장된 것이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청정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중생들을 본다. 어떤 중생들은 몸으로 악행을 갖추고 입으로 악행을 갖추고 마음으로 악행을 갖추었다. 그들은 고귀한 분들을 비난하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잘못된 견해에 따라 행동한다. 그래서 그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그러나 다른 중생들은 몸으로 선행을 갖추고 입으로 선행을 갖추고 마음으로 선행을 갖추었다. 그들은 고귀한 분들을 비난하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올바른 견해에 따라 행동한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가 파괴되고 죽은 뒤에 선처, 하늘나라에 태어났다. 이와 같이 나는 청정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 눈으로 중생들을 관찰한다."

천이통처럼 천안통이 멀고 가까운 대상에 대한 지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중생들의 다양성을 그들의 업보의 다양성에 따른 인과응보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앞서의 숙명통은 자신에 관련된 것이고 지금 논의되고 있는 천안통은 타자의 다양한 업보에 따라 등장하는 숙명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타자의 현재적 사건을 일반적인 시각능력의 범주를 넘어서 지각하는 것이다. 또한 타심통이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타자의 마음을 알듯이 천안통은 자신의 숙명을 미루어 타자의 숙명에 관해 아는 것이다. 천안의 계발은 초감각적 초시간적 실재를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육안을 토대로 한다. 따라서 천안통은 현재적 사건을 보는 목적을 위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직접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초월지는 조건적으로 발생되는 감각능력의 확장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인데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능력을 제외한 시각능력과 청각능력 그리고 정신력의 확장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이러한 초월지는 연기론의 인식론적 토대를 제공해왔다.

그러나 여기서 과거와 미래를 직접 지각하는 초인식적 능력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과거는 오직 기억을 수반하여 관찰함으로써 식별된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 생성되지 않았으므로 직접적으로 지각될 수 없다. 그러므로 붓다는 이러한 명상수행에 따른 미래에 관한 가장 확실한 지식으로 미래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는 깨달음에서 오는 지혜만을 언급했다.

불교의 초월지는 동시대인들이 주장한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라는 전지(全知)를 극단적인 결정론과 관계된 것으로 부정한다. 초월지의 체험내용은 나중에 언급할 누진통을 제외하고는 일반적 감각내용과 다른 질적 특성을 지닌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위와 같은 능력을 지니지 않은 누구라도 검증할 수 있는 것이다.

지각하지도 않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는 무형상계의 선정에서 가장 초월적인 존재상태인데. 지각과 감수가 소멸된 세계(想受滅)의 선정은 그러한 비형상계의 최상의 단계마저 초월하는 선정의 결과이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지각하지도 않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과 감수가 소멸된 선정에 든다."

이러한 지각과 감수가 소멸된 멸진정이 붓다가 성취한 가장 높은 형태의 명상이지만 궁극적인 열반의 성취와는 다른 것이다. 깔루빠하나에 의하면 붓다는 요가 수행자의 선정에 의해 도달하는 초감각적 지각의 타당성을 수용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실제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지각과 감각이 모두 중지되는 멸진정과 같은 최고단계의 법열도 열반의 일시적 측면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므로 다른 경전에서 이러한 상태에 도달한 싸리뿟따에게 '지혜로써 관찰되어 번뇌들이 소멸한다' 그리고 '그는 그 입정(入定)으로부터 새김을 갖추어 출정(出定)한다' 라는 진술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지각과 감수가 소멸한 멸진정이 곧 선정의 최상 단계로서 모든 선정을 대변하지만 그것이 곧 최종적 해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붓다] "지혜가 없는 자에게는 선정도 없다. 선정과 지혜를 갖춘 자, 그는 참으로 열반에 가까이에 있다."

지혜는 바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 가운데, 네가지 거룩한 진리이나 연기법에 대한 완전한 통찰을 의미하는 올바른 견해의 완성과 더불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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