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용은 불교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 소개하는 글입니다

 

불교를 바르게 알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여러분에게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의 강의 제목은 ‘불교를 바르게 알자’입니다. 강의할 요점은 이미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렸으니, 강의원고의 항목에 따라서 한 조목씩 여러분에게 아주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단락은 연기(緣起)입니다. 불교 창시자는 석가모니불입니다.

석가불은 삼천 년 전에 북인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현재의 네팔입니다. 중국 고대 역사기록에 의하면, 부처님은 중국 주나라 소왕[周昭王] 26년 갑인(甲寅)년에 태어나서 주나라 목왕[周穆王] 53년, 세수 79세에 열반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부처님은 80세를 사셨다고 말하는데, 끝자리 없는 숫자로 한 말이고 사실은 79세에 입적하셨으며, 49년 동안 설법하셨습니다. 불법이 정식으로 중국에 전래된 것은 후한(後漢) 영평(永平) 10년으로, 서기 65년에 중국에 전래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역사는 모두 생략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중점을 두는 곳은 불교의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불교일까요?



둘째 단락에서는 불법의 뜻풀이입니다.

무엇을 부처님이라고 할까요? 무엇을 法이라고 할까요? 우리들은 부처님을 배우니 어째든 이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불(佛)’은 ‘불타야(佛陀耶)’의 줄인 번역입니다. 이 말은 인도의 범어를 중국어로 音譯을 한 것이며, 게다가 끝부분의 소리는 생략해버렸습니다. 중국인은 간단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주요 음인 ‘佛’자 하나만 사용합니다. 중국 고대에는 이 글자가 없었고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자 중국 사람이 이 글자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인(人) 변이 없는 弗자의 경우 弗자는 부정의 의미로 여기는데, 이 글자는 중국고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佛자는 이 弗자의 음과 서로 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자의 음을 빌려 사용하면서 사람 ‘人’ 한 글자를 더하여 새로운 글자를 하나 만들었고, 이 佛자는 불교의 전문 名詞로 변하였습니다. 그 의미는 지혜(智慧)와 깨달음(覺悟)이란 뜻입니다. ‘智’이고 ‘覺’입니다. 지혜와 깨달음이란 뜻인 바에야 사실상 그렇게 번역을 해도 되는데, 구태여 이 원래의 음을 사용하였을까요?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佛陀라는 한 단어의 함축의미가  비록 지혜와 깨달음이라 할지라도 중국의 智와 覺 이 두 글자에 함축된 의미와 같은 것은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부득이 음역하여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번역하고 난 뒤에 다시 해석했습니다.



여기서의 지혜란 보통의 지혜가 아닙니다. 일반적 해석에서는 그것은 세 가지 종류의 지혜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즉 일체지(一切智), 도종지(道種智), 일체종지(一切種智) 입니다. 무엇을 일체지라 할까요? 현대철학 용어를 이용하면 해석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일체지는 바로 우주만유의 本體를 아는 것이며, 철학가들이 말하는 本體論입니다. 여러분이 본체에 대하여  철저히 이해했다면, 이 지혜를 ‘일체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일체지는 空입니다. 萬法은 모두 空합니다. 일체만법의 體性은 眞空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지혜입니다.



두 번째 지혜는 도종지 입니다.
이는 일체만법의 현상인 森羅萬象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種이란 種種의 의미입니다. 우주간의 삼라만상은 가지가지의 법이 너무나도 많고 많아 일일이 다 열거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法들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무슨 이치에 근거해 오는 것일까요? 사람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山河大地는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우리들의 이 태양계는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별들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요? 이는 매우 높은 지혜입니다. 만일 우주일체만물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이런 것들을 모두 이해하고, 다 알고 또 틀림이 없다면, 이 지혜를 도종지라고 합니다. 앞서의 일체지에 비하여 확실히 높고, 복잡합니다.

 

세 번째 지혜는 궁극적이고 원만한의 지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일체종지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체지는 알면서도 도종지는 모르기 때문에, 또 도종지를 알고 일체지를 알더라도 여전히 원만하지는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일체지와 도종지가 원만한 것, 그것은 바로 우주전체의 생명에 대하여 모르는바가 없고 하지 못하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일체종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일체지는 羅漢이 증득하고, 도종지는 菩薩이 증득하며, 일체종지는 부처님이라야 증득합니다. 이 세 가지의 지혜는 나한· 보살· 부처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보통 관념 속의 지혜와는 다른 것임을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는 體이고, 體가 있으면 당연히 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작용은 무엇일까요? 작용은 깨달음입니다. 스스로 깨닫고[自覺]· 남을 깨닫게 하고[覺他]· 깨달음의 행위가 원만한 것[覺行圓滿], 이것을 위대한 깨달음[大覺]이라 합니다.



儒家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에 있고, 백성을 친밀히 하는 데에 있고,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데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우리들은 유가의 이 말을 自覺과 覺他와 覺行圓滿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밝은 덕을 밝힌다.’는 곧 ‘스스로 깨달음’이며, ‘백성을 친밀히 한다.’는 바로 ‘남을 깨닫게 함’이며, ‘지극한 선에 머문다.’는 바로 ‘깨달음의 행위가 원만하다’ 입니다. 이 세 가지의 명사를 여러분께 상세히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해석하려면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몽땅 쓰기에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이것은 유가와 불법이 서로 결합되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흡사합니다. 이것을 用이라고 합니다.



또 이것은 지혜의 體와 用으로 ‘能覺’이라고 부릅니다. 能이 있으면 당연히 所가 있습니다. 所覺은 무엇일까요? 바로 法입니다. 法은 불교에서의 하나의 대명사입니다. 무슨 대명사일까요? 바로 우주인생 일체만법을 총칭하는 대명사입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마음(心)과 경계(境)와 일(事)과 이치(理)를 해석하면서, 괄호 안에 우주만유의 총대명사로 法이라는 한 글자를 사용하여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法이 바로 所覺입니다.



佛法은 종교가 아닙니다.
불법은 학술이 아니며, 철학이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불법은 무엇일까요? 불법은 어디까지나 불법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철학에는 능각이 있고, 소각이 있으므로 철학입니다. 불법에도 能과 所가 있습니다만 能과 所가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매우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능과 소는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불법은 높은 단계를 말할 경우 만법이 일여하고[萬法一如], 본체와 현상이 둘이 아니며[性相不二], 마음과 부처 중생 세 가지가 차별이 없다[心·佛·衆生 三無差別]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두 能과 所가 둘이 아님을 말하는 것인데, 오늘날 철학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이 아닙니다. 불법은 철학을 포괄합니다. 불법은 철학 위에 있습니다. 철학은 불법을 포괄 할 수 없지만. 불법은 철학을 포괄 할 수 있습니다. 불법 이 두 글자를 간단히 해석하면, 즉 우리들이 일체 萬事萬法에 대하여 지혜가 있고, 정확하게 인식을 할 수 있으며, 徹底하게· 窮極的으로· 圓滿하게 이해 할 수 있는 것을 불법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불법은 끝이 없다’[佛法無邊]라고 늘 말하는데, 당연히 끝이 없습니다. 일체 만법이 끝이 없으므로 우리들의 지혜가 끝이 없습니다. 온 허공, 온 法界의 일체법에 대하여 모르는 바가 없고, 깨닫지 못하는 바가 없는 것을 佛法이라 부릅니다.



세 번째 단락입니다. 무엇을 佛敎라고 부를까요? 불교란 바로 부처님의 교육인, 佛陀敎育입니다. 중국사람은 예로부터 간략한 것을 좋아해서 불타교육을 ‘불교’라고 부르고, 陀자와 育자를 생략해버렸습니다. 불타란 ‘위대한 지혜’와 ‘위대한 깨달음’[大智大覺]이라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불타교육은 지혜와 깨달음으로서 우주인생의 교육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오늘의 불교는 우리가 이 사회에서 본 바로 서로 다른 네 가지 형태가 세간에 출현하여 있습니다. 첫 번째 형태는 전통적 불타교육입니다. 전통적 불타교육은 많지 않습니다. 세간에서는 많이 보이지 않고 매우 드물게 보인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다들 모두 잊어버리고 소홀히 해서 불교가 교육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두 번째 형태는 學術입니다. 佛學이 변해서 哲學이 된 겁니다. 이것도 상당히 많습니다. 일반 학자들이 부처를 배우면서 이런 태도를 취하는데, 모두 불교를 철학으로 삼아 연구합니다. 제가 맨 처음 부처를 배우려고 불문에 들어 왔을 때에도 이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역시 불교를 철학으로 삼아 연구하였습니다.



세 번째 형태는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넓게 퍼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교가 이미 宗敎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불교는 본래 종교가 아닌데 지금은 이미 종교로 변해버렸습니다. 이는 정말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하지만 종교로 변한 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왜냐고요? 사람들에게 그리 해를 끼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무릇 종교란 모두 迷信입니다. 불교에는 미신이 없습니다. 종교는 모두 미신적이오, 종교는 모두 감정적이어서 熱誠을 강조합니다. 불법에서는 이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불법은 이지(理智)를 말합니다. 불법은 지혜를 말하지 감정을 말하지 않습니다. 불법은 迷惑되지 않으며, 절대로 미신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불교는 본래 종교가 아닌데 현재 변해서 종교가 되었다는 것을. 그러면 우리들이 부처를 배우고 싶다면, 불타의 교육을 배울까요? 아니면 불교적 종교를 배울까요? 이는 우리가 반드시 분명하게 가려야할 것입니다.



네 번째 형태는 가장 불행 한 것으로, 최근 수 십 년 사이에 비로소 나타난 것입니다. 불교가 邪敎로 변했고 外道로 변해버린 겁니다. 法답지 못한 많은 것들이 불교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일체중생을 속이고 있는데, 여러 학우들도 때때로 들은 바가 있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문이나 잡지에서 흔히 보듯이 佛門중에서 별별 못된 짓을 다하는데, 이는 邪敎로 변합니다. 이상이 오늘의 사회에서 보는 네 종류의 다른 형태의 불교인데, 반드시 알아야 하며, 반드시 명확하게 가려야 합니다.



네 번째 단락에서는 佛法이 추구하는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불법이 불타지혜의 교육인 이상 그것은 무엇을 추구하는 것일까요? 교육의 목표는 어디에 있을까요? 여기서 여러 학우님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학의 목적은 경전에  있는 한마디로서 우리가 늘 보는 것인데. 바로 "아뇩다라샴막삼보리"입니다. 이 말 역시 범어의 음역입니다. 중국어 의미로 번역하면 ‘無上正等正覺’입니다. 여러분들이 강의 요점의 표에서 보면 곧바로 알 수 있듯이. 중국글자로 번역하면 無上正等正覺 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뒤쪽에서부터 풀이해서 먼저 정각을 풀이하겠습니다.



각(覺)이란 깨달아서 미혹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법에서는 세간의 일부 사람들 중에는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세간의 철학자· 종교가· 과학자 같은 사람들은 확실히 나름대로의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들은 상당한 정도의 깨달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법에서는 그들에게 바를 正자를 붙여 주려하지 않습니다. 바를 정자의 명패는 佛門에만 있는 것입니다. 이 명패를 그들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그는 비록 깨달았지만 올바른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야말로 正覺일까요? 정각은 불법에 하나의 기준이 있는데, 반드시 견해와 생각의 번뇌[見思煩惱]가 끊어져 다 없어져야만 비로소 정각이라고 부릅니다. 바꾸어 말하면 당신에게 만약 깨달음이 있다 할지라도 당신이 여전히 남이다[人], 나다[我], 옳다[是], 그르다[非], 탐욕[貪], 성냄[瞋], 어리석음[痴], 교만[慢]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이러한 깨달음은 정각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정각한 사람은 아집(我執)이 반드시 타파되어 없어졌고. 탐욕· 성냄· 어리석음· 교만, 견해와 생각의 번뇌가 끊어져 다했습니다. 그러므로 정각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阿羅漢입니다.



불법을 닦고 배움[修學]에 있어서, 만약에 당신이 이 성취를 얻고자 하여 진정으로 정각을 성취했다면, 당신은 학위 같은 명칭을 하나 갖게 됩니다. 오늘날 세간에서는 학교 공부를 하는데, 당신이  어느 정도까지 공부하면 학위를 하나 받습니다. 학사학위는 대학을 졸업하면 받고 대학원을 졸업하면 석사학위나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습니다. 佛法에도 학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한· 보살· 부처는 모두다 불교 안에서의 학위명칭입니다. 만약에 正覺을 증득했다면 당신은 아라한의 학위를 얻은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正等正覺을 얻었다면 당신은 보살학위를 얻은 것입니다.



正等에서의 等은 부처님과 대등하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과 대등하니 물론 아직은 성불하지 않았지요. 어느 때야 비로소 부처님과 대등할 수 있을까요?  반드시 명심견성(明心見性)해야 만이 비로소 부처님과 대등할 수 있습니다. 명심견성에 이르지 못했다면 당신이 어떠하더라도 부처님과 대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마음 씀은 범부 심지어 아라한과도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라한 이하는 모두 팔식(八識: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 末那識· 阿賴耶識)을 씁니다. 우리 범부들은 팔식을 씁니다. 부처님은 팔식을 쓰지 않고 팔식을 전환하여 네 가지 지혜를 이루어[轉識成智] 명심견성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쓰는 것은 진여본성(眞如本性)입니다. 즉 진심(眞心)을 쓰는 것입니다. 아라한 이하는 망심(妄心)을 씁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만약에 진심을 쓸 수 있고 더 이상 망심을 쓰지 않게 되었다면, 부처와 대등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등정각이라고 부릅니다. 정등정각에 이르면 당신이 얻은 학위는 보살입니다. 보살은 정등정각입니다.



그래서 닦고 배움이 절정에 이르러 그 보다 더 이상 높은 것이 없다면 보살이 졸업하게 됩니다. 그 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것을 無上正等正覺이라고 부르고, 그 보다 더 위가 것이 없는 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佛門에서 말하는 불타· 보살· 아라한은 불교교육에서의 세 가지 등급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 등급의 성취에 이런 명칭을 주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다음으로는 간단히 총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즉 깨달음(覺了)입니다. 각(覺)이란 결코 미혹하지 않는 것 이오, 료(了)란 분명하게 아는 것 입니다. 즉, 우주 인생의 실상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오, 우주 인생을 온통 이해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불법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이고 원만한 지혜입니다.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궁극적이고[究竟] 원만한 지혜가 우리들의 본래능력[本能]이지 밖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니라고 일러줍니다. 만약 밖으로부터 얻은 것이라면, 바꾸어 말해 사람 저마다 꼭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부처님은 말합니다. 이 지혜는 우리들이 모두 가지고 있다고. 바꿔 말하면, 사람마다 모두 부처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불법·불교교육에서 항상 제시하는 것입니다. 《화엄경》에서 말하기를, “일체 중생에게는 모두 여래의 지혜와 덕상이 있다[一切衆生皆有如來智慧德相]”고 합니다. 당연히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에서 마명보살은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본각은 본래 있다[本覺本有]” 본각은 무엇일까요? 본래의 깨달음인 無上正等正覺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本覺이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불각본무[不覺本無]라, 불각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불각이란 우리가 지금 미혹한 것입니다.



무엇을 미혹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들의 本覺을 미혹한겁니다. 우리들 자신의 무상정등정각을 미혹하고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것이지만 진정으로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언제가 당신이 깨달으면 당신의 지혜는 즉시 회복됩니다. 당신의 지혜가 회복된 후에는 시방제불(十方諸佛)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화엄경》과 《원각경》에서 바로 이 사실의 眞相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일체중생이 본래 成佛이라고요. 그러므로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절대적인 평등입니다.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하늘을 머리에 이고 대지에 우뚝 서는[頂天立地]’ 人間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成佛이란 바로 구경원만한 지혜를 성취한 것입니다. 즉 우리들이 우주사이의 일체만사만물에 대하여 모두 분명하게 아는 것을 성취한 것입니다. 불법이 추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불법은 종교와는 다릅니다. 종교 안에서는 반드시 우주를 주재하는 神明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법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모시는 것은 우리들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은 스승을 기념하는 의미이지 신명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살을 공양하는데, 보살은 우리들보다 시기가 빠른 선배입니다. 그 역시 부처님의 학생입니다. 보살은 우리 앞에 있는 학생이고 우리들은  뒤에 있는 학생입니다. 우리와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과의 관계는 同學관계입니다. 보살은 우리 보다 앞서 배웠고 우리는 그 보다 뒤에 배우고 있습니다. 보살은 우리들의 나이 많은 선배입니다. 이런 관계입니다. 당연히 나이 많은 선배이기에 학문과 지혜는 우리들보다 훨씬 높습니다. 보살에게는 우리를 가르칠 능력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분을 선생님으로 여겨도 좋습니다. 그러나 보살 역시 석가모니불의 제자이고 우리 역시 본사 석가모니불의 제자입니다. 우리들은 실제상으로 동일한 스승이 가르치는 同學입니다. 일체의 보살은 우리들과 동학이요 부처님은 우리들의 스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처님이라고 부를 때 부처님을 근본스승[本師]라고 부르고 우리들은 제자라고 합니다. 제자는 학생입니다. 우리와 부처님과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입니다. 단지 교육에서만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알고 났으니 더 이상 미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단락은 불교의 敎學방침으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불교교학의 방침은 철저하게 미신을 타파하는데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아서 미혹하지 않고, 철저하게 미신을 타파하여서 바른 지혜를 열어줍니다. 그리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분명하게 가릴 수 있도록, 즉 명료하게 알 수 있도록 해줍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우주인생의 일체만법이 어느 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분명하게 이해하고 가릴 수 있도록 해줍니다. 어느 것이 바른 것이고 삿된 것인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어떤 것이 이로움이고 해로움인지, 당신이 변별할 수 있어서 이런 것 모두를 분명하고 명명백백하게 하는 것, 이것을 부처를 배운다고 하며 결코 전도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대단히 위대하고 또한 매우 얻기 어렵고 소중합니다.



이지(理智)를 세우는 것이지 감정이 아닙니다. 위대한 깨달음이지 미혹이 아닙니다. 분발함이지 게으름이 아닙니다. 진취적이고 낙관적이며 향상적이며, 자비로 세상을 구제하는[慈悲濟世] 인생우주관입니다. 《무량수경》에서 진실한 이익으로서 혜택을 주는 것을 우리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진실한 이익이고  원만한 大乘으로서 중생일체의 고난을 해결해 줍니다. 생사문제 조차도 해결할 수 있으니 그 나머지는 모두 작은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육도 윤회를 초월하는가, 어떻게 무상정등정각·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증득(證得)하느냐 입니다. 이것이 크나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세간의 작은 문제는 하찮은 일이어서 말할 가치가 없습니다. 크나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하물며 작은 문제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진정으로 이해해야 하고 배우려고 해야 합니다. 이 한 몸의 능력을 배우고 나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하나도 없으며, 진리·선·아름다움·지혜[眞 善 美 慧]인 영원한 幸福이라는 교육목표를 이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정으로 알아야 합니다. 불교 교학의 목적 목표는 닦고 배움[修學]과  상호 관련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그러므로 불교는 종교를 초월합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과거에 천주교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그 대학의 대학원생들은 모두 신부나 수녀였습니다. 제가 기독교 신학대학에서 수업을 하면서 그들에게 三寶에 귀의해서 불교를 잘 배우라고 권했습니다. 왜냐고요?  불교를 배운다고 절대로 그들의 종교에 위배되지 않으니까요.  예컨대 당신은 기독교를 믿으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대 오늘 삼보에 귀의해서 佛門에서 부처를 배우면 당신은 석가모니불의 학생이 됩니다. 석가모니불의 학생이란 점과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서로 모순 되지 않아요! 당신이 집에 있을 경우에는 부모님이 계시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계시므로, 자신이 학교에 와서 공부 하는 것이 부모를 배반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곳에 옴은 배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불교에 와서 배움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말하기를, “이 자녀는 착하고 괜찮은데 안타깝게도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라고 할 겁니다. 만약 불문에 와서 불타교육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은 아주 영예로울 겁니다. 자신의 어린애가 가장 지혜 있는 석가모니부처의 학생이라며 하느님의 얼굴도 영예로울 겁니다. 어떤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불교의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도 종교로 변하게 한다면 충돌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불교를 배우면 마치 자신의 종교를 위반한 것처럼 여기는데, 만약 여러분들이 불교란 석가모니불의 교육임을 알고서 바꾸어 말하면, 이 문제는 해결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어떠한 종교와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국가·사회와도 충돌하는 일이 없습니다. 불교교육이 추구하는 것은 진리眞· 선善· 아름다움美· 지혜慧로서 영원한 행복이라는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께 묻겠습니다. 당신이 종교를 배우면서 이것을 추구 하겠습니까 추구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추구하고자 하면 지혜가 없으면 안 됩니다. 지혜가 없으면 가려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불교가 어찌된 일일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배척하는데, 왜 그럴까요? 불교에 대해 무지하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두 손 합장하고 꾸벅꾸벅 절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이런 것은 종교적인 미신불교입니다. 그러기에 불교는 미신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절에 가서 보면 정말로 미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불교를 배웠고, 귀의했고, 심지어 계율도 받았으니 물어보겠는데, 여러분들은 미신을 믿습니까? 믿지 않습니까? 미신을 믿습니다! 불교가 뭔지도 모르고, 무엇을 닦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배우는지도 역시 모르는데, 어찌 미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남들이 우리더러 미신을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대꾸할 방법이 없습니다. 미신하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분명히 알지 못하면 불교를 받아들일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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