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법문은 정병조 선생님의 말씀을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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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많으면 빗나가기 쉽고,
본의 아닌 실수도 저지르는 법이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지만, 모자라는 것이 넘치는 것보다는 낫다.
불교는 언제나 언어의 절제를 강조하여 왔다.

십악(十惡) 가운데서 언어에 대한 금계조항이 4가지나 된다.
망어(妄語).악구(惡口).양설(兩舌).기어(綺語) 가운데서
특히 요즘에 문제되는 것은 악구다.

험담이나 욕지거리를 가리키는데,
그 정도가 지나친 것이 한국사회이다.

여야간의 가시돋힌 험담,
이권을 두고 싸우는 욕설 등이 난무한다.

나쁜 언어를 경계해야 하는 까닭은
남에게도 상처를 주지만
결국은 스스로의 인격을 깎기 때문이다

〈법구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입안에 도끼를 갖고 태어난다. 이 도끼로 남을 해치고, 스스로를 해친다.”

특히 지식인이라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이 악구의 폐해가 심하다.
남을 비판하는 일은 천재적이지만, 스스로를 향한 비판은 무디기 그지 없다.

사실 비판은 스스로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초기불교의 수행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도 이 언어의 절제였다.

선종에서는 이 극치를 묵언수행이라고 한다.
대략 1년이고 2년 정도의 기한을 정하고 시작하는데,
남에게 불편을 끼칠까봐 목걸이에 묵언수행중이라고 써 붙이기도 한다.

부처님은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들여 보였다.
불이(不二)의 참뜻을 묻는 문수보살에게 유마거사는 ‘침묵’으로 답변한다.

그 바다같은 고요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또 하나의 수행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침묵한다고 해서 시비를 가릴 능력조차 없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 시비의 피안을 넘어선 곳에 있는 초월성이 바로 침묵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현란한 수사(修詐)의 테크닉만 배울 일이 아니다.

오히려 침묵할 줄 아는 지혜,
조용할 줄 아는 예절을 배워야 할 줄 안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많을까하노라던 사바에서 불교는 바로 그 침묵의 공간이다.

침묵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을 뿐더러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진실을
그윽히 관조하기 때문이다.

그 진정한 자유야 말로 수행의 기쁨이다.

정병조/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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