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귀신 이야기들

 

 귀신은 있는가? 어떤 존재인가? 어떻게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는가? 귀신이 들린다는데 이는 교학적으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귀신 또는 마귀를 쫓아내는 퇴마의식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내재한 것을 한 마디로 잘라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하나하나 풀어보면 그 또한 중요한 의미들을 속에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모든 사상이 다 그렇듯이 귀신에 관한 것도 지금 이 순간에는 여러 나라, 여러 시기, 여러 종교와 전통에서 생겨난 것을 몇 마디, 몇 문장, 몇 편의 논문으로 재단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이 글에서는 여러 전거들을 통해서 귀신을 바라보는 시각을 정리해 보고 그것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수용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고자 한다. 우선 귀신은 있는가를 이야기 해보자. 우리 절에서도 나를 제외한 많은 이들이 귀신을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왜 그들에게만 나타나고 나에게는 안 나타나는가? 그들은 보는데 왜 나는 못 보았을까? 나에게는 안 나타났을까? 나타났는데도 나는 못 보았을까? 이런 의문들이 많다.

  군인이 죽어서 천도염불을 했는데 무엇인가 모자라서 음계(陰界)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내의 꿈에 나타나서 어느 곳에 가서 염불을 해달라고 하면 정성들여 해 줄 것이라 했다. 적은 돈을 가지고 갔는데 돈은 살피지도 않고 정성껏 염불해줘서 돌아왔더니 그날 밤 꿈에 죽은 남편이 나타나 음계를 벗어났다며 고마워했다. 그렇게 염불의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무주상(無住相)의 염불을 공염불(空念佛)이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명대의 선승인 운서 주굉(株宏)의 죽창수필(竹窓隨筆)에 나오는 이야기다. 여기서의 귀신은 자기의 천도를 부탁하고 결국 극락에 가는 존재이다. 이렇게 살아있던 존재의 영혼이 귀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자기와 인연이 있는 존재에게 달라붙어 그를 결과적으로 해친다는 것이 귀신론의 중요한 테마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른 이의 영혼이 붙어서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빙의(憑依)가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신약성서에서 사람들에서 쫓겨나온 귀신들이 돼지떼에게 숨어들어가 결국 돼지들을 죽게 하는 일이 있듯이 퇴마사들에게 쫓겨나온 혼들이 다른 빙의된 또는 신내림을 받은 사람들에게 곁붙어 사는 바람에 아주 힘들어 하는 이들이 또 있다고 한다

그것을 그들은 허주(虛主)라고 부른다. 불교와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먼 이론인데 불교 승려나, 불교인임을 내세우는 퇴마사 등이 이런 일을 함으로써 불교적 견해임을 내세우기도 한다.

 

 2. 귀신은 있다고 보아야 하나?

 

 지관보행전홍결(止觀輔行傳弘決) 권2(대정장 46,p.195c)에서는 귀신이 없다고 보는 이를 나무란다. 예부터 성현들이 모두 귀신이 있다고 하는데 왜 혼자서 귀신이 없다고 하느냐고...

 그 이야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귀신의 존재에 관해서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이 많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도의 마명은 대승기신론(대정장 46,p.582b)에서 “선근의 힘이 없으면 모든 마구니와 귀신들에 의하여 어지럽게 되니 혹은 어떤 형체를 나타내어 공포를 일으키게 하거나 남녀 등의 모습을 나타낼 경우 오직 마음뿐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계가 곧 없어져 뇌란(惱亂)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자신의 상태를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명상을 진행하여 선정 가운데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 중 하나가 귀신이라고 말한다. 즉 마구니는 마귀를 말하며 귀신과 비슷한 존재이지만 수행을 방해하는 것을 마구니라고 하며 그들의 대장을 마왕이라고 한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회본 권6(한불전1.p.784a~c)에서 “모든 마구니라고 한 것은 천마(天魔)요, 귀는 퇴척귀(堆?鬼)요, 신이란 정미신(精媚神)이다. 이런 마구니와 귀신들이 세 가지의 오진(五塵)을 지어 선한 마음을 깨뜨린다. 첫째, 두려워할 만한 일 둘째, 사랑할만한 일, 셋째, 위(違)도 아니고 순(順)도 아닌 마음을 내어서 어지럽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두렵게 하고 애착에 빠지게 하고 하는 일의 순서와 갈 바를 모르게 하여 갈팡질팡하게 하는 것을

 귀신들의 작용이라고 하였다.

 

 3.귀(鬼),아귀(餓鬼)?

위에서도 대강 알 수 있듯이 근본적으로 귀(鬼)와 신(神)은 다른 존재이다.

 귀(鬼)는 아귀(peta)의 줄임말로 육도 중생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아귀를 뺀 5도만을 설정했으나 뒤에 6도로 정리되었다. 귀는 폐귀(弊鬼),아귀,유위덕귀(有威德鬼),무위덕귀(無威德鬼)로 나누거나 다재(多財).소재(少財).무재(無財)아귀로 나뉜다. 공포스럽고 기괴한 모습을 하고 염라왕계에 살고 있다. 순정이론(順正理論)권31(대정장29,p.517b~c)에 거구귀(炬口鬼),침구귀(鍼口鬼),

 취구귀(臭口鬼)는 무재귀에 속하고, 침모귀(鍼毛鬼), 취모귀(臭毛鬼), 영귀(?鬼)는 소재귀에, 희사귀(希詞鬼), 희기귀(希棄鬼), 대세귀(大勢鬼)는 다재귀에 속한다고 한다. 구사론에서는 귀의 출생방법이 태생(胎生)과 화생(化生)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기갈이 많아서 아귀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간탐(?貪)을 하게 되면 아귀취에 떨어지게 된다.

 신(神)은 여러 가지 능력을 지닌 특별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의 개념처럼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고 정령과 비슷한 존재로 볼 수 있다.

 붓다의 열반(죽음)을 다룬 경전인 般泥洹經 권하(대정장1.p190a)에는 “천룡.귀신왕.천악신.질량신.금시조신.애욕신.사구신이 앞에 나와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 돈 다음 한족에 머물렀다”고 하여 귀신의 왕이 등장한다. 그리고 귀신들이 살아있는 부처님 앞에 와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灌頂經 권1(대정장21,pp.495~499b)에 부처님께서 악마, 도둑, 독룡 등에게 핍박받는 비구들을 보고 172귀신왕의 이름과 공덕을 설하면서 이 귀신왕을 믿으면 모든 불안을 없앨 수 있다고 하여 오히려 그를 신앙하게 하는 혼란도 가져온다. 어쩌면 거기에 불교의 특성이 있기도 하다. 모든 것이 특질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라고 할만한 현재의 상태를

 바꾸면 다른 것으로 된다는 사상이 무아(無我)이므로 귀신왕을 믿게 하여 불안을 없앤다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는 밀교(密敎)의 사상이다.

 잡아함경 권5(대정장 2,p.36a)에서는 불교를 호위하는 신들의 하나인 금강력사를 귀신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귀신의 우두머리를 법원주림에서는 귀장(鬼將)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귀신 군대의 대장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귀신의 존재는 믿으면 있고 믿지 않으면 없다고 보아도 되는 신념의 문제로 등장한다. 귀신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느냐 즉 개념에 따라 의식과 믿음도 달라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귀(鬼),귀신(鬼神),마(魔),마왕(魔王)?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자유자재한 존재를 말한다. 사람과 다른 존재에 도움을 주는 선한 귀신과 해악을 기치는 악한 존재가 있다. 세상을 수호하거나 불법을 호지하는 존재로 대범천왕,33천왕,사천왕,염마왕,난타용왕,발난타용왕 등이 선한 귀신으로 분류된다. 나찰(羅刹)은 악한 귀신이다. 나찰은 붓다의 전생 수행자 시절에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게송(偈頌)을 들려주고 잡아먹으려했던 존재이기도 하다. 야차(夜叉)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건달바,야차,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 등도 귀신으로 분류한다. 귀신팔부는 야차,나찰,구반다,비비사,부단나,구귀,건달바,용을 말한다. 이는 천룡팔부처럼 신중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즉 귀신의 개념이 많이 혼재하고 발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귀신은 마(魔)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魔)mara의 줄인 음사어. 마(磨)로 쓰다 양 무제 때 마(魔)로 쓰기 시작했는데 달마대사를 높이는 예라 하겠다. 대지도론 권5(대정장25,p.99c)에 혜명을 빼앗고 도법을 수행하고 공덕을 쌓고 선의 뿌리를 개발하는 것을 무너뜨린다. 대지도론 권5(대정장25,p.99b)에 “마에 네 가지가 있다. 번뇌마, 음(陰)마, 사(死)마, 타화자재천마가 그것이다. 앞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은 좋은 마음을 방해하는 것으로 이해하겠는데 또 타화자재천이라는 하늘의 왕이 마귀라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그것을 이해하려면 불교의 세계관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불교의 세계관은 본래 우주관 속에 들어있는 시간관을 갖춰야 온전하다. 그래서 3세(三世) 3계(三界)라고 한다. 3세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말한다. 3계는 존재들의 의식 수준을 나타내는 우주관으로서 욕심의 세계인 욕계(欲界),물질의 세계인 색계(色界),정신의 세계인

 무색계(無色界)를 말한다. 욕심의 세계는 욕심을 가진 존재들이 육체를 가지고 사는 세계이다. 색계는 육체만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사는 세계다. 무색계는 육체는 없고 정신만을 가진 존재들이 사는 세계다. 의식수준을 명상(참선 등)을 통해 고양하여 욕심을 제거하고, 물질을 제거하고....하면 보다 더 나은 수준의 세계에 살 수 있다는 것이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의 세계관이다. 이 가운데 욕심의 세계인 욕계는 여섯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이다. 이 가운데 지옥의 중생, 아귀의 중생 그리고 수라의 중생과 천상 중생의 일부가 귀신이라고 할 수 있다. 천상은 욕계와 색계, 무색계에 걸쳐서 잇는데 욕계에는 6개의 하늘이 있고, 색계에는 18개, 무색계에는 4개의 하늘이 있다고 한다. 욕계의 하늘이 4천왕천,도리천,야마천,도솔천,화락천,타화자재천이다
타화자재천이다. 이 타화자재천의 왕이 타화자재천왕인데 그 유명한 마왕 파순(魔王 波旬:papiyas)이라는 것이다. 혹은 타화자재천 위에 마왕궁이 있고 여기에 별도로 사는 존재라는 설도 있다. 이 파피야스가 붓다의 성도를 방해한다. 깨달음을 이루기 직전에 나타나 군대를 동원해서 방해하고, 세 딸을 이용해 방해하지만 붓다는 그것을 극복한다. 세 딸은 탐심, 진심, 치심이라는 설도 있고 그 자체가 이성을 그리워하는 음욕(淫慾)이라는 설도 있다. 음욕이 강한 존재가 얻는 과보는 능엄경(楞嚴經)에 마왕, 마민, 마녀로 태어난다고 하였다. 마왕은 음욕 또는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명예욕을 그렇게 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붓다가 나타나면, 수행자가 도를 이루어 붓다가 되려고 하면 마왕의 궁전이 흔들리고, 햇빛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게 된다는 설도 또한 깨달음의 반대편에 있어서 서로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어둠과 빛이 서로 만나지 않고, 번뇌와 깨달음이 만나지 않으며, 상사화의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설령 그들이 함께 있다고 할지라도 내용과 형식이 확실하게 바뀌어야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혁범성성(革凡成聖)이라고 하는 것이다.

 

 5.현실에 나타나는 귀신?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귀신은 그런 귀신이 아니다. 그냥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죽어서 다른 좋은 곳(예를 들면 극락)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주변 사람 또는 관계없는 사람에게 붙어서 몸을 아프게 하든지, 일이 안되게 하든지 하는 해코지를 하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존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1)아귀(餓鬼)

 우선 초기불교의 교학으로 보면 아귀(餓鬼)의 존재가 나타난다. 다음 생으로 태어날 힘을 가지지 못한 존재를 말한다. 배고픈 귀신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배불리 먹어야 다른 몸을 받아서 태어난다. 그것이 불설염구아귀경 등에 나타나는 아귀의 모습은 무섭고 입에 먹을 것을 가져가면 먹을 것이 불로 변하여서 입과 목구멍 등을 데게 해서 먹을 수 없게 되어
괴로움을 받는 존재이다. 숲 속에서 선정에 들려 하던 아난다존자에게 입에서 불을 뿜는 아귀가 나타나서 하룻밤에 한 섬(두 가마)의 밥을 해 먹이면 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 안심하자 아귀가 나 말고 저렇게 8만 4천 마리가 있는데 그들도 또한 두 섬씩의 밥을 해 주어야 한다고 하자 낙심하고 부처님께 도움을 청한다. 부처님은 한 그릇의 밥을 짓게 하고 ‘변식진언(變食眞言)’을 통해 우리가 먹는 밥을 아귀 즉 귀신이 먹는 밥으로 변하게 하고, 한 그릇으로 두 섬을 먹는 8만 4천 마리의 아귀를 배불리 하게 하기 위해 ‘시무차법식진언(施無遮法食眞言)‘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즘 우리가 말하는 49재, 천도재의 밥을 베푸는 의식(施食)의 교학적 근거이다. 그래서 시식문을 보면 배고픈 귀신에게 부처님의 법력을 빌어

 귀신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바꿔서 베푸는 내용이 나온다. 그럴듯한 표현이지만 초기불교의 교학이나 나의 부모 또는 스승이나 수행을 한 스님들에게도 같은 내용으로 시식문을 읊는 것은 상당한 모순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추모법회의 형식으로 바꿔서 해야 한다고 본다. 밥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불보살님에게 하듯이 공양을 올리는 내용으로 바꿔야 하는 것이다. 다만 아귀는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할 때 무서운 모습을 보여 그것을 본 중생이 두려움에 떨게 할 뿐 직접적으로 해꼬지를 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중음신(中陰身)

 또 하나는 우리 중생들의 삶의 변화하는 모습이 태어나는 것은 생유(生有),살아가는 모습은 본유(本有),죽는 것은 사유(死有)라고 하며,죽은 뒤 다른 존재로 생유하기 전에 머무는 단계가 있는데 그것을 중유(中有)라고 하는데 이 중유 즉 중음신(中陰身)을 귀신이라고 한다는 설이다.

 중유는 범어로 antara-bhava라고 하여 중음, 중온(蘊)이라고도 하는데 중간존재라는 뜻이 가장 가치 중립적이라 할 것이다. 즉 전세의 죽음의 순간으로부터 다음 생의 태어나는 찰나에 이르기까지의 중간 시기의 존재인 영혼신(靈魂身)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구사종(俱舍宗)에서 확립한 개념으로 구사론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대개 죽은 영혼이 다음 생에 태어나기 전의 칠칠일(7×7=49일)을 중음이라 한다. 아주 착하거나 악하면 다음 생을 바로 받아서 중음을 경험하지 않지만 보통의 영혼은 중음으로 있는 동안 다음 생을 결정받는다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의 몸은 그 모양이 동자의 형체와 같으며 반드시 7일을 1주기로 삼아 본생처에 태어난다. 만일 7일이 지나도 몸을 받지 못하면 다시 7일의 중음기간이 지난 14일에 가서야 본생처에 태어난다. 이렇게 7일을 주기로 하여 길게는 7기까지를 다 활용해야 다음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49재를 지내는 것이다. 이는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때에 천도하는 것을 중음법사(法事)라고 하며 그 때의 이야기와 설하는 내용을 담은 경이 중음경(中陰經)이라 한다. 우리나라에는 유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중음신이 어떤 경우는 몇 달,몇 년 또는 몇 백 년이 간다는 설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현대의 퇴마사들의 이야기이다. 불교적으로는 맞지 않는 설이며 불교에서도 초기불교에서는 중음의 시간이 없거나 다음 생으로 연결하는 의지(再生連結識)의 힘이 약한 것으로 생각되는 아귀만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귀신으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구사종 이후의 티베트와 중국, 한국 등의 불교에서 그리고 우란분경(盂蘭盆經), 지장경(地藏經) 등의 위경으로 생각되는 경전에서 그 지역의 토착사상과 관련된 사고들이 작용하여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중음신은 나의 중음신이 아니라 조상 또는 관계자들의 중음신이다. 다만, 불교 세계관의 특성상 식별하는 존재의 의식수준이 그의 존재양태를 결정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딱 잘라 말하기는 좀 뭣하다.

 빨리어로 널리 표현되지 않는 것은 뒤에 등장한 개념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귀신은 기운이 없고 배고 고픈 존재인 아귀, 여기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지옥에서 고생하는 존재들, 축생과 수라의 일부, 하늘에 사는 천신들 중 일부를 이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6. 귀신은 어디에 사는가?

 

 그럼 귀신은 어디에 살까? 무덤가에 살까? 공동묘지에? 빈집에?

 범망경(梵網經) 권하(대정장24,p.1004b)에 “귀신의 물건이나 주인이 있는 물건 뿐 아니라 도둑질당한 물건 등 일체의 재물은 바늘 하나 풀 한포기라도 도둑질해서는 안된다.”는 표현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불교에서는 불교의 대중이 지켜야할 규범을 설정한 율장(律藏)에 귀신이 사는 곳을 설명하고 있다. 귀신의 물건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 신라의 의적(義寂)스님은 그의 菩薩戒本疏 권상(한불전2,p.265a)에서 귀신이 주인인 물건은 신묘(神廟)인 사당(祠堂)에 있는 물건으로 관리는 사람이 하지만 실질적 용도는 귀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鬼神村은 귀신들이 의지하여 살고 있는 곳으로 모든 풀과 나무를 말한다. 사분율 권12(대정장22,p.641c)에 비구로서 귀신촌을 파괴하는 자는 바일제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귀신이 살고 있는 귀신촌인 풀과 나무를 함부로 베는 것은 계율을 어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귀신이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의 귀주처(鬼住處)는 瑜伽論記 권1,(한불전2,p.426b) “귀주처란 염라왕이 있는 곳을 본처로 삼는다. 염부제 아래로 500유순의 깊이에 큰 국토가 있으니 가로와 세로가 500유순이 된다. 이 본처로부터 여러 곳을 흩어져 다닌다. 大毘婆沙論에 염부제의 서남쪽에 500개의 귀성이 있는데 반은 고통을 받고 반은 즐거움을 받는다.”라고 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남섬부주의 아래이니 주로 땅 속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러 곳을 흩어져 다닌다고 하여 없는 곳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주로 땅 속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기도 하다.

 귀처(鬼處)라고 해서 5취의 하나로 귀신들이 사는 세계를 나타내는 용어인데 여기에는 아귀, 구반다, 야차, 나찰사, 갈타포달나 등이 산다.

 

 

 7.수행과 귀신

 

 귀신은 수행자의 수행을 방해한다고 한다.

 귀점오처(鬼?五處)라는 말이 있는데 귀신이 두 손,두 발,머리에 달라붙어 수행자의 정진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종교인 불교의 가르침은 이 또한 좋은 것으로 바꾸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大智度論 권16(대정장25,p174b) 붓다가 상인으로 태어났을 때 나찰귀가 나타나 다섯 곳에 달라붙어 정진하는 마음을 쉬라고 하자 다섯 곳 다 못 움직여도 정진하겠다고 하자 담력과 정진력의 뛰어남을 기뻐하면서 쉬지 말고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수행정진을 방해한 귀신이 오히려 정진하는 힘에 감동하여 더욱 열심히 정진하라고 당부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삿된 견해에 빠지는 것을 귀가(鬼家) 또는 귀가활계(鬼家活計)라 한다. 귀신의 집, 귀신이 살려고 하는 계책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을 귀굴리(鬼窟裡)라고 한다. 흑산귀굴(黑山鬼窟)도 마찬가지이다. 참선하여 마음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마치 흑산귀굴에 사는 것과 같다. 귀신이나 도깨비가 조화를 부려서 일으키는 재난, 질병은 귀난(鬼難), 귀병(鬼病)이라 부르고,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는 것을 귀해(鬼解)라고도 한다.

 그런데 똑 같이 쓰고도 뜻을 다르게 하는 재미있는 경우도 있다.

귀안정(鬼眼睛)은 귀신의 눈동자라는 뜻으로 그릇된 안목을 말한다. 이는 碧巖錄 5칙(대정장48,p.144c)에 나오는데 雪峯이 대중에게 “나는 지금껏 귀신의 눈동자를 굴린 적이 없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귀신의 눈동자를 굴린 적이 없고 선사, 부처의 눈동자만을 굴렸다는 것인데 똑 같은 귀안정(鬼眼睛)이 그릇된 안목이 아니라 바른 안목으로도 나온다. 通玄百問(卍속장119,p.343b)에 나오는 이야기다. 밝고 밝아서 어둡지 않고 분명하게 아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귀신의 눈동자이니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귀신같이 안다고 할 때의 그 귀신이다. 엄밀히 말하면 신처럼 안다는 것이다.

 귀쟁칠통(鬼爭漆桶)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귀신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통 속을 더듬는다는 말이다. 남원(南院)선사의 법어에 나온다. 그렇듯이 쓸모없는 이론에 매달려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으로 귀편고시(鬼鞭故屍)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죽어서 육신을 떠난 귀신이 자신의 몸을 때린다는 말이다. 經律異相 권46(대정장53,p.244)에 나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혼이 돌아와 자기 시신을 때렸다. 물으니 악한 일을 하고 경이나 계율을 보고 읽지도 않았으며 5계를 범하고 결과적으로 나를 악도에 떨어뜨렸으니 때린다고 했다.

 귀포목(鬼怖木)-버드나무 귀신을 쫒아내는 효험이 있는 나무. 灌頂經의 禪提스님이 쓰던 버드나무 가지인데 지금도 쓴다. 토정 이 지함은 그 나무로 맞아 죽었다.

 밤마다 꿈에 나타나 성적 자극을 해서 몸과 정신이 피폐해진 스님의 이야기도 지대방에 떠돈다. 하지만 의상대사를 도왔던 선묘의 이야기처럼 수행을 돕는 경우도 없지 않다.

 초기불교의 교훈적인 이야기 가운데 귀신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꽤 있으나 귀신 또는 귀신의 자녀들의 어머니로 대표성을 띄며 처음에는 어린 아이들을 잡아먹는 흡혈의 흉악한 귀신이었다가 나중에는 아이 낳는 것과 낳은 아이를 보호하는 신이 된 귀자모신이라는 재미있는 신 이야기도 있다. 鬼子母神은 귀신왕 반고가의 부인. 5백명의 자식을 두었다. 성질이 나쁘고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포악한 귀신이었으나 부처님의 교화를 받아 출산과 아이를 보호하는 귀신이 되었다.

 有部律雜事권31(대정장24,pp.361c~362c),摩訶摩耶經 권상(대정장12,p.1006c),鬼子母經(대정장21,pp.290c~291c)

 8. 귀신도 교화의 대상

 

 불교의 귀신에 관한 개념 및 사고는 일정한 틀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귀신에 관 한 것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 관해서도 일반이다. 왜냐하면 붓다가 맨 처음 설한 가르침이

 중도(中道)의 사상이고 중도는 바른 길을 의미하며, 그 사상적 배경은 연기(緣起)인데 연기성은 그 자성이 없다는 것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두 번째 가르침의 주제를 무아(無我)로 하였던 것이다. 자기라고 할 만한 특질이 없는데다가 시간이 흘러갈수록 변화해 가므로 무상(無常)하여 그 절대적 특질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것대로 스스로 존재가치를 느끼면 그만이다. 불교의 우주관은 시공간적 우주관이기도 하지만 의식 수준의 세계관이기도 하여 스스로의 의식 수준에 따라 달리 인식되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그 속에 존재하는 것들에 관한 인식도 도한 마찬가지이다. 지관보행전홍결(止觀輔行傳弘決)에서처럼 꼭 있다고 보아도 그 도한 하나의 시각일 따름이고, 마명이나 원효처럼 인식대상에 관한 인식작용의 하나 즉 마음작용일 다름이라고 보아도 또한 그대로 작용할 것이다. 마치 연암 박 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진술하였던 것처럼 비가 와서 물이 엄청나게 많이 불은 강물을 낮에 건널 때는 용이 나타나서 잡아먹을 듯하더니, 밤에 건널 때는 귀신의 울부짖는 소리가 귀청을 때리고 마음을 혼란하게 하였던 것처럼 어찌 보면 낮의 용이나 신이 밤의 귀신이나 아귀로 변하는 것 도한 자성 없음(無自性)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붓다가 수행자 시절에 만났던 귀신같은 존재들이나 성도의 고비 마지막 밤에 만났던 마왕 파순(타화자재천왕)도 스스로 물러났을 뿐 붓다의 공격에 의해 상처를 입거나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불교적 특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불교의 이론에 의하면 귀신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설사 수행과 존재들의 평화로운 삶을 방해하는 못된 일을 한다고 해도 그들은 없애야 할 존재들이 아니라 그들의 상태를 좋은 것으로 바꿔야할 존재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교단적으로 귀신을 정리하거나 귀신들의 왕 또는 마귀나 마왕을 처단하는 등의 독단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율장에 그들이 산다고 하는 풀과 나무를 함부로 베거나 불태우지 못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요즘의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으로 작용한다. 즉 낮은 수준의 존재가 귀신이므로 우리 스스로 수행을 통해 존재의 위상을 업그레이드 하듯이 그들에게도 그런 기회를 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귀신의 존재를 과장하거나 조상 또는 가족의 영혼이 제대로 천도되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하여 마음이 굳세지 못한 이들에게 엉뚱한 경험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조상님에 대한 천도재는 앞으로 추모법회로 그 의미를 높여서 지내야 할 것이며 본래 재(齋.uposadha)의 의미를 살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병 또는 귀신과 관련되었다고 하는 이들에 대해서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는 경우에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할 것이 못 된다는 것 또한 고려해야 한다. 아울러, 고백컨대 내가 따르고 있는 종교가 또는 내가 무엇이든지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자긍심은 좋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며 겸손하기를 다짐해 본다. 


-법현스님글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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