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봉착한 문제 중에서 가장 심각했던 것은 효와 예의 문제였다. 그 중에서도 효의 문제는 인도문화와 중국문화라는 피할 수 없는 문화적 충돌이라는 점에서 양보할 수 없는 갈등이기도 했다.

수행을 중시하며, 출가자를 다른 무엇보다 존중했던 인도문화는 가정을 중시하며 가족중심의 윤리를 존중하고 있던 중국 전래의 가족문화와 충돌하게 된다. 그것이 사회문제로 표면화된 것이 바로 효를 둘러싼 보수층과 불교계의 갈등이었다. 그리고 전래 당시 효를 둘러싼 문화적 충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이혹론〉의 저자 모자라는 사람이었다.

중국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고유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유교나 도교로 대표되는 중국전통문화는 그 사상적 깊이도 심원했을 뿐만 아니라 광범한 지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농본사회를 배경으로 성숙한 이들 문화는 가족주의를 발달시키게 되며, 그 핵심에 효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효의 개념은 촌락공동체가 중심이 될 때는 촌장을 중심으로 하는 충의 개념으로 확대된다. 나아가 국가공동체의 등장은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충의 개념을 정립한다. 충효의 개념은 그 사상적 뿌리가 하나인 것이다.

중국전통사상인 효의 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효경이다. 거기서는 “신체와 발부(髮膚)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므로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끝”이라 말한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나의 손과 발을 내보아 상처가 있나 없나 조사해 주기 바란다”고 말하는데 효도론에 입각해 자식된 도리를 점검한 것이다. 보편적으로 이러한 이념에 젖어 있던 당시의 중국사회에 불교가 전래되어 머리를 깎은 출가자들이 등장하자 문화적 이질감을 지니게 되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혹론〉엔 당시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문은 머리를 깎는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러한 사문의 행위는 성인의 말씀과 다르며, 효자의 도리에 어긋난다. 이러한 사문의 행위가 옳단 말인가.” 머리를 깎는 문제뿐만 아니라 출가자가 결혼하지 않는 문제 역시 당시 중국인들 눈엔 이질적인 요소임에 분명했다. 따라서 “모름지기 후사를 갖는 것보다 더한 복은 없으며, 자손을 끊는 것보다 더한 불효는 없다. 그런데 사문은 처자식을 버리고 재산을 버리며, 평생 독신이다. 이런 행위는 효행에 어긋나는 것이다. 스스로 고생한다고 해서 색다른 일이 일어나지도 않으며, 스스로 극한적인 일을 견딘다고 특별한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라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의 이면에는 “불효 중에 가장 큰 것은 후사가 없는 것”이란 맹자의 효도론이 깔려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불교계는 “큰 덕을 갖추기만 한다면 사소한 것 따위에는 구애받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즉 부모님이 물에 빠지면 사소한 예절에 구애받지 말고 우선 살리는 것이 예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문이 재산을 포기하고 처자를 버리며, 음악에 귀 기울이지 않고, 여색을 멀리하는 것은 최대의 겸양이며, 진정한 효도의 완성을 위한 것이라 말한다. 이것을 여산 혜원은 “한 사람의 출가자가 덕을 완성하면 그 공덕은 육친에 두루 미친다. 그 은혜로움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큰 효도를 실천하는 것이다”라 말한다. 차 차 석 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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