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참선수행 / 백림선사 방장 정혜화상


[백림야화(柏林夜話)]

각 거사 여러분, 생활선 참여자 여러분.

오늘밤은 백림야화 시간입니다.
왜 이러한 이름을 붙였느냐?
두 가지 측면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백림사에서 야화(夜話)를 진행하니까 “백림야화”라고 부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곳을 왜 백림사라고 부릅니까?

여러분은 아마 이곳이 측백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인데,
이 대답은 물론 아주 정확합니다. 하지만 거기는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오후에 양선생의 “어떠한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라는
강의를 들었는데, 그의 논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요.

당시에 한 학인이 백림사에 왔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는 아직 백림사라고 부르지 않고 관음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관음원에 와서 조주 노화상에게 묻기를,
어떠한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이 제목은 아주 오래된 제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전등록>>, <<지월록>> 내지 모든 선사의 어록을 펼쳐 보면,
이 문제가 최소한 일만 번도 더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일만 번의 물음에 대한 동일하지 않은 답은 최소한 9천9백9십9종이 있습니다.

그러면 당시에 조주스님은 이 문제에 어떻게 답했는가?
조주스님은 말씀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듣고서 동문서답으로 조금도 관계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동문서답의 문제가 역대로 온갖 해석, 해명으로 천변만화해 왔습니다.

좀 불경스럽게 말한다면, 정말 기괴하고,
어떠한 평설도 다 있고 어떠한 대답도 다 있습니다.
이것은 일천칠백 공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가장 특색있는 공안입니다.

조금전에 사회자가 불법을 공부함에 있어서 어떤 문제들에 주의해야 하는지를
일러 주었으면 했는데,
내가 곧바로 이 공안을 언급하니 역시 (물음과 답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절대적으로 관계가 있습니다.

불법을 공부하는 것을 그 궁극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첫째는 일체의 지(성)적인 것들을 막아버려야 하고,

둘째는 지(성)적인 차원을 떠나서 진정하게 생명으로 불법을 체험하고,
불법을 체득하고 혹은 불법을 체증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어떠한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하는
이 제목은 실제적으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묻는 불법이란 도대체 어떠한 도리입니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조주스님처럼 “차 마시러 가게나.”라든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지 않고, 어떠한 것이 불법인가,
불법이란 석가모니가 말한 법이고, 불법은 어떠한 내용을 포괄하며,
어떻게 불법에 들어가며 등 지성상으로 한량없는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선종의 풍격은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선종의 풍격은 남에게 의지하여 견해를 지으면
자신의 깨달음의 문을 막아 버리는 것으로 여깁니다.

선종은 자신이 스스로 도리를 깨달아 자신의 길을 갈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조주 스님은 이 문제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날 저녁 내가 말한 조주 스님의 또 하나의 공안처럼(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은 것입니다.)

누가 묻기를 어떠한 것이 불법입니까?
조주 스님 답하기를 조주석교이니라;
그러면 어떠한 것이 조주석교입니까? 답하기를
나귀가 건너가고 말이 건너간다.

조주스님은 이 문제를 아주 형상화하고,
구체화하고 생동감 있게 불법의 종지를 직접적으로 게양하고 드러내 보여,
여러분이 영원히 잊지 못할 깊은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원래 불법을 공부하는 것은 이와 같이,
영원히 일체 중생을 위한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하는 등 이런 방식으로 제접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진정으로 체득을 하려고 하면, 핵심은 말 밖에 있으며,
그러한 말 밖의 뜻을 체득하여햐 합니다.

온갖 종류의 선종의 전적들은 말하기를,
학인을 제접함은 바로 그 당장의 환경에 따라서
하나의 요령을 가리켜서 깨달음에 들게하는 것입니다.

“뜰 앞의 잣나무”와 “조사서래의”는 관계가 있는가 없는가?
만약 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역시 지성상에서 빙빙 두르는 것이고,
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조주스님의 이 대답은 무슨 작용을 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그것은 관계가 있으면서 관계가 없고,
관계가 없으면서 또한 큰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조주스님은 여러분이 사고할 여지를 용납하지 않고
바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밀어 부칩니다.
오직 몸을 솟구쳐 아래로 한 번 뛰어야만 비로소 알 것입니다.

조주 스님은 길이 없는 곳까지 밀어 부쳤는데,
길이 없는 곳까지 밀어 부쳐져서는 어떻게 하느냐,
바로 몸을 틀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한 곳에 이르면, 자연히 몸을 틀 때를 얻게 된다.”
함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갈 길이 없는 곳에 밀어부쳐, 자기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 내게 하는 것,
선종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여러분에게 품위 있는 공안은 아니나,
아주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주고 싶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는 강도 출신이고,
그의 아들이 자라 15~6세가 되었는데 이 아버지는
강도짓을 할 때마다 아들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대로 따라 하였습니다.

아들이 더 나이가 들었을 때,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 노상 아버지 뒤에 붙어서 도망하는 짓은 못하겠습니다.
저에게 몇 가지 절묘한 재주를 가르쳐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오랜 뒤에 아버지 안 계실 때
제가 어떻게 밥벌이를 하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장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몇 가지 절묘한 기술을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어느 집에 이르렀습니다.
과거에 강도짓은 자물쇠를 비틀어 끄르거나 문을 여는 것이 아니고,
벽에다가 구멍을 팠습니다.
내가 어릴 때 이것에 대한 인상이 가장 깊어서,
내가 살던 그 조그만 절에는 거의 사흘이 멀다 하고 구멍이 뚫렸습니다.
이 강도는 아들을 어느 대가 집에 데리고 가서, 먼저 구멍을 뚫었습니다.
두 부자가 구멍을 통해서 들어가고 난 뒤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주인의 궤짝을 열고, 아들이 보니 그 속에는 금은보화가 무엇이든 다 있었습니다.
아들이 궤짝 안으로 들어가자 아버지는 갑자기 궤짝의 문을 잠그고 돌아서 나가버렸습니다.
나간 다음에는 또 많은 가시나무를 찾아서 그 구멍을 막아버렸습니다.
이렇게 하니 아들은 뚫고 나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아버지는 그 주인집 문을 두드리고는 집안에 도둑이 들었으니
빨리 나와서 잡으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 때 아들은 아버지가 오늘 왜 이렇게 자기를 괴롭히고
사지로 몰아넣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습니다.
사지에 처하여서야 살아나고 그때서야 비로소
진정한 재생임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 집 사람들이 일어나서 곳곳으로 강도를 찾으러 다녔지만
아무도 강도가 궤짝 안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궤짝은 잠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아들은 다급한 중에 한 꾀를 내어 쥐가 하는 것처럼 궤짝을 쏠았습니다.
이에 그 집 사람들은 궤짝 속에 웬 쥐인가 하고는 와서 열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아들은 소리를 안 내었습니다.

모두 돌아가서 잠을 잘 때, 그는 또 궤짝을 긁어 크게 소리를 내고,
사람들이 다시 와서 보면, 또 소리를 멈추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그 집 주인의 주의력을 둔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주인이 석유 등잔을 켜고 와서 어떻게 된 것인가를 보았습니다.
궤짝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는 단번에 등불을 불어서 끄고는 도망갔습니다.

그가 팠던 그 굴의 입구까지 도망 와서 보니, 가시나무가 굴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다급한 중에 꾀를 내어,
그곳에 오줌통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오줌을 쏟아 버리고 머리에
그 오줌통을 쓰고서 단번에 뚫고 나갔습니다.
뚫고 나간 이후에 그는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절묘한 기술이라는 것을.

이 공안은 보기에 품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아주 깊은 도리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 도리는 우리에게 어떻게 처세하고,
어떻게 사지에서 살아나는 법을 만나는가를 일러 줍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안심입명처를 찾는가를 일러줍니다.
우리들은 사람으로서 이와 비슷한 시간, 이와 비슷한 일들은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문제를 처리할 아주 좋고 지혜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불법을 공부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지혜를 찾아내어
생활 중의 이러한 해결할 방법이 없는 문제들을 처리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중 가장 해결할 방법이 없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밥을 먹는 것이나, 옷을 입는 것이나, 쓸 돈이 없는 것이 아니고,
지금 당장의 우리의 이 마음, 이 생명을 편안히 할 수 없는 것,
지금 당장의 이 번뇌 무명을 타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보기에는 우리들이 자재하게 사는 것 같지만,
실은 나를 포함해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어쩔 수 없어 그렇게 살고,
모두 불법 중에서 안심입명할 곳을 찾아내려 하고,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다시 살아날 지혜, 방법을 찾아내려 합니다.

나는 불법을 공부하고, 어떻게 불법을 공부하며,
어떤 문제에 주의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매 개인이 자기의 길을 가야 하고,
매 개인이 스스로 생명의 곤혹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돌파를 하고서야 비로소 불법이 대단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낍니다.

당시에 조주 스님이 왜 우리에게 설파하지 않았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직접 절묘한 기술을 배우도록,
“뜰 앞의 잣나무”로부터 어떻게 조사의 서래의를 체득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공안을 해석하는 것은 소용없는 짓입니다.
왜냐하면 해석하는 것은 단지 약간의 표피적인 것에만 미칠 뿐,
아무리 해도 온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온 생명으로 그것을 체득할 때에야 비로소 가장 원만하고 가장 철저하여,
능히 가장 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조금 전에 사회자가 나에게 불법공부하는 것에 관해 말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나는 단지 스스로 조주 스님의 어록을 공부하고 조주선을 익혀서
아주 조금 체득한 이것으로써 여러분께 공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생활선의 4개의 요점]

(1993년 11월 9일)

생활선을 닦는 4개의 요점

우리가 생활선을 제창하여, 강조하려는 것은 바로 생활하는 중에 수행을 하고,
수행하는 중에 생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행이란 단지 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당연히 염불, 교학 공부, 마음을 관하는 것 등,
총괄하여 불교 수행의 일체의 법문을 가리킵니다.
일체의 법문은 모두 선정을 떠날 수 없으므로,
우리는 특별히 선을 강조하였습니다.
《유가사지론》 상에 종종의 선을 열거하고,
그 중에 “판사선(辦事禪: 일에 힘쓰면서 하는 선)”이 있습니다.
판사선의 의미가 우리가 제창하는 생활선과 비슷하지만,
생활선의 포함하는 뜻이 더욱 넓으며, 생활선이 요구하는 바는 단지 선을
일하는 중에 실행하는 것만이 아니고, 생활의 모든 면에 있어서 실행하는 것입니다.
생활의 내용은 매우 풍부하고, 생활의 천지는 광활하여 사회생활이 있고,
가정생활, 도덕생활, 정서생활 등이 있어 생활의 일체의 영역이 선의 정신,
선의 희열로 가득 차야 합니다.

그러면 생활선을 닦아 배움에는 어떠한 요점이 있는가?
생활선을 닦는 데는 4개의 요점이 있습니다.
신앙을 생활에 실행하고, 수행을 지금 당장에 실행하고,
불법을 세간에 융화시키고, 개인을 대중에 융화시키는 것입니다.


一. 신앙의 생활에의 실행

우리는 신앙의 원칙을 일상생활 중에까지 관철하여,
신앙을 생활화 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중에서 용심하고 행동하는 것 모두가 오계,
십선의 원칙에 의거하도록 하고,
우리의 인격이 신앙생활 가운데에서 분열로부터 통일로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절 안에서나 혹은 좌선할 때와 생활할 때가 서로 다른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앙의 원칙으로, 불법의 정신으로 점차 생활의 질을 제고하고,
생활의 환경을 개선해야 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물질방면의 풍부를 포함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생활의 내용, 생활의 질을 정화하고,
흠없이 완전하게 하고 숭고하게 하는 쪽으로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저급하고 속된 취미, 감각기관의 향락을 추구하는 것도 점차 씻어 없애야 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화목하고 즐거운 가정생활을 할 수 있고 아름답고 고상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으며, 그러면 우리는 점차 가정을 불법화하고,
사회를 불법화 하는 것을 실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二. 수행의 지금 당장에의 실행

우리의 수행은 시시각각 지금 당장의 한 생각을 떠날 수 없으며,
이 한 생각을 처리할 수 없으면, 일체 그 어느 것도 말 할 여지가 없습니다.
지장경에 이르기를 “염부제의 중생은 마음 씀씀이 하나하나가 죄가 아닌 것이 없고,
업이 아닌 것이 없다.”
(이로부터) 지금 이 한 생각이 중대하고,
십법계의 형성이 모두 이 한 생각을 좇아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한 생각 한 생각을 또렷하고 명백하게 하녀야 하며,
조금도 흐리멍덩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무명 번뇌가 막 싹터 움직이려 할 때 우리는 곧 지혜의 빛으로
그것을 비추어 깨뜨려야 하고, 그것을 따라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고덕의 이른 바 “생각이 일어난 즉 알아차리고, 그것을 알아차린 즉 없어진다.”고
함은 바로 지금 당장의 한 생각을 알아차려 비추는 방법입니다.

만약 수행을 지금 당장에 실행할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납월 삼십일을 당하여 수각이 황란해 질 걱정을 할 필요가 없고,
마지막 한 호흡이 넘어갈 무렵 앞길이 망망해 질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는 것은 일종의 영원의 개념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이 한 생각이며,
이 한 생각이 지나가면 다음 한 생각이 역시 지금 당장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능히 이 한 생각을 주관할 수 있다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모두 주관할 수 있고,
이것이 이른바 "일념이 만년이고, 만년이 일념“인 것입니다.
능히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생사를 마치지 못할까,
번뇌를 끊지 못할까하는 걱정을 하겠습니까?
어찌 성과(聖果)를 이루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 “수행을 지금 당장에 실행한다.”는
이와 같은 높은 표준으로써 자기를 면려하고, 자기를 단속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해 나간다면, 우리는 일체시 일체처에서 모두 능히 수행할 수 있고,
일체의 경우가 모두 수행하는 도량이 될 수 있어,
바로 불전에서 말하는 “곳곳이 모두 화장세계를 이루었고,
개중에는 비로가 아닌 곳이 없다.”와 같을 것입니다.


三. 불법을 세간에 융화시킴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간에 맞추어 설법하심은, 세간을 교화하고 정화하여,
이 결함과 번뇌의 세간을 아름답고 청정한 인간정토로 바꾸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법이 세상에 머무는 하나의 근본목표입니다.
이 목표를 떠나서는 불법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을 것이며,
불경도 일종의 골동품에 불과할 것입니다.

근년에, 불교계에서는 세간을 떠나려는 경향을 좀 나타내어서,
불교가 거의 죽은 사람만을 위한 천도의식이 되어 버렸고,
불교도들은 “피세주의자(避世主義者)”라고 불리었습니다.
태허대사는 이를 위해 인간불교의 사상을 고양하고,
불법이 세간을 교화하여 이끌고, 세간을 개선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태허 대사의 사상은 현재 불교의 주류가 되었으며, 우리는 마땅히 이 주류에 순응하여,
적극향상의 태도로 불법을 이해하고 수행하여,
이 세간을 건설하고 개선하며 또 이 세간을 깨우쳐야 합니다.
육조 혜능대사께서 잘 말씀했습니다.
“불법은 세간에 있고, 세간을 떠나서 깨닫는 것이 아니니,
세간을 떠나 보리를 찾는 것은 토끼의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


四. 개인을 대중에 융화시킴

불법은 연기를 말하는데, 어떤 개인이나 사물도 각종의 조건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만사만물이 모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수행은 무리를 떠나 홀로 쓸쓸히 지내며,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주관대로만 해서는 안되고,
마땅히 자기의 수행을 중생구제와 긴밀히 연계시켜
“스스로를 위하여 안락을 구하지 아니하고, 다만 중생이 괴로움을 벗어나기를 원하며”,
일체 중생과 함꼐 근심하고 함꼐 즐거워 해야 합니다.
아마 누군가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도 내 스스로 능히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당연히 얻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큰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이타 중에서 자리를 실현하고, 타인을 깨닫게 하는 중에서 자기의 깨달음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능히 개인을 대중에 융화시킬 수 있고, 우리의 가정 생활과 사회 인간 관계가 아주 화목하게 되고, 불법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현실을 도피하고, 소극적이며 염세적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의 네가지는 생활선의 요점이며, 또한 생활 중에 일체 법문을 수행하는 요점입니다. 총괄하여 말한다면, 이 네가지는 우리가 생활선의 종지로 삼는 두 마디 말, “각오인생, 봉헌인생(인생을 깨닫고 인생을 바친다. 깨달음의 삶을 살고, 봉사의 삶을 산다.)”으로 개괄될 수 있습니다. 이 여덟 개의 글자가 비교적 정확하게 보살의 근본정신을 개괄하였고, 불교가 이 시대에 담당하는 사명을 나타내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깨닫는 것은 지혜의 실현이고, 인생을 바치는 것은 자비의 실현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도의 지혜도 갖추고, 큰 자비심과 기꺼이 봉사하려는 정신도 갖춘다면, 그러면 능히 현 시대에 불법의 정신, 불법의 이미지를 아주 좋게 수립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불교도 개개인이 능히 적극적으로 진보하고,
적극적으로 사회를 위해 대중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회적으로 남의 비방과 미움을 받지 않고,
소극염세적이라는 말을 들을 리도 없을 것입니다.

“각오인생, 봉헌인생” 이 여덟 개 글자는 보기에는 매우 소박하지만,
행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내가 이 여덟 글자를 집어 낸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들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또한 생활선을 인정하는 사람 모두가 이로써 자기를 격려하고,
자기에게(실행하도록) 요구할 것을 바라서입니다.
7일 가행정진 법회의 마지막 날, 내가 여러분에게 달리 드릴 것은 없고,
이 여덟 개 글자를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우리 모두 일체의 시간, 일체의 장소에서 “각오 인생, 봉헌인생”의 정신에 의거하여
생활하고, 일하고, 수행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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