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사구게 ( 金剛經 四句偈 )



금강경 제5품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진실)를 보리라.




제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의 사구계 내용을 보면,


첫째와 둘째 귀절은 현실의 허망함을,
셋째와 네째 귀절은 허망한 내면에 허망치 않은 존재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사구게는 이 경의 골수일 뿐만 아니라 불교의 교리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모든 사물을 관찰할 때에 공(空) · 가(假) · 중(中), 삼제(三諦)의 원칙
에 의한다. 공(空)은 모든 현실을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모든 물건들을 부수거나 태워 버린 뒤의 허공의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
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고 분석한 결과, 즉 모두가 잠시 일시적으로
인연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요 절대적인 실체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가(假)는 有라고도 하므로 空의 반대 현상이다.
모든 사물이 空한 자리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의 현상을 그대로, 임시·거짓으로
모인 인연이 존속하는 한, 존속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空의 반대현상
인 有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흔히 [있다]고 말하는 따위의 완유(頑有)는 아니다.


중(中)은 중도(中道)로서 空인 동시에 有요, 有인 동시에 공(空)임을 바로 알아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말한다.
이러한 이치를 하나의 거울로써 예를 보면,
거울속에 비친 그림자는 아무리 울긋불긋하여도 그 실체가 공하다.
그 공하다는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 거울에 일시적인 인연이 맞아서
한 사물이 비친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空인 것이다.


다음 거울속의 그림자가 공하여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았으니,
인연이 비쳐진 그 그림자는 분명 다양하고,
그 다양한 그림자는 보는 이의 감정을 돋우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며 자재자유(自在自由)한다.
그러므로
아주 없다는 생각에 치우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있는 그림자의 상태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假인 것이다.


끝으로 그렇다면 거울속의 그림자는 실재로는 없는 것이나 현실적으로는 없지
아니하니 없는 듯하되 있고 있는 듯도 하되 없다고는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이라 할 때에 공에 치우치지 않고 가유(假有)를 전제한 공이어야
하며,  '있다'라고 할 때에 '있다'라는 사실에만 치우치지 말고 공을 전제한 가
유(假有)이어야 한다.
이렇게(바르게) 보는 방법이 곧 중도(中道)이다.



이 사구게를 다시 삼제[三諦; 공(空) · 가(假) · 중(中)]에 의해 게(偈)를 나누어
보면

첫째와 둘째 귀절은 空이고,
세째 귀절은 假이며, 네째 귀절은 中道라 하겠다.


첫 귀절에 '온갖 겉모양(凡所有相)'이라 함은, 부처님의 32相을 비롯하여
모든 형상있는 것을 총망라한 것이다.


둘째 귀절에 '모두가 허망하다(皆是虛妄)'함은 그러한 겉모양은 모두가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인연따라 임시 건립(모양을 이룬, 화합)
된 것인데, 우리들의 허망한 분별심 때문에 실제로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무상(無常)


세째 귀절에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로 안다(若見諸相非相)'함은 위의
두 귀절의 말씀에 의하여 눈앞에 보이는 겉모양들이 보기에는 있는 듯하나 실제
로는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니, 이런 경지를 진공묘유(眞空
妙有)라 한다.




금강경 제10품에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응당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금강경 제 26품에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 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진실)를 보지 못하리라.




금강경 제32품에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렇게 관할 지어다




사구게(四句偈)와 함께...


㉮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體唯心造
   (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화엄경(華嚴經)의 사구게(四句偈)로 나오는 내용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삼세의 일체 부처님을 알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 모든 것이
마음으로 된 줄을 알아야 한다."


중생은 미혹하다고 합니다. 무명(무지)에서 시작된 잘못을 진실인 것으로 착각하
고 되풀이 하는 미망(迷妄)을 말함이다. 이러한 미망의 모습을 만드는 것도 마음
(心)이며, 또한 이것을 깨뜨리고 무명을 밝히는 작용을 하는 것도 우리들의 마음
(心)입니다.
이 미혹하고 망령된 마음을 깨뜨리고 무명(無明)을 밝힌 마음은 지혜(智慧)라고
합니다.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가진 존재의 실상인 '연기(緣起)의 도리(道理)인 리법
(理法)'을 깨달은 마음을 말함 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수행(行)이 필
요하다고 합니다. 이 모두가 마음이 만든다는

내용을 <60화엄>에서는 心佛及衆生三無差別(심불급중생삼무차별)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미혹한 중생의 눈에는 '心·佛·衆生'의 차별이 있게 보이지만, 깨달음에 의한
진여(현현하는 진실의 실상)의 입장에서는 '본질적(本質的)으로는 차별(差別)이
없음'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탐진치에 길들여진 미망(迷妄)의 인식이기 때
문에 실상을 바르게(그대로) 보지 못하고 분별심을 일으켜 보기 때문에 잘못 보
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근본교리를 바탕으로 설명 되어집니다.




㉯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금강경(金剛經)의 제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 나오는 사구게(四句偈) 내용
입니다.

"무릇 온갖 겉 모양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니 모든 것의 '모습과 모습 아닌 모습'
을 바로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


즉 諸相(보이는 개개의 상호)와 非相(개별 상을 떠난 일체의 '상의상관'의 모습)
을 바로 볼 줄 알면 卽見如來 :여래의 실상을 바르게 볼 수 있다는 내용으로, 상
(相:현상,모양)으로써는 여래(진리·진실)를 볼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개시허망(皆是虛妄) :모든 것은 일체무상(一切無常)한 것으로, '성주괴공'하며,
'생주이멸'하는 변화를 벗어날 수 없으며, 인간도 그 속에서 '생노병사'하는 것
으로 그 어느것도 '항상함'의 상주불변(常住不變)한 것은 없으며 연기의 법칙에
의해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가진 일체의 모습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 또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바탕으로 설명 되어집니다.




㉰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여시생청정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금강경(金剛經)의 제10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에 나오는 사구게(四句偈) 내용
입니다.

"응당 이렇게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할 것이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
고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도 마음을 내지말아야 하나니, 아무데도 머무는 데
가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


우리가 알 수 있는 인식(認識)의 한계(경계)는 육근(六根)의 대상처인 육경[육
근으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육식[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
의식]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이러한 식(識)에 끌려다니지(현혹되지) 말라는 것
이다. 머무름 없는 마음이란 상(相)을 일으키지 않는 여여함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온(수·상·행·식)의 작용인 우리의 인식(認識)이란 것은, 외부경계(육경)에
대하여「아상('나'에대한)·인상('나'와 다르다는)·중생상('중생'이라는)·수자상
('필연적'이라는)」등을 의지하여 일어 난 것으로, 이(四相)는 무명(無明:무지,
밝게알지 못함)에서 출발하여 쌓여 있는 집식(集識)이라는 것이다. 즉 내 안에
있는 미망의 식(集識)에서 출발한 것 이므로, '아무데도 머무는 데가 없는 마음'
이란 상(위의 4가지相)이나 집착된 식(集識)에서 벗어난,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것으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바탕으로 설명 되어집니다.




㉱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금강경(金剛經)의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에 나오는 사구게(四句偈) 내용
입니다.


"겉 모양에서 부처를 찾거나 음성(목소리)으로써 부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삿
된 도를 행하는지라 끝끝내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오온의 작용인 '색 수 상 행 식'으로써 여래를 찾는 것은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바르게 보는 방법이 아니므로, 이를 통한 구함은 삿된(부질없는) 구함이라
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래(진리)는 그렇게 해서 구해지고, 또 알아지는 것
이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무명(無明)에서 출발한 인식(六識)으로는「인지하는 형상과, 실상의 모습」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은 알음알이<법의
실상이 아닌 무지(無明識에서 출발한 것)의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으
로 차별이나 분별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함은 결국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무명에서 출발한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集)에서 출발함을 말하고 있
으며, 이는 또한 무명을 밝혀야 되는 원인을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근본교
설인 삼법인(三法印:四法印)·십이연기(十二緣起) 등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반야경 문승품(問乘品)에서는,
諸法 名色受想行識 眼耳鼻舌身意 色聲香味觸法 眼界色界眼識界 乃至意界法界意
識界 是諸法諸法空 非常非滅故 何以故 性自爾 是爲諸法空
(제법 명색수상행식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계색계안식계 내지의계법계의
식계 시제법제법공 비상비멸고 하이고 자성이 시위제법공)

"모든 법은 색·수·상·행·식·눈·귀·코·입·몸·생각·색·소리·냄새·맛·감촉·법·안식(眼識)·
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이니라. 모든 법을 모든
법이라 하는 것은 공하니 항상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자성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이것을 제법공(諸法空)이라 하느니라." 진여
(眞如)의 공(空)함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금강경(金剛經)의 제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나오는 사구게(四句偈) 내용
입니다.


"온갖 유위의 법은 꿈 같고 꼭둑각시 같고 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 같고 번
개 같으니 응당 이렇게 관(觀) 할 지어다."

"有爲法 名欲界 色界 無色界-유위법은 욕계·색계·무색계를 말하느니라."
중생들이 미혹으로 윤회를 거듭하는 세계인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
色界)를 말하는 것으로, 욕계(欲界)는 탐욕이 많아 정신이 흐리고 거칠며 물질에
속박되어 있는 가장 어리석음의 세계를 말하며, 색계(色界)는 욕심은 적지만 성
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는 못한, 비교적 밝은(정신)
세계를 말하며,

無色界(무색계)는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
지만 아직 나(我)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해 정신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그중 깨
끗한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비물질의 세계, 즉 오온 중의 사온(수·상·행·식)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다시 '단계적인 4처'로 구성되어 집니다.



⑴ 공무변처(空無邊處): 욕계와 색계의 모든 물질적 형상을 떠나 공(空)의 무한
성을 관찰하는 경지.

⑵ 식무변처(識無邊處): 공무변처를 초월하여 인식 작용의 무한성을 관찰하는
경지.

⑶ 무소유처(無所有處): 집착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관찰하는 경지.

⑷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非有想非無想處): 상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로, 거칠은(욕계·색계의) 생각은 없지만 미세한(깊은) 생각이 아주
없지 않은 경지.


근기나 수행에 의한 차별된 삶(인식)의 세계 전체를 표현한 유위법(有爲法)의 세
계를 바르게 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 연기
(緣起)의 도리(道理)에 의한 · 제행무상(諸行無常)하고 제법무아(諸法無我)'인 이
법(理法)의 내용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오온의 현상에 현혹되어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바르게 볼(觀)줄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금강경 전체 가르침의 끝부분을 장
식하는 결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야경 무생품(無生品)에는 사리불이 '무엇이 관(觀)함인가'에 대하여 물었는데,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색이 항상함도 아니고 무상
도 아니며, 즐거움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고 무아(無我)도 아
니며, 공도 아니고 공 아닌 것도 아니며, 상(相)도 아니고 무상(無相)도 아니며,
작(作)도 아니고 무작(無作)도 아니며, 적멸(寂滅)도 아니고 무적멸도 아니며,
여윔도 아니고 여윔 아님도 아니니라. 수·상·행·식 역시 그러하니라.

보시바라밀 내지 반야바라밀과 내공(內空) 내지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 사념
처(四念處) 내지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일체(一切)의 삼매문(三昧門)과 일체
의 다라니문 내지 일체종지가 항상함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며, 즐거움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니며, 아(我)라는 것이 있지도 않고 무아(無我)라는 것도 없으며, 공
도 아니고 불공(不空)도 아니며, 상도 아니고 무상(無相)도 아니며, 작도 아니고
무작(無作)도 아니며, 적멸도 아니고 적멸 아님도 아니고, 여윔도 아니고 여윔이
아님도 아니니라.

사리불이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모든 법을 관하는 것
이니라."




㉳ 諸法宗本來 相者寂滅相 佛者行道而 來世得作佛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래세득작불)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사구게(四句偈) 내용입니다.

"모든 법이라고 하는 '법'은 '적멸상'으로, 불자가 이를 바르게 알고, 이 '적멸상'
의 법에 같이 할 수 있다면(行道) 이것이 부처가 되는 길이다."


적멸(寂滅),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모든 것(法)은 고요
하며 편안한 상태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저녁(밤)에 방안에
불(전등)을 끄면 아무것도 안보여 방안에 있는 각각의 물건에 대한 상(四相)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인지하거나 안하거나 본래 있는
상태(켜져 있거나, 꺼져 있거나 寂靜의 상태) 그대로 인데, 어두워서 보이지가
않아(인지하지를 못해) 따라오는 상(四相)에 의한 분별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함입니다.

즉 우리가 오온의 정신적 작용인 4온(수·상·행·식)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며, 분별
망상을 일으킨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분별망상을 떠난 법. '탐·진·치'를 버리고,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여
윈(떠난), '법'이라 이름하는 그 '법(진리·진실)'의 실상(眞像)에 함께(동참)할
수 있다면 그것이 부처(佛)로 가는 길(道行)이라는 뜻입니다.

유식에서는 '전식득지[식(識)의 변화된 지(智)=성불]'로 표현을 합니다. 즉 취
사심에 종속[탐·진·치 및 무명(無明)에서의 집(集)]된 마음에서 벗어난 마음을
말함 입니다. 분별망상의 의식에서 출발한 행동이 아니라 전식득지된, 변화된
지혜(寂滅相)에서 출발한 행동(行道)에 들면 이것이 곧 부처(佛)가 되는 길 이
라는 설명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어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바꾸면 된다'고 합니다. 무엇을 바꾸
는가 하면 내 마음(心)을 말함 입니다. 마음 바꾸는 것 한순간이라고 합니다.
친구에서 원수로 변하는 것, 원수에서 은인으로 변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즉 원수가 되는 길과 아닌 길을 선택하는 우리의 '순간 순간' 마음을 말함입니다.
우리가 상대(상대적 존재)에 대한 도움 안되는 존재, 가치(의미)없는 존재,

또는 필요한 존재·가까이 하고푼 존재가 되는 것, 우리의 행동 등 모두는 나 자신
(마음)이 선택하며, 시작(作爲)한다는 것 입니다. 힘 듭니다. 이것이 '힘듬'니다.
중생이라는 입장에서는 '생·노·병·사'의 과정도 힘들고 괴로움이 따른다고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실천(수행·정진)하며, 나아가고 지켜감에 힘이 겨워, 어
디까지인지 그 깊은 뜻을 바로(깊이) 이해하는 것도 '힘듬'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아 의지해 머물면서 수행·정진을 하는 것이며, 하나씩
하나씩 이해하며 느끼며, 받아들여 가는 것입니다(攝修).


선니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말씀을 듣고서 더욱 의심만 더해갈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선니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의심을 더해야 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것은 매우 깊은 이치로서 보
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려우므로 반드시 깊이 관찰해야 미묘하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슬기로운 사람만이 알 수 있고 범부 중생들은 능히
분별해 알 수 없는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중생들은 긴 밤 동안에 잘못 보고 잘못
알았으며 잘못 찾고 잘못 원하였기 때문이다.

" <잡아함 권 5, 선니경(仙尼經)>


상(相:아·인·중생·수자)이 없는(비운) 사람은, 아주 '쉽다·어렵다' 할 것도 없는데,
그렇지 않으니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정도(八正道)·육도(六度:六波羅蜜)·삼학
(三學)> 등의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코삼비국 고시타라마 동산에 계시었고, 존자 아난다도 거
기에 있었다.
그때에 어떤 바라문이 존자 아난다에게 나아가 서로 인사하고 위로한 뒤에, 한
쪽에 앉아 존자 아난다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사문 고타마 밑에서 범행(梵行)을 닦습니까."
"끊기 위해서이다"
"존자는 무엇을 끊으려 합니까"
"탐애(貪愛)를 끊으려 한다."

<잡아함경 권21. 561 바라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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