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불교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불교의 역사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근본불교는 부파불교나 대승불교로 분화되기 이전의
불교의 원형이 비교적 잘 담겨져 있다.
따라서 불교가 분열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근본불교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진리를 깨친 후 45년 동안
대중교화를 위해 힘쓰다가 8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드신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전에 장례는 재가불자가 담당하고
출가승려는 수행에 힘쓰도록 당부하였다.

부처님의 유훈대로 재가불자들의 주관 아래
쿠시나가라의 들판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지금도 그곳에는 그 터가 남아 있다.
다비(茶毘)를 마친 후 부처님의 유골은 당시 부처님과 인연이 많았던
여덟 나라에 나누어 각기 사리탑을 세우고 모셨다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당시
교단을 이끌어 가야 될 가섭존자는 쿠시나가라에 없었다.
그는 다른 많은 제자들과 함께 쿠시나가라를 향해 가던 도중에
지나가던 어떤 외도(外道)로부터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소식을 접한 제자들은 모두 비탄에 잠겨 슬퍼하였다.
그런데 한 비구는 태도가 달랐다. 그 비구는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매일같이
‘이렇게 수행해라, 저렇게 수행해라’해서
성가셨는데 이제는 돌아가셨으니 잘 되었다.
이제는 뭐든지 하고 싶은 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 비구의 말을 들은 가섭존자는
‘부처님께서 금방 돌아가셨는데도 저러니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매우 걱정스러워 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편집해서 교단을 잘 지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많은 제자들도 가섭존자의 뜻에 찬동하였다.

그리하여 부처님이 돌아가신 지 3개월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편집하는 첫 모임이 열렸다.
이런 편집회의를 결집(結集)이라고 하는데, 이후로도 여러 차례 열렸으므로
순서를 붙여 제 1결집, 제 2결집, 제 3결집이라고 부른다.
제 1결집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즉 불멸(佛滅) 후 3개월만에
마가다국의 왕사성 칠엽굴(七葉窟)에서 열렸으며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5백 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그래서 제1결집을 ‘왕사성 결집’, 또는 ‘5백 결집’이라고도 한다.
이 결집이 최초의 경전 편집회의라 할 수 있다.

이때 가섭존자가 의장이 되고,
부처님을 늘 수행했으며 기억력이 뛰어났던 아난존자가
부처님이 설했던 가르침을 외웠다.
또한 계율에 뛰어났던 우바리존자는 계율을 외웠다.

먼저 다문제일(多聞第一)인 아난존자가
5백 명의 스님들 앞에 나아가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기억해서 외웠다.
그것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부처님께서 언제, 어디에서,
어떤 사람에게 이러한 내용을 설하셨다”와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불교의 모든 경전의 첫 부분이 “이와 같이 내가 들었습니다.”
즉,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5백 명의 제자들로부터 틀림없다는 확인을 받은 다음,
그 자리에서 5백 명의 대중이 모두 확인한 내용을 합송(合誦)하였다.
합송은 원래 ‘함께 외운다(合誦, Samghiti)’는 뜻을 지니고 있다.

교단의 생활규범인 계율에 대해서는
우바리존자가 앞에 나와서 똑같이 외우고
500명의 대중들로부터 확인을 받고 합송하였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게 아니라,
대중들이 모여서 민주적 절차를 거쳐 편집되었다.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불교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렇게 외워서 전승하다가 수백 년 뒤에
문자로 기록된 경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제 1결집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한 경(經)과
스님들의 생활 규범인 율(律)이 결집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아함경과 율장의 원형이 이때 편집된 것이다.
이 경과 율을 중심으로 100여 년 간 교단은 잘 유지되었다.

그런데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1백년쯤 지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즉, 사회적 여건도 많이 달라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제자들도 이미 죽은 뒤였다.
그렇게 되면서 계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당시 바이샬리에 있는 젊은 진보적인 스님들은
열 가지 계율에 대해 상당히 융통성 있는 해석을 내리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장로스님들이
그것은 법도에 맞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문제가 되었던 열 가지 일[十事]의 내용 중에 예를 들면
‘양지정(兩指淨)’이란 것이 있다.
스님들은 오후불식을 했기 때문에 정오가 지나면
물을 제외한 어떤 음식도 다음 날 아침까지 먹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시계가 없었으므로 정오가 됐는가를
땅에 막대기를 꽃아 놓고 해 그림자로 재곤 했다.
정오가 되면 그림자가 없고 정오가 지나면 지난 만큼
해 그림자가 더 생기게 된다.

그런데 양지정은 해 그림자가
손가락 두 마디 사이를 지나기 전까지는 먹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공무로 어디를 갔다 왔다든지 할 때 정오가 조금 넘었다고 해서
다음날까지 굶는다는 것은 너무 심한 처사이므로
조금 융통성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또 십사 중에 금은정(金銀淨)이란 것이 있다.
출가수행자는 무소유의 삶을 살기 때문에
금·은 같은 돈은 만지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는 화폐 경제도 발달하고 했으니
이것도 융통성을 발휘하자는 것이다.

오늘날도 남방 계통의 스님들은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기 때문에
스님들은 직접 돈을 만지지 못한다.
그러나 스님들도 돈을 안 쓰고 살 수는 없다.
요즘처럼 세상이 자본주의 경제구조로 바뀐 시대에서는
돈을 안 쓰고 살기는 힘들다.

그래서 타일랜드 스님들은 아침에 탁발을 나갈 때나
또 여러 종교의식 때 돈도 보시를 받는다.
탁발을 갔을 때 집안에 무슨 경사가 생기면 봉투에다 돈을 넣어서 드리는데,
직접 스님이 만질 수가 없으므로 늘 메고 다니는 가방을 탁발대 위에 올려놓으면
그 안에다 돈을 넣어준다. 그러면 스님은 가방만 메고 오면 된다.

또 스님은 돈을 만질 수 없기 때문에 가방을 방에 걸어 놓았다가
쓸 일이 생기면 학생을 한 사람 데리고 돈을 쓰러 간다.
타일랜드의 웬만한 절에는 학교가 부설로 있어서
국민교육을 절에서 스님들이 담당한다.

거기에서는 스님과 학생들이 함께 살면서
스님이 직접 할 수 없는 일을 학생이 대신해 준다.
그래서 지방 학생들은 절에서 스님을 시봉하면서 숙식을 해결한다.
학생들은 스님에게 필요한 물건이나 일용품을 사고,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아서 가방에 넣어주는 역할을 한다.
스님은 가방만 메고 다니므로 돈은 만지지 않아도 된다.
스님과 학생의 공생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이렇게 돈을 안 만지는 것이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입장에서는 정신이 중시된다.
돈을 만지지 않고도 돈에 집착할 수 있으며,
돈을 만지고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승, 대승의 구분도 이런 차이에 기본하고 있다.

바이샬리의 젊은 스님들이 주장한 것은
계율을 현실에 맞게 적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부처님이 ‘소소계(小小戒)는 버려도 된다’고 한 데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

이처럼 젊은 스님들이 계율의 융통성 있는 해석을 들고 나오자
보수적인 장로 스님들은 계율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그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서 제 2결집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결집이 열린 바이샬리에 7백 명의 스님들이 모였다.
그래서 제 2결집을 ‘바이샬리 결집’, ‘7백 결집’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장로 스님들은 젊은 스님들이 주장한
열 가지 계율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부처님 말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비법(非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을 십사비법(十事非法)이라고 한다.

젊은 스님들은 이러한 결정에 반발하여
따로 더 많은 대중을 모아놓고 별도의 결집을 열었다.
아마 당시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스님들의 세력이 컸던 모양이다.
그래서 교단은 처음으로 보수와 진보의 두 흐름으로 나뉘게 되었고,
보수적인 입장을 상좌부(上座部), 진보적인 입장을 대중부(大衆部)라고 하였다.
이로써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백 년경에 불교 교단은
상좌부와 대중부의 두 부파로 분열되었다.

근본불교란 바로 불교가 이렇게 두 부파로 분열되기 이전인
불멸 후 백 년까지의 불교를 가리킨다.
부처님의 성도(成道)로부터 불멸 후 100년까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비교적 원형대로 잘 보존되었다.

이러한 근본불교를 원시불교라고도 하며,
또 이 둘을 분리해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즉, 불멸 후 30년에서 100년까지 약 70년 간의 불교를 원시불교라고 하며,
부처님과 직계 제자의 시대인 불멸 후 30년까지를 근본불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불교를 불멸 후 100년 경 교단이
상좌부와 대중부의 두 부파로 나뉘어지기 이전의 불교로 이해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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