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은

부처를 염한다는 뜻이니 곧 부처를 생각해서 외운다.

부처를 이해해서 잊지 않도록 한다는 말이다.

목탁을 치며 불경을 읽는 방법도 염불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불경에서 드러내는 부처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외운다 해도 잘못된 부처를 외우는 격이 되므로 올바른 부처의 실체를 불경을 통해 궁구하여 완벽하게 통달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염불을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가 해결하지 못하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해결하여 어리석은 판단에 의해 반복되는 오류와 실패를 교정하고 패배의식과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안녕을 확신함으로써 삶의 고통을 해소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중생의 궁극적 바램이다. 곧 삶을 통달함으로서 일체의 불안함을 없애고자 하는 방편으로 염불이나 기도를 하기위하여 종교를 찾기도 한다.

삶의 실체를 통달하려면 '진실 된 삶'을 얻어야 한다.

'진실'이란 '참답고 실제적'이라는 말이고 ‘참답다’란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니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못하고 자기의 기억에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누구에게나 실감나는 일은 아니며 미래의 일을 상상하는 것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을 꾸며서 생각하는 것이므로 실제의 일이 아니므로 역시 현실적이지도 않다. 그러니 진실한 것은 오직 ‘지금’이라는 시간에 있는 일이다. 이것을 현실적이라고 하기 때문이고 꾸밈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 누구에게나 공통된 시간이기에 진실한 것이다. 중생은 모두 ‘지금’ 살아간다. ‘지금’ 호흡을 하고 지금 생각하고 세상을 지금 보며 과거를 지금 기억하고 미래를 지금 상상한다. 그러므로 삶의 현장은 지금인 것이다. 그리고 오직 ‘지금’이 진실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이 진실한 ‘지금’을 이루는 이치가 있을 것이니 그것이 ‘진리’ ‘참다운 이치’인 것이다. 만유를 이루는 재료는 사대(지, 수, 화, 풍)를 말하지만 사대에게는 ‘지금’이 없다.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이 없고 역시 ‘원하는바’나 ‘염불’이 있을 수 없으니 ‘지금’이란 정신이고 정신의 능력을 ‘깨달음’이라고 하니 ‘진리’ ‘진실’ ‘삶’ ‘지금’ ‘고통’ ‘염불’등은 모두 깨달음의 작용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부처란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일체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알아차리려면 대상이 있어야하고 그 대상을 느끼는 감각이 있어야하며 그 감각을 통해 인식된 것을 판단하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기억이 있어야하고 기억이 있으면 이미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세월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부처라는 깨달음에는 대상과 주체와 기억과 세월이 모두 들었으니 물질과 감각과 정신세계가 모두 어우러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불’이란 모든 세계가 펼쳐지는 ‘지금’의 이치 즉 ‘삶’의 이치인 ‘진리’ 또는 ‘깨달음’을 통달하여 이해하고 실제대로 기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我)’라는 것은 주체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주체란 고유한 스스로를 말하는 것이니 유일하고 순수해야한다.

그리고 변화가 없어야하고 객관적으로 존재성을 확립하고 있어야한다.

그러나 그러한 ‘나’는 없다.


식물도 동물도 모두 화합으로 이루어졌고 화합을 하기 위하여 잠시도 멈춤 없이 물을 흡수하고 허공을 흡수하면 흙에서 자라난 흙의 정기 즉 양분을 섭수하고 태양의 빛과 열을 쫒는다. 곧 사대(地, 水, 火, 風)의 화합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말이다.

화합된 것은 유일한 순수성이 없으니 그 네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나’라고 하겠는가.


이 세계가 지속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억의 능력에만 존재한다.

단 일초 이전의 세계도 이미 ‘지금(只今)’이라는 세계로 변화 했고 그 세계는 사라졌으나 사라진 자리도 없다. 과거의 세계는 ‘지금’의 이 기억에만 존재하므로 실체가 없다.

그렇다면 과연 이 ‘지금’이라는 찰나는 출처(出處)가 어딘가.

만약 조금 전의 세계가 이 ‘지금’의 세계가 되었다면 그 세계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발전되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발전되는 것이라면 세계는 멸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일체는 생겨나서 찰나마다 변화하다 사라진다. 그리고 찰나도 생겨나고 사라지는 법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큰 모래는 작은 모래로 이루어지고 작은 모래는 더 작은 모래로 이루어지듯...

그러므로 변화라는 것은 마치 형광등이 찰나적으로 반짝임을 반복하여 빛이 지속되는 듯하게 느끼게 되는 이치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한 점의 불을 들고 원을 그리며 돌리면 속도의 증가에 따라 불로 이루어진 원을 이루는 것과도 같다. 이것이 기억의 능력이다. 반짝임이란 생겨나고 즉시 사라지는 것이다. 찰나의 생멸법이다. 그러나 기억의 위대한 능력은 그 찰나의 반짝임을 연결하며 생애(生涯)를 만든다.

이러한 찰나의 생멸법과 기억능력의 화합이 또한 이 세상 물질이라는 이름의 실체인 것이니 동물의 몸도 식물의 몸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 헤아릴 수 없는 찰나 속에 어느 것을 ‘나(我)’로 삼을 것인가.


꿈은 수면 상태에서만 인식되는 것이다.

꿈은 허공에도 없고 땅에도 없으며 깨어있다고 말하는 현실세계에도 없다.

그러하듯 세상 만유는 감각에만 인식되는 것이지 그 실체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선천성 맹인에게 색깔을 증명할 수 없듯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육진(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뜻)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건전하게 가지고 있지 않다면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의 존재가치는 감각기관의 주관적판단일 뿐이다. 바로 현실이라는 세상이 ... 꿈과 같이...  이러한 것에 어찌 ‘나’의 실체가 있겠는가.


그러나 일체를 느끼는 감각기관이라 할지라도 역시 예외적으로 실체가 있을 수는 없다.

색이란 눈이 없이는 느낄 수 없지만 색을 느끼려면 눈 자체에는 색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눈에 녹내장이 생기면 세상은 온통 녹색의 세상이 된다. 그러니 건강한 눈이라면 눈 자체에는 아무런 색이 없어야 하고 역시 귀 자체에도 소리가 없어야 밖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육근(눈, 귀, 코, 혀, 몸, 감성)에는 육진이 없는 것이다.

육근은 육진을 느낄 수는 있지만 육근 차체에는 육근이 느낄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니 육근은 무엇으로도 확인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으니 투명한 채로 투명하지 않은 것을 감수하는 ‘레이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도 ‘나’는 없다.


만약 투명한 것을 ‘나’로 삼는다면 ‘나’는 생사가 없다. 투명한 것은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사라질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허공은 물질에 의하여 더럽혀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투명한 감각기관을 ‘나’로 삼는 다면 더럽혀질 수 없는 것이니 죄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나’가 있을 수 없는 물질에 어찌 생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러함이 곧 삼천대천세계의 실체임을 깨닫는 다면 ‘불살생(不殺生)’이라는 말을 ‘살생하지 마라’라고 번역할리 없다. 누가 누구를 죽이겠는가. ‘불사음(不邪淫)’이라는 말도 깨달은 자라면 어찌 ‘사음하지 마라’라고 번역하겠는가.


허망한 물질과 투명한 감각기관이 만나면 발생되는 것이 있다.

마치 처녀 총각이 만나면 각각에게는 본래 없던 자식이 탄생 되듯이...

그것이 견식(육식)이고 생각이며 번뇌와 인격, 견해를 이루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즉 정신세계를 이루는 근원이며 실체가 없는 육진과 육근이 들어있는 창고이기도 하다.

육식이 없다면 육진도 육근도 자취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인다’라는 안식이 없으면 눈을 느낄 수도 없고 색도 느낄 수가 없는 이치인 것이다.

이러하니 육식도 본래 스스로 자성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육근과 육진의 인연으로 드러나며 드러난 육식에 의해 육근과 육진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셋은 하나다. 또한 육식은 찰나마다 변화하는 육진을 따라 한 치의 틈도 없이 즉시즉시 변화하는 것이니 마치 아무리 자기의 그림자를 밟으려 해도 밟을 수 없듯이 육식은 육근을 사이에 두고 있는 거울과 같이 서로 통한 것이니 모두가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가운데 무엇을 따로 ‘나’라고 할 것인가.


‘허망한 물질(육진(六塵))’과 ‘투명한 감각기관(육근(六根))’으로 이루어진 몸이라는 것에 어떠한 견해를 갖는가에 따라 수미산 가운데 ‘세상과 자기(육식(六識))’의 위치를 스스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실체가 실체대로 느껴지고 믿어진다면 그에게는 ‘나라는 것’ ‘사람이라는 것’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 허망한 견해... 어디에 있는 지도 알 수 없는 견해에 불과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이란 단지 영원히 드러나는 ‘환상의 여행’ 가운데 한 장면임을 깨닫게 될 것이니 세상 사람들의 ‘생명이 있는 것이 맞다. 틀리다.’ ‘너다. 나다.’라는 견해를 바라보되 꿈속에서 다투는 장면을 보듯 하게 될 것이다.

꿈속에 나타나서 다투는 사람들을 욕할 것인가.

아니면 꿈인 줄 알면서 다툼을 말리겠는가.

그들이 둘인가. 하나의 꿈인가.

꿈이라는 것에서는 아무래도 좋다.

꿈인 줄 알기에 자유롭다.

그러나 아무리 현명해도 꿈을 꿈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헛것에 당하는 것처럼...

세계를 이루는 이 환상(無我)의 트리오(육진, 육근, 육식 = 십팔계)를 파악(把握)하지 못하면 생사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깨달음의 실체고 부처의 실체다. 이것이 부처의 세계고 부처의 능력이다.

이러하니

“염불삼매는 능히 모든 번뇌와 전생의 죄업을 없애 준다. 그러나 다른 삼매는 혹은 욕심만 없애고 성내는 마음은 없애지 못하며, 혹은 치심만 없애고 음욕과 성내는 마음은 없애지 못하며, 혹은 삼독은 없애고 전생의 죄업은 없애지 못한다. 그러나 염불삼매는 능히 모든 번뇌와 죄업을 없애 준다.”


라고 하는 것이며


“우리 중생들이 본래가 부처님과 똑 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들이 부처님을 염(念)할 때, 가장 먼저 부처를 이루게 된다.”


고 하는 것이니 나의 실체를 깨닫되 부처의 성품으로 이루어진 작은 부처라고... 이 작은 부처는 큰 부처와 통하여 떨어진 자리가 없는 오직 ‘지금’이니...

스스로가 부처임을 당장에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영원한 자유자재의 길을 거침없이 지어가는 것이다.

부처님 명호 중에 가장 많이 불리는 ‘나무아미타불’이란 ‘정신의 화살로 이루는 세계’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환상과 같은 정신세계를 ‘염’할 수 있는 가장 실다운 명호라고 할 수 있기에 ‘염불’에 권장을 하는 것이지 어떤 신비로운 힘이나 능력이 나타나서 도움을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소리를 내어 읽는다거나 목탁을 치며 노래를 한다거나 아무런 사유도 없이 단지 자기의 소원만을 가지고 명호를 외우되 많이... 오래...

이러한 신비적이고 기복적인 것이 ‘염불’이 아님을 깨닫는 다면 행주좌와 어묵동정 언제나 염불을 하는 것이 될 것이며 삶이라는 자체가 염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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