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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불문(禮佛文) 해설
예불문(禮佛文)이란 말은 부처님전에 처음으로 들어가서 인사를 드리는 부분이라고 이해를 하면 되겠다. 다만 그냥 절만 세 번 해도 충분하지만, 절에서는 아침과 저녁으로 이 예불문을 외우면서 절을 올린다. 절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큰 골격은 같기 때문에 이 글을 알아 둔다면 혹 나중에 절에서 예불에 동참을 할 기회가 있을 경우에는 멋지게 써먹을 가능성이 있겠다. 그래서 가장 먼저 이 경문을 선택했다. 경문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기는 하지만, 여하튼 부처님께 예를 드리는 경이라고 생각을 해도 상관은 없으므로 이렇게 이해를 해 두자.
1. 서문
戒香 定香 慧香 解脫香 解脫知見香 光明雲臺 周遍法界 供養十方 無量 佛法僧
獻香眞言 옴바으라 도비야훔(세번)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십방 무량 불법승
헌향진언 옴바으라 도비야훔(세번)
오분향(五分香)
향이 다섯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계율을 지키는 것에서 나오는 향을 사루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향도 사루고,
지혜를 닦아서 그 지혜의 향도 사루고,
그래서 해탈이 되거든 해탈의 향도 사루고,
해탈하고 지견이 생기면 그 지견의 향도 사루오리다.
하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
계향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일관성이 있는 용어가 떠오른다. 이른바 삼학(三學)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가지의 배움이라고 하게 되는데, 바로 계정혜(戒定慧)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추가로 해탈향과 해탈지견향을 사뤄서 부처님 전을 장엄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향 공양이라고 하겠다. 비싼 향 좋은 향이 많다고 하지만, 이보다 더욱 값진 향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계를 지키지 못하면 향이 되지 못하고, 정진을 하지 않으면 또한 향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지혜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가 된다. 이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다고 하는 말은 별 의미가 없다. 서로는 수레바퀴처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 이렇게 해서 멋진 향을 사루었다.
광명의 구름으로 된 누각에서나
주변의 온 세상의 모든 법계의
삼보님 전에 공양을 드립니다.
그러니까 다섯 가지의 진기한 향을 사뤄서 시방의 삼보님 전에 예를 드린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에서 시방은 동서남북과 그 사이, 그리고 위와 아래를 일러서 십방이라고 한다. 이것을 그냥 읽을 적에는 시방으로 읽는다. 참고로 불교에서는 기본 한자의 뜻이나 발음과는 다르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유학자 분들이 경전을 보기가 어렵다고 하는 말을 한다는데, 그럴만도 하겠다. 가령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고 하는 글귀를 한자로 풀이하려고 든다면 도무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도의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소리만 빌어온 외래어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뜻을 나타내는 글자인지, 아니면 소리만 따온 글자인지를 구분해야 공부하는 불자님들이 혼동을 면하게 된다.
그러니까 온 세상 허공 우주에 가득하신 거룩하신 불법승의 삼보님께 지금 예를 드립니다. 라는 의미가 포함이 된다고 보면 되겠다. 여기에서 매우 주의를 해서 봐야 할 내용이 있다. 물론 의미로 통해서 보면 되겠는데, 흔히 하는 말로 '불교는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원시적이다. 사머니즘에 가깝다.'는 식의 이교도들의 비평이 흔히 나타나게 된다. 과연 그러한지 이 대목을 보면서 한번 생각을 해보도록 하자.
※ 우상숭배인가
금강경에 이런 말씀이 있어 살펴본다.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소리로써 나를 들으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
영원토록 부처를 만나지 못하리
이렇게 되어있다. 분명히 형상으로 부처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그 속에 서릿발처럼 박혀 있다는 것을 웬만한 불자라면 능히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라고 하는 말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필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이기 때문에 다시 곰곰 생각을 해봤다. 그 결과 실은 우상숭배적인 면이 다분이 내재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분명하게 못을 박아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블교는 우상숭배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후세로 내려오면서 어리석은 중생들이 여래의 깊은 뜻은 생각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달을 가르키니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다.'는 의미가 통하게 되는 우를 범하고 만 꼴이 되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불상에 어떤 힘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어서 그 불상을 신비롭게 생각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라고 보게 된다. 가령 어느 절에서 기도를 하는데, 그 불상이 갑자기 방광을 했다고 한다면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모든 불자들은 그 불상에 대해서 신비롭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불상에도 뭐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는 해석을 해봤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과 같은 예로써 해석이 가능하겠다.
엇그제 테레비에서 자동차가 달리다가 갑자기 회선을 해서 주차장으로 끼여들어가는 장면에 대해서 누군가 질문을 한 것을 실험한다고 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 성룡이가 주연을 하는 영화에서 악당에게 붸기는 도중에 갑자기 주차장으로 끼여들어서 따돌린다는 내용이 나타나는데, 그 장면이 과연 실제로도 가능한지에 대해서 질문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승용차가 대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 차는 특별히 만들어진 차는 아니고, 그냥 보통의 차이다. 이것을 낭월이는 불상이라고 생각을 하고서 설명을 드릴 참이다. 그러니까 절에서나 박물관에서나 심지어는 무당 집에서도 만날 수가 있는 불상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믿을 것이 없는 그야말로 등신불인 셈이다. 그러니까 이 상태로써는 무슨 영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절을 한다면 미신이 되는 셈이다. 우상숭배라고 하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만약 승용차에 특별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 탔을 경우에는 어떨까를 한번 생각 해보도록 하자.
카레이스라고 이름하는 사람들 그야말로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것에 도가 튼 사람들이 그 차를 타는 순간 평범하던 승용차는 전혀 다른 차로 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회전과 주차를 자유자재로 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경이롭다고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상도 마찬가지이다. 어느날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비단 불상뿐이 아니다. 불교의 종교는 참으로 신비해서 비석에서도 이적이 일어날 수가 있고, 길가의 나무에서도 기적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항상 일어나는 일의 일부분이 불상에서 일어났다고 가정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랬을 적에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대단히 신비롭고 경이롭게 생각할 것이고, 그 운전수가 차를 떠났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차를 쳐다보면서 놀라운 마음을 그냥 갖을 수가 있겠다고 하는 생각을 해봤다. 미개인들에게 비행기를 타고 가서 급한 병을 고쳐주고 떠났는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늘을 쳐다보고 다시 기적이 일어나기를 빌고 있는 것과 같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본 것이다.
그렇다면 불상을 보고 숭배를 하는 사람도 불자는 불자지만 그야말로 어리석은 불자라고 하는 생각을 하면 충분하리라고 본다. 그리고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는 것을 아무데서나 목격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우상을 숭배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라고 생각을 해봤다. 그러니까 남들로부터 우상숭배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되어도 남의 탓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어리석은 탓이므로 나무랄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스스로 지혜로워져서 이러한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참다운 불교를 믿는 진실한 불자라고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오분향을 사루고 시방의 삼보님 전에 예를 올리는 내용을 보면 내 절에 있는 불상에게 절을 하라는 의미와는 너무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만 불상과 법당은 하나의 매개체가 될 뿐이라고 하는 의미로 해석을 해보자. 그리고 이렇게 불교를 신행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믿음이라고 하겠고, 불교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려면 이렇게 지혜롭게 신행하는 것에 대해서 먼저 알고 나서 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이들이 지혜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서 그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도 너무나 위험한 모순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분향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
獻香眞言 옴바으라 도비야 훔(세번)
향을 올리는 진언이라고 한다. 진언은 해석이 되지 않는 글귀이다. 어쩌면 신비롭게 두기 위해서 일부러 해석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없다고는 못하겠다. 그리고 해석을 할 필요도 없다. 그냥 향을 올리는 진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시방의 모든 삼보님 전에 그와 같은 계정혜의 향을 올리는 진언이라고 보면 되겠다.
※ 진언의 의미
진언은 참된 말이라고 하는 글자의 해석이 가능하겠다. 그리고 인도 말로는 다라니(多羅尼)라고 하는 말도 된다. 그러니까 다라니가 진언으로 의역된 것으로 보면 되겠다. 다리니에는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모두 알아들을 수가 없는 범어로 되어있다. 그리고 온갖 의망이 포함된 진언들이 참 많기도 한데, 모두 절절한 위치에서 자신의 몫을 하고 있으므로 그때마다 불자님들은 해당하는 진언을 외우고 발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진언만을 수행하는 종파도 있는데, 이름도 진언종이다.
불교를 다른 관점으로 나눌 적에는 밀교(密敎)와 현교(顯敎)로 나누기도 한다. 현교는 보통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고, 밀교는 비밀스럽게 전달이 되었다고 하는 부분인데, 틸로빠스님이나 나로빠 스님들이 모두 밀교의 맥을 이었다고 하는 글을 라즈니쉬 강의록에서 본 기억이 난다. 여하튼 한국의 불교 대부분은 현교에 속하므로 구태여 밀교에 대해서 생각을 할 필요는 없는데, 상식적인 차원에서 현교에서도 진언이라는 형태로 신비로운 주문을 응용하고 있다는 정도만 알면 되지 않을까 싶다.
至心歸命禮 三界導師 四生慈父 是我本師 釋迦牟尼佛(절)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절)
●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불이 항상 최우선이다.
지극한 정성으로 목숨다해 예를 드립니다.
욕계(欲界)와 색계(色界) 그리고 무색계(無色界)까지 통털어
중생을 인도하시는 크신 스승님
태란습화(胎卵濕化)의 모든 중생들의 자애로운 아버님
그리고 나의 근본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이시여.....
이와 같은 의미로써 절을 한번 올린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로써 교주이기 때문에 최우선으로 경의심을 표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그의 성도를 위해서 노력하고 또 그 깨달음을 혼자서 짊어지고 떠나지 않고, 이 중생들에게 회향을 하신 것이 너무나 큰 공덕이기에 중생들은 그 말씀이 너무나 감사하고 또 지극해서 이렇게 예의를 표하는 것이다.
삼계화택(三界火宅)
법화경에 나오는 법문이다. "자식들아, 이 삼계는 마치 불타는 집에 비유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니 너희들이 그 속에서 빨리 빠져 나올 생각은 하지 않고서 우째 그리고 표면적인 달콤함에 젖어서는 이렇게도 급박한 상황을 모른단 말이냐, 참으로 답답한 일이구나!"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불타는 집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어째서 그렇게 급하게 다그치는 말씀을 하셨을까... 이 땅은 너무나 아름답고, 주변의 사람들은 너무나 아름다운에 말이다. 아마도 어떤 이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석가모니는 염세주의자라고 생각을 할 법도 하다. 과연 앞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무리도 아니다. 그런데, 실은 그 내면에서 중생들에게 고뇌를 주고 있는 원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 더욱 중요한 의미이기 때문에 다시 음미를 해봐야 한다.
삼계는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말한다. 그 가운데에는 모두 33개의 하늘이 있다고 한다.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그냥 세계(世界)로 생각을 해도 되겠다. 여하튼 석가모니께서는 이 세계는 엄청나게 많은 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당시에 간파하셨던 모양이다. 하늘과 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는 수없이 많은 나라가 존재를 하고 그 존재 속에는 또 각양각색의 생명체들이 역시 지구와 마찬가지로 제각기 자신의 업에 의해서 삶을 꾸려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는 화엄경에 상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기도 하다.
여기서 말씀을 드릴 것은 삼계의 중에서도 우리 지구를 포함한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어디에 속하느냐는 점이다. 사바세계는 바로 지구를 포함해서 최하위 급에 속하는 욕계(欲界)의 육천(六天)에 속한다. 그러니까 욕계에도 한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섯 가지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태양계조차도 모두 사바세계의 일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대충 상상만 해도 이 세계는 끝이 없다는 말로 표현을 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봐야 하겠다. 여하튼 우리는 욕계에 살고 있으므로 모든 것은 욕(欲)으로 이뤄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하고자 함'이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밥을 먹으려고 하고, 생명을 잉태시키려고 하고, 돈을 벌려고 하고, 명예를 얻으려고 하며, 잠을 자려고 하고, 기타등등의 모든 것이 하고자 함으로 짜여진 구조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우리 사바세계의 큰 구조이다. 과연 여기에 대해서 거부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각자의 수양 정도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것을 모두 떠나서는 존재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줄려고 하고, 사랑받으려고 하는 것도 모두 욕계이다.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이 욕계의 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람으로 취급을 하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 일없는 도인은 그래서 특별취급을 받든지 바보취급을 받게 된다. 멍충이를 보면 알 일이다. 말도 할줄 모르고, 노래를 부를 줄도 모른다. 그냥 남이 욕을 해도 벙글벙글, 누가 한 대 패도 그냥 벙글벙글이다. 그런 친구가 어려서 한명 있었는데, 그보다 훨씬 어린 후배들도 그를 없신여기곤 놀리기를 일삼았다.
당시에 낭월이도 두어번 놀려 봤지만 전혀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묘하게도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뭘 하는지 모르지만, 가끔 생각나는 사람이다. 그의 행동은 바보요 천치라고 해야 하겠지만, 불문에서 공부를 하면서 가끔 그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등신이라고 한다. 과연 누가 등신일까.... 부처님의 안목으로 본다면 누구를 일러서 등신이라고 할지 자못 궁금하다. 여하튼 무엇인가 해야만 사람 취급을 받고, 또 더욱 많이 해야 영웅이라고 칭송을 한다. 이 것이 사바세계의 구조라고 이해를 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뭔가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법도 하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삼계를 이끌고 안내하는 길잡이라고 하는 것이다. 도사(導師)가 바로 그러한 의미이다. 도사(道士)와는 다른 의미이다. 부처님 자신도 길잡이라고 하는 말을 즐겨 쓰시곤 했다.
"자신은 좋은 길잡이이다. 모두 둘러보고 났기 때문이다. 가보지 않은 이에게 길의 안내를 맡기는 일은 너무나 위험하다. 내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라 모두 이치에 합당하며 자연에 부합된다. 그리고 너희를 진정한 열반의 경지로 안내하게 될 것이다. 그 곳에서 구속이 없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러나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너의 맘대로 가는 것은 너희들 몫이다. 나도 인연이 없는 중생까지는 제도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니...."
그러한 삼계의 고통을 벗어나는 길잡이로써 부처님의 존재가 등장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칭송을 드리는 삼계도사라고 하는 말은 바로 그러한 의미이다.
태란습화(胎卵濕化)
태는 탯줄이고, 란은 알이다. 그리고 습은 습기이고 화는 변화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바로 중생들 특히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태어나서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되겠다. 그럼 어떤 생명체든지 이 네가지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서 태어나는 것이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태생(胎生)
보통 네발이 달린 짐승은 태로 태어나게 된다. 탯줄을 달고 나오는 경우이므로 배꼽이 있다. 그러니까 배꼽이 있는 생명체는 모두 태생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물론 사람도 여기에 포함이 된다.
난생(卵生)
알로 태어나는 생명들을 모두 난생이라고 한다. 날아다니는 새나, 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그리고 파충류, 그리고 곤충들도 모두 난생에 속한다. 어쩌면 박씨들도 난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왜냐면 시조인 박혁거세가 박이라고 하는 알에서 나왔다고 하는 전설을 생각해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약간 생각이 바뀌었다. 그 알이라고 하는 것이 아마도 우주선의 캡슐이었을 가능성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열렸다고 하는 것과 깨었다고 하는 것은 다른데, 신라의 육부 촌장들이 모여들자 박이 열리면서 그 안에서 옥동자가 나왔다고 하는 말이 아무래도 문이 없는 박과는 종류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여담이다.
습생(濕生)
습기로 나는 것은 주로 박테리아 종류에 속한다. 물이 고이면 물고기가 생긴다는 말이 있는데, 실은 물고기가 생기기 위해서는 이미 그 속에 어떤 미생물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생물들은 습기만 있으면 생기므로 일러서 습생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미생물이라고 하면 임재혁이 떠오른다. 그 친구는 미생물만 연구하는 사람인데, 그에게 듣는 미생물의 세계는 새로운 하나의 사바세계 만큼이나 대단한 세계라고 하는 것을 인식시켜준 고마운 벗이다. 지금은 공군에 복무중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아마 미생물을 발견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화생(化生)
변화로 생겨나는 생명체를 일러서 화생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귀신과 도깨비 등이 있다. 귀신은 사람이 죽어서 변화를 한 것이기 때문에 배꼽이 없다. 혹 보신 적이 있으면 연락 해주시기 바란다. 귀신이 빼꼽이 빠졌다면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 분명할 것이다. 그냥 화생으로 존재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귀신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느냐고 하시는 벗님께는 이렇게 응답한다.
"....빙그레 미소할 뿐."
그리고 요즘은 복제를 한다는 말이 나오던데, 이것도 어쩌면 화생의 일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냥 혼자 해본 생각이다.
이렇게 해서 사생의 형태를 살펴봤거니와, 역시 그 모든 생명체들의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이라고 하는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것이다.
나의 스승
시아본사라고 하는 말이 있어서 생각을 해봤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본사라고 하는 말인데, 근본스승이라고 하는 의미가 된다. 그 말은 스승을 석가모니 한 분만 삼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스승이 있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 스승은 석가모니부처님이라고 하는 의미라고 이해를 한다. 나의 스승이라고 하는 말은 정신적으로 지주라고 하는 말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나의 스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석가모니 부처님께 목숨을 다해 의지하고 정성으로 예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된다. 참으로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는 자만 절을 하면 될 것이다. 스승이 아니라면 절을 하지 않는 것이 인도의 풍습이다. 아버지와 스승에게만 절을 하는데, 놀라운 것은 부모님이라고 하더라도, 자식이 도를 닦아서 스승이 되면 그 자식의 발에 절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어버이가 자식에게 스승의 예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도에서나 존재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우리 한국에서는 이러한 일이 냉큼 생기지 못할 것이다. 너무나 남의 눈을 의식하는 습관으로 인해서일 것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하니까 크게 신경을 쓸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식의 발에 절하는 모습은 너무나 감동적이다. 낭월이도 나중에 자식의 발에 절을 할 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가당찮은 욕심을 부려본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 부처님께 절을 한다. 그 이유는 앞에 이미 설명을 드렸다. 그러니까 법당에 모셔진 등상불에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중생을 위해서 진리를 얻어서 일러주고 베풀어 주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절을 한다는 것을 알아야 올바른 불자가 절을 한번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절을 하지 않았다면 이제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지심귀명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역사적으로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이 존재하는데, 경에는 우짠 부처님들이 그리도 많으신지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리송송하게 되는데, 알고 보면 수없이 많은 세계에서 아직도 도를 닦고 계시거나 이미 도를 이뤘거나, 앞으로 도를 이룰 부처님들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바로 벗님도 포함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본다. 참지혜를 얻어서 나도 자유롭고 남도 자유로운 경지에서 욕망을 벗어 던지고 훨훨 빈배처럼 살아보고 싶다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면 된다는 말씀을 드리겠다.
다른 부처님
다른 부처님이라고 하면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부동존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정광불. 가섭불 등등 무수히 많은 부처님의 명호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처님들은 이 땅이 아닌 다른 땅에서 부처가 되신 분들이다. 이렇게만 알고 있으면 되겠다. 그리고 각각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면 해당 경전을 보면 된다. 일 예로 아미타불이 어떤 부처인지를 알고 싶다면 아미타경을 보면 되고, 약사여래불이 어떤 부처인지를 알고저 한다면 역사여래본원경을 읽어보면 잘 알 수가 있다. 그 나머지도 역시 해당하는 경전이 있으므로 살펴보면 될 일이다.
미륵불은요?
참 문제가 많은 부처님이다. 벌써부터 이 세간에는 미를불의 러시아워를 겪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불경 속의 미륵불은 지금 나타날 시기가 아니다. 속세의 왜곡일 뿐이라고 봐야 올바른 불자이다. 미륵불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 미륵상생경과 미륵하생경을 보면 되는데, 여하튼 미래불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시기가 언제냐는 것이다. 불멸후 3천년이라고 하는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혹세무민을 하려는 무리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본다. 왜냐면 경전에는 불멸후 56억 7천만년 후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뵙고 싶고 경에는 너무 까마득하므로 아마 불멸후 3천년으로 꾸며낸 조작인 것이 틀림없다고 본다. 그런다고 되는 것이 아니련만... 쯧쯧....
지금 미륵불이 온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대로 석가모니의 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부처님 떠나신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이제 그 힘이 약화되었다는 말도 한다. 이것은 신흥종교들이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진리가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쇄약해지는가? 해가 뜨고 달이 뜨는 시기가 존재하는 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혹자는 부처님의 도력이 약해져서 부처를 믿어도 영험이 없다고 하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어쩌면 말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불교는 신통력을 얻으려고 믿는 종교가 아니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믿는다는 말도 정확한 말이 아닐 것이다. 여하튼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그 나머지는 모두 불교의 왜곡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왜곡을 통해서 이익을 보려고 하는 집단이 우후죽순처럼 많이 생겨나서 중생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것도 보도를 통해서 늘상 접하고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앞으로 벗님이라도 이러한 혹세무민에서 자신을 보호하게 되시기를 빌어본다.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佛陀耶衆(절)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절)
●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아니다.
이미 앞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도 무수히 많은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말씀을 드렸는데, 여기에서는 그 다음으로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에 대해서 예를 갖추는 순서가 되어있다. 그러한 무수히(항사하의 모래알처럼) 많은 부처님들께도 목숨다해 의지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정도 되면 믿음으로 들어가야지 이론적으로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밖에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야 이미 역사적으로도 확인이 되어 있으니까 사실이라고 하는데에는 별로 이견이 없겠지만, 그 나머지는 과연 믿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갈등을 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부처님의 말씀은 모두 믿어버리거나, 아니면 그야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은 다음에는 의아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면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시방삼세의 제망찰해이다. 여기에서 시방삼세는 십방삼세라고 써야 하겠지만, 한자의 관습상 그냥 시방이라고 한다. 시방이라고 하는 것은 열 군데의 방향을 말하는데, 東西南北과 그 중간 그리고 上下를 말한다. 동서남북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그 중간은 그 사이를 말한다. 이렇게 해서 팔방이 된다. 그리고 위와 아래를 말하니까 결론적으로 본다면 나를 중심으로 해서 모든 방향을 통털어서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중심은 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三世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말한다. 여기에서 불교다운 가치관을 볼 수가 있는데, 이미 도를 이루신 과거의 부처님이나 현재 설법을 하고 계신 현재의 부처님이야 당연히 예를 올려야 하겠지만, 특이하게도 아직은 부처가 아니지만 미래에 언젠가는 부처가 되어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님께도 예를 다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것은 불교의 광대무변한 포용력의 소산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또 한편 생각을 해보면 과연 그 당시(예불문을 만들 당시)에서 생각을 해보면 그로부터 2천 5백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항상 부처님이 탄생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 글은 후세의 불자들을 위해서 마련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안목으로는 과거현재미래가 있다고 느끼겠지만, 진리의 세계에서는 시간의 개념이 또 다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현재 이전에 대해서만 부처님을 생각하는 편견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삼세라고 하는 말을 반드시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삼세는 삼생이라고 하는 말과도 유사한데, 삼생은 전생과 금생(지금)과 다음의 생을 말하는 것이니까 약간 의미가 다르다. 삼생은 어느 하나의 개체를 중심으로 그의 삼생을 말하는 것이고, 삼세는 불특정 다수의 개체들의 시공을 초월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제망찰해는 그물처럼 얽혀있는 모든 나라 모든 세계를 말하고, 상주일체는 항상 머무르고 있다는 의미이다. 잠시 생겼다가 사라기는 것이 아니라 항상 머무르고 있는 의미가 된다. 불타야중은 부처님들의 무리라고 하는 의미므로 우주의 모든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되겠다.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達摩耶衆(절)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달마야중(절)
● 달마야중은 모든 진리를 의미한다.
앞의 문장과 상당히 닮아있다. 같은 말은 의미도 같으므로 생략하고, 달마야중이라고 하는 것만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만 생각을 해본다.
흔히 불교에 대해서 약간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글귀를 들으면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달마대사를 떠올리게 되기가 쉽다. 그런데 실제의 의미는 전혀 그와 다르다. 그 달마는 達磨라고 쓰고, 한 스님을 말하는 이름이고, 여기에서 의미하는 달마는 진리를 말한다. 즉 이 우주에서 움직이고 있는 삼라만상을 총괄하는 이치에 대해서 경외로움을 갖고 예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적게는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인과응보라던지, 열두가지 인연법이나 사후세계 등에 대해서도 예가 될 것이지만, 크게 본다면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도, 즉 부처님이 언급을 하지 않았더라도 진리에 해당하는 모든 이치에 대해서 경외로움을 갖고서 의지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불교의 포용성
누구나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 불교는 포용성이 많은 종교라고 하는 말이다. 과연 그런가를 생각해보면 틀린말이 아니라는 것을 금새 알 수가 있다. 글귀를 직역해보면 이렇다.
'시방삼세의 모든 진리에 대해서 목숨다해 의지합니다.'
이 말은 다음의 말과 비교를 해보면 느낌이 다른 것을 알게 된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에 대해서 목숨다해 의지합니다.'
이렇게 되어 있었다면 아마도 불교도 역시 하나의 인간이 많은 교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글귀가 사뭇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모든 진리에 대해서라 고하는 이 말은 종교집단에서는 여간해서 표현을 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어느 특정 교주를 중심으로 그의 이론이나 사상을 배워가면서 숭배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불교는 과연 종교인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어찌보면 진리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단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구든지 좋으니까 진리에 대해서 깨달음이 있기만 하다면 즉시로 그에게 머리를 숙이고 한수 배울 용의가 있다는 의미가 넘쳐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글이 경전에 나와 있기도 하다.
●화엄경의 의미
불교에서는 거의 대표적인 경전이라고 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경전 중에 화엄경이 있다. 이 화엄경은 원래는 大方廣佛華嚴經이라고 해야 옳은 것이다. 그냥 간단하게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한다. 대방광불화엄경의 내용은 대단히 방대해서 이 경의 전체를 읽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아마도 10분만 읽어보면 금새 낭월이가 드리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실 것이다. 이러한 경전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입법계품(入法界品)이다. 그리고 이 내용은 영화 화엄경으로도 소개가 된 내용이 되고, 극적인 요소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기를 즐겨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낭월이도 화엄경의 의미로는 이 입법계품을 생각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선재동자라고 하는 수행자가 있다. 그의 이름이 동자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오해의 소지도 있다. 동자는 10여세의 어린 남자아이에게 부여하는 명칭으로 일상 사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동자는 그와는 사뭇 다르다. 수행의 지위가 그만큼(어린아이 만큼) 순수하게 되어 있어서 무슨 이야기든지 올바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정도의 경지라고 이해를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끝없는 호기심으로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몰두하는 그야말로 사심이 없이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 빠져들어가는 사람에게 부여하는 명칭으로 이해를 하고 싶다.
이러한 경지의 선재라고 하는 수행자가 온 천하를 돌아다니면서(아마도 인도 전역이겠지만) 진리를 배우고 깨달아 가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부처님이나 스님들만 등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참으로 불교를 매력적인 종교로 만들어 가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처님이 뭔지도 모르는 목수나, 신선이나 일정 지역을 지키고 있는 귀신, 또는 돈이 많은 부자, 심지어는 몸을 팔아서 살아가는 창녀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53명의) 도인들에게 다니면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공부를 하는 과정이 자세하게 그려져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역시 창녀도 도인이 가능하다는 빈부귀천의 한계를 넘어버리는 부처님의 사상이 흐르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편견이 없는 부처님의 가르침일 것이다. 세상이 변하다 보니까 요즘은 돈이 많은 신도는 주지 스님이 접견을 하고, 돈이 없는 신도는 사무실에서 접견을 한다는 말도 가끔 들리는데, 이러한 것은 불법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을 할 수가 있다. 진정한 佛法은 그렇게 재물의 다과로 인해서 차별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자에 말법이 되어서 사자의 몸(부처님을 사자에 비유함)을 파먹고 살아가는 버러지라고 하는 혐의를 받고 있는 일부 비불교의 스님 또는 수행자들(낭월이를 포함해서)로 인해서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바닥에는 이러한 사상으로 무장을 하고 있는 것은 또한 기본이라고 본다.
여하튼 누구나 맞아들이고 환영하는 것이 불교이다. 그러므로 재물이 있고없고를 가리지 않고, 학력이 있고 없고를 가리지 않아야 부처님의 말씀에 부합이 된다. 이 말은 요즘 출가를 하는 조건에 고졸 또는 대졸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는 일부 종단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다. 누구나 부처님을 맞아들이고 스스로 수행을 하고 부처가 될 자격이 있다. 그런데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에 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 의미가 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막상 절에 가서 그것도 매우 큰절에 가서 자신은 학력이 없어서, 또는 나이가 많아서 스님이 될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적에, 과연 불법의 옹색함이라고 느끼지 않을까 싶다.
일부 행정에 몰두하고 있는 스님들의 말씀으로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자질이 떨어진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렇게 외부적인 자질을 따지는 것은 불교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그렇게 배우고 할만큼 한 출가자들도 과연 부처님의 말씀대로 수행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 분들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일부 종단에서 만들어 놓은 출가의 자격에 대한 항목은 삭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도 말법시대의 한 단면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어찌 생각을 해보면 불구자나 전과자들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불타의 마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외부적으로 체면을 지키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체면인 인간의 명예욕에 속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한 욕망은 버릴수록 좋고, 그야말로 화엄경의 세계에서 진정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라고 한다면 불구자라고 해서 거부를 할 이유가 없다. 신체가 성하면 공부를 하는 것에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불구자이기 때문에 진정한 부처님의 품을 그리워 할수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전과자들도 역시 같은 의미에서 어슬프게 대학졸업장이나 박사 학위증을 갖고 뽐내고 있는 엘리트이기는 하지만 가짜 스님처럼 보이는 분들보다는 훨씬 진지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사담이 길어졌는데, 이 홈페이지는 낭월이의 홈페이지므로 내용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생각하고 살아오는 불교에 대해서 쓸 권한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렇게 한 말에 대해서도 물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부처님의 말씀에 준해서 관찰을 하려고 노력한다. 다만 역시 한낱 중생이기 때문에 사견이 지나쳐서 진정으로 불법을 좋아하는 인연들에게 누를 끼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것은 역시 한계라고 생각을 하려고 한다. 눈 밝으신 선지식께서 메일이라도 주신다면 겸허하게 받아 들여서 자신을 돌이켜보는 기회로 삼을 준비를 항상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린다.
여하튼 화엄경은 그래서 매력덩어리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부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 홈페이지에서 화엄경을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고 통도사 홈페이지에 가보니까 그 곳에서는 화엄경에 대한 목록이 보였다. 혹 관심이 많으시면 한번 가보시기 바란다.
불자라면 그렇게 시방삼세에 가득한 모든 진리에 대해서 지극한 마음으로 머리숙여 경례를 드릴 수가 있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번 항목의 의미라고 이해를 하고 이만 줄인다.
至心歸命禮 大智文殊師利菩薩 大行普賢菩薩 大悲觀世音菩薩 大願本尊 地藏菩薩摩訶薩
지심귀명례 대지문수사리보살 대행보현보살 대비관세음보살 대원본존 지장보살 마하살(절)
● 무수한 보살마하살
여기에서는 보살들의 명호가 등장을 한다.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해서 예경을 드렸으면 이제 청정한 승가에 대해서 예를 드릴 차례가 되므로 순서를 정한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승가라고 하는 것은 아직 부처님이 되지 않은 수행자들을 일컬어서 모두 포함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 범위를 논한다면 대단히 넓은 영역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물론 부처님에 대해서 예를 올릴 적에도 그 범위가 결코 좁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시방삼세의 제망찰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함이 없는 가르침에 대해서 예를 드리는 것도 역시 간단하다고 말을 할 수는 없겠다. 더구나 이제 승가(僧家)의 수행자들에 대해서 예를 드리려고 하는 마당에서는 그야말로 항하사의 모래알과도 같은 무수히 많은 보살들이 있다고 하겠는데, 그 순서에 의해서 우선적으로 시방의 보살마하살께 예를 드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대표적인 보살 마하살은 단지 네 분이다. 그러나 그 네분 속에는 무수히 많은 보살 마하살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되겠다. 그리고 어떤 책에서는 지장보살 다음에 제존보살 마하살이 추가로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래도 나쁠 것은 없다. 오히려 더욱 상세하다고 하겠는데,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 네 분의 보살마하살을 대표로 예를 드린다면 기타의 보살은 자동으로 함께 예를 받는 셈이 되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되겠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공덕이 있길래 그 많은 보살 중에서 이 네분이 대표로 선발이 되었겠느냐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만 하겠다. 천천히 낭월이가 아는대로 설명을 해 드리겠다. 그리고 이 네분은 상당히 콤비가 좋은 인연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번 생각을 해보자.
● 문수 보살
우선 맨 먼저 나오는 보살이 문수보살이다. 이 보살은 화엄경에 주로 많이 등장을 하시는데, 그 별명은 대지혜(大智慧)이다. 그냥 지혜가 아닌 대지혜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그 지혜가 상당하리라고 하는 점을 알 수가 있겠다. 원래가 불교의 수행이 지혜를 존중하고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지혜가 크다고 선발이 되었다면 과연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고 하겠다. 특히 한국에서는 문수보살님이 기거하는 도량이 오대산(五臺山)이다. 오대산은 중국에도 있는 산인데 동명이산이다. 이름만 같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장스님의 말씀으로는 중국의 오대산과 많이 닮았다고 하는 말은 있지만, 낭월이는 아직 중국의 오대산을 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씀을 못 드리겠다. 여하튼 닮았다고 하니까 그럴 것으로 믿어보자.
여하튼 그렇게 지혜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보살이기 때문에 남을 칭찬할 적에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면 문수보살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되겠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별로 모를 가능성도 있겠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이미 상당한 일화를 간직하고 계신 보살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오대산과 인연한 사연을 말씀드리겠다.
세조임금과 오대산
세조에 대해서는 이미 나름대로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을 하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이해를 하고 있을 것으로 본다. 그의 뜻대로 왕권을 획득하고, 마음대로 조선의 팔도를 휘두르게 되면서 뭔가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다. 다만 이 내용은 설화로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정사에는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낭월이가 아는 바가 없고, 또 관심이 없다. 알고 있는 대로만 이야기를 해 드리겠다.
어느 날 밤 꿈에 단종의 어머니까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세조를 향해서 침을 뱉았는데, 그 후로 온 몸에 부스럼이 나서는 백약이 무효였다고 한다. 물론 여인의 원한이 사무치게 서려있다면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가 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조금만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짐작이 되고도 남는 일이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오대산으로 휴양을 떠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물론 상원사에서도 나름대로 자신의 부끄러운 환부를 드러낼 수가 없어서 항상 가리고 살았는데, 어느날 저녁에는 날씨도 덥고 해서 목간을 하려고 혼자 고랑을 찾아서 맑게 흐르는 물에 몸을 담궜다. 너무나 차고 시원한 그 물의 맛에 취해서 잠시 고통을 잊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찬물은 통증을 진정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등도 문지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극이 인간적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주변에는 사람이 없어서 많이 아쉬워 했는데, 마침 꼬마 하나가 옆을 지나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래서 세조는 그 꼬마를 불렀다.
"예야 이리 온~"
"부르셨어요 할아버지?"
"오냐 내기 지금 목간을 하는데, 등을 좀 밀어 줬으면 좋겠구나."
"그야 뭐 어려운 일도 아니네요. 이리 대세요."
"오냐 고맙다. 착하구나."
"그런데 할아버지 몸이 왜이래요?"
"그래... 아파서 그렇단다."
"에이 지저분해요... 이리 대세요 문질러 드릴께요."
"......"
멋적어진 세조는 가만히 있었다. 그 꿈에서 불이 튀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형수의 눈길은 아직도 생생했다. 스스로 생각을 했다.
'내가 천벌을 받고 있는 거지....'
이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꼬마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다 했어요. 가도 되겠지요?"
"그래 수고가 많았구나. 고맙다. 잘가거라~!"
"그럼 할아버지도 잘 가세요."
"그런데 얘야 어디 가서 누구에게도 이 노인의 등을 밀어줬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알겠지..."
"그러지요뭐. 그대신 할아버지도 문수보살이 등을 밀어줬다는 말을 하면 않되요. 알았지요?"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지만, 금새 꼬마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스스로 망연자실하게 그렇게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 시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낭월이의 생각으로는 이랬을 것 같다.
'아, 보살님이 친히 이 더러운 인간에게 나투셨단 말인가... 이렇게 대역죄인을 지혜로운 보살님은 용서를 하셨단 말인가. 너무나 감개무량하구나. 감사하옵니다. 보살님...'
너무도 당연하겠지만, 그 후로 몸에 난 종기는 서서히 아물어서 깨끗한 몸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불교의 위력에 매료되어서 친히 간경도감을 둬서(맞나....) 육조단경이나 기타의 언문으로 해석을 한 경전을 찍어내도록 해서 불법을 선양한 일은 실화이므로 구태여 이야기라고 할 것도 없겠다. 이것이 오대산을 배경으로 전하고 있는 이야기 한 도막이다.
어사 박문수
모두 그를 알기를 암행어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어째서 문수인지는 별로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문수보살과의 인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여하는 중요한 것은 그의 이름이 문수인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그의 탄생 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그의 가문에서는 자손이 없어서 문수의 부모는 항상 조상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자손이 귀한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처방으로 얻은 것이 바로 매일 거렁뱅이를 한 사람 데려다가 사랑채에 재우고 대접을 해서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손이 귀한 집안에서는 복을 쌓어야 한다는 의미로써 이러한 처방이 내려질 수도 있겠다.
그렇게 3년을 하루도 빼지 않고 걸인을 데려다가 재우고 먹여서 보내는 일을 하다 보니까 결국은 그 일만을 전담하는 행랑아범도 있게 되었을 것은 이해가 된다. 그래서 항상 저녁나절이 되면 이 행랑아범은 저자거리를 두리번거리다가 적당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을 데리고 오면 자신의 몫이 끝나는 거이다. 그래서 그날도 사람 하나 찾아 넣고서 놀러 가려고 열심히 거렁뱅이를 찾았지만, 해가 뉘엿뉘엿하게 넘어가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초조해진 그는 온 마실을 뒤집고 다니다가는 처마 아래에서 덜덜 떨고 있는 영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영감의 행색은 온 몸에 고름이 나와서 옷과 영겨 붙어 있었으며 그 행색은 그야말로 산송장 그 자체였다. 쳐다 보는 것 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서 도저히 데리고 갈 맘이 나지 않아서 다른 사람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아 다녔지만, 그날따라 그렇게 흔하든 거렁뱅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그 자리로 갔더니 여전히 그 자리에서 잠을 잘 요량으로 폼을 잡고 있었다.
"여보 영감 오늘은 운이 좋으이~!"
"뭔 소릴 하는거여?"
"나랑 가서 편안하게 하룻밤 자고 가더라고..."
"누가 이렇게 더러운 늙은이를 재워준담. 애초에 그런 시덥잖은 말은 마쇼."
"그게 아니랑게. 노잣돈 까지 줄걸.."
그래서 이 영감을 데리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박문수 아버지는 행랑아범이 객을 데라고 오지 않자 마음이 초조해져서는 대문 밖을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정말로 행색이 말이 아닌 영감이랑 돌아온 행랑아범을 보고서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그냥 하루 손님으로 대접을 해서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영감이 바로 문수 보살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시험에 통과를 하고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그 아들의 이름도 문수보살의 이름을 따서 박문수라고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글자는 약간 달리 했다는데, 똑같은 문수(文殊)로 하기에는 송구해서 문수(文秀)로 했다는 말이 전한다. 여하는 그가 돌아다니면서 좋은 일도 많이 했지만, 불교에 대해서는 별로 좋은 일을 못했던 모양이다.
왕에게 기껏 한다는 말이, 중이 비싼 밥을 먹고 졸고 있더라는 이야기만 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앉아서 참선을 하는 모습을 봤던 모양인데, 그게 도를 닦는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던 모양이다. 여하튼 그로 인해서 절에서는 엄청난 세금이 부과되었고, 그로부터 절에서는 나라에 진상하는 종이를 만드느라고 스님들이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이므로 생략하겠다.
오대산에서의 박문수
박문수가 그렇게 돌아 다니다가 오대산을 올랐다. 오대산에는 불교로써는 대단히 성스러운 곳이 있다. 바로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하는 곳이 정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석가모니의 묘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 곳을 둘러본 박문수는 무릎을 쳤다고 한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리는 말.
"이렇게 좋은 명당에 조상을 모셨으니, 중들이 낮잠을 자면서도 잘 먹고 살지..."
그 후로는 스님들이 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하는 묘한 대비를 이루는 그림이다. 낭월이가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인연들이 결코 한가로운 여담인 것만은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무수히 많은 이야기 속에는 알게 모르게 문수보살에 얽힌 이야기들도 함께 섞여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혜가 무척 대단하신 보살이라고 하는 것도 알아 뒀으면 더욱 좋겠다.
● 보현 보살
문수보살에 대한 이야기에 비해서 보현보살의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래도 없는 것은 아니다. 금강산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한도막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과 관세음보살의 합작품으로 전해지는 걸작이기도 한데, 그 이야기를 하려면 지면이 부족해서 다음 기회로 미루겠거니와, 보현보살에 대한 것은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에 잘 나와있는 것이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열 가지의 원력이 전해지는데, 그 중에는 중생이 환희심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다면 자신도 그 자리에 참석해서 찬탄하는 중생을 기꺼이 반기면서 그가 부처가 될 때까지 지켜주겠노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그러한 것을 보면서 행동파 보살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별명도 대행보현보살 일 것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 관세음 보살
관세음 보살에 대해서는 아마도 많이 들어 보셨을 것이다. 이미 한국에서는 대단히 활발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으면서 엄청난 팬을 확보하고 있는 보살이시다. 그리고 낭월이도 이 보살의 위력에 홀딱 반해버리기도 했으니까 나중에 신앙생활에 대한 게시판에서 그 이야기를 전해 드리도록 하고, 대자대비의 본체로써 중생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 관세음 보살에 대해서는 일단 이해를 한 것으로 봐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겠다.
● 지장 보살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영혼들의 천도를 원하는 보살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름도 지장보살(地藏菩薩)이신가보다. 땅 속에 들어있는 보살이라는 뜻일까? 지장보살은 저승에서 중생들이 고통을 덜 받도록 애를 쓰신다고 하는데, 절에서 영혼의 천도를 할 적에는 반드시 지장보살에게 기도를 하는 것도 그 인연으로 인해서이다. 여하튼 이렇게 대단한 위력을 갖고 있는 보살이고, 특히 근래에서는 더욱 지장보살의 위력이 대단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많은 무주고혼의 영혼들이 길을 못 찾고서 구천을 헤매고 다니는 인연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대단한 보살네들이 계시기 때문에 이 중생들이 혼탁한 세상을 그렇게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보살이 계시지만, 일일이 열거를 하다 보면 예불은 끝이 날 줄을 모를 것이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네 분의 보살님만 청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본다. 그리고 구체적인 이 분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해 드릴 기회가 있을 것으로 보고 이 정도로 설명을 줄이는 것을 양해 바란다.
보살과 보살 마하살의 차이
큰 차이는 없다. 다만 마하살은 더욱 위대하다는 찬사 정도로 이해를 하면 될 것이다. 그러니까 관세음 보살 마하살이라고 해도 되지만, 줄여서 그냥 관세음 보살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정도만 알고 있으면 되겠다. 즉 그냥 보살에는 마하살이 붙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될 일이다.
보살과 여자신도의 관계
내침김에 여기에도 언급을 해야 하겠다. 절에 다니는 여인을 보살이라고 이름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혼동스러울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세음보살과 신도의 보살은 어떻게 다른지도 상식으로나마 알고 있으면 좋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 차이는 전혀 다르다. 여자 신도를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와전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래는 보사(補寺)님이라고 한다. 즉 절을 도와주는 신도라는 의미 그대로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것이 아부성 발언(?)으로 변했다. 지금은 오히려 보사라고 하면 서운해하게 되는 것으로 변했다. 스스로 보살이라고 하는 말을 듣기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좋은 것이 좋다고, 더불어서 보살이라고 불러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의미와는 좀 다른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달리 생각을 해보면 전혀 무관하다고 할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보살이라고 하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보살의 의미
보살은 원래 인도의 말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인도의 말은 보리살타라고 한다는데, 이 말의 의미는 '위로는 부처를 이루면서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수행자'의 의미라고 한다. 그러니까 여자 불자도 틀림없이 부처님의 따르고 자신도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내면서 불쌍한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 주는 것으로 봐서는 틀림없는 보살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보살은 성별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다. 원래 보살은 남녀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위의 보리살타에 속하는 수행을 한다면 보살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절에서 여자 신도들에게만 보살이라고 하니까 어느 사이에 여자에게 이르는 명사가 되어 버린 것처럼 인식이 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본래의 뜻이 이렇다고 하는 것을 이해만 하고 있으면 되겠다. 이런 의미에서는 절에 다니는 신도를 보살이라고 해서 별 문제가 없겠다. 그리고 스님들도 역시 보살에 속한다고 하는 말도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원래의 큰 의미에서 보살이다. 나름대로 생각을 할 따름이라고 해야 하겠다.
至心歸命禮 靈山當時 受佛咐囑 十代弟子 十六聖 五百聖 獨修聖 乃至 千二百 諸大阿羅漢 無量聖衆
지심귀명례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독수성 내지 천이백 제대아라한 무량성중
(절)
● 부처님의 직계 제자들
순서에 의해서 우선 부처님과 크신 보살 님들에 대한 예를 드린 다음에는 부처님 당시에 계셨던 스님들에 대해서도 예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 하는 항목은 바로 그러한 대목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영산(靈山)이라고 하는 것은 영취산 또는 영축산을 말하는데, 인도의 산 이름이며 부처님께서 오래도록 머물고 계셨던 곳을 대표하게 된다. 줄여서 영산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지금도 큰 절에 가면 영산전(靈山殿)이라고 하는 법당이 있고, 그 속에는 부처님을 위시해서 스님들이 계신다. 그 의미도 역시 부처님이 계시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 해놓은 것으로 이해 해도 되겠다. 그 당시에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던 제자들이라고 하는 것이 '영산당시 수불부촉'이다. 부처님께서 후사를 부탁했던 당시에 있던 스님들이라는 말도 되겠다. 그렇다면 어떤 스님들이 계셨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 십대제자
우선 열 분의 큰 스님이다. 여기에서 큰 스님이 어찌 열 명에 불과 했겠는가를 인식해야 하겠다. 무수히 많은 지혜로운 현자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열 분의 스님을 거론하게 되는데, 각 방면에 뛰어난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되겠다.
1. 지혜제일(智慧) 사리불 존자
지혜는 불교에서 가장 존중을 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항상 최우선으로 지혜가 등장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더욱 존중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지혜가 가장 뛰어나신 분이 사리불 존자라고 하는 이야기가 된다. 무수히 많은 제자들이 계셨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는 제자는 사리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리불은 일명 사리자라고도 부르며 반야심경에 나오는 사리자도 바로 그 사리자라고 한다. 그런데 나이가 부처님보다 더 많아서인지 먼저 세상을 떠나가셨다.
2. 신통제일(神通) 목건련 존자
일명 목련존자라고도 한다. 사리불과는 속세에서부터 절친한 친구였으며 부처님께 출가를 해서는 모두 큰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 중에서도 신통력에 대해서 가장 조예가 깊었던 존자 였다고 한다. 특히 어머니를 천도하기 위해서 지옥을 헤매고 다니는 이야기는 특별히 우란분절이라고 하는 칠월 보름의 백중날을 맞이해서 더욱 많은 의미를 갖고 있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3. 다문제일(多聞) 아난 존자
일명 아난타 존자라고도 부른다. 아무래도 인도의 외래어를 한자화 시키다 보니까 다소 발음에서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그 의미는 같다. 부처님의 속가로 따져서 4촌 동생뻘이라고 한다. 형님이 출가해서 도를 이루어 자유인이 된 것을 보고서는 자신도 집을 떠나 제자가 되었는데, 부처님 곁에서 가장 오래 시중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까 보고 들은 것이 가장 많은데, 그러다 보니까 가장 많이 들어서 기억하는 존자로 별명을 얻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에 제자들이 모여서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하자는 회의를 했을 적에 가장 중요한 현장 증인이 되었던 제자이기도 하다.
4. 두타제일(頭陀) 가섭 존자
여기에서 존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다음으로 대단히 훌륭한 제자라는 의미가 된다. 가섭존자는 특히 유명한 것은 고행을 떡먹듯이(?) 잘 한다고 해서 두타 제일이라고 하는 말이 붙었는데, 부처님의 마음을 이어 받아서 1조가 된 스님이기도 하다. 그는 인물이 어지간히 못생겼던 모양이다. 부처님 탱화를 보면 왼쪽으로 머리가 하얀 못생긴 스님이 보이는데 이 분이 가섭존자이다. 참고로 아난존자는 오른쪽에서 예쁘장하게 보이는 스님이다. 그렇지만 탱화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림에 따라서는 다를 수도 있다.
5. 설법제일(說法) 부루나 존자
부루나 존자는 설법을 잘 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고단하실 경우에는 부루나에게 대신 설법을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대단한 어휘력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6. 천안제일(天眼) 아나율 존자
아나율 존자는 천민 출신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인 만인평등법에 의해서 출가를 하게 된 사람이라고 한다. 이발사였다는 것 같다. 그는 처음에는 명상을 열심히 하였는데, 차차로 게을러져서인지 명상을 하다가 자꾸 졸게 되었다. 그래서 부처님께 얼마나 야단을 맞았는지 그 후로는 눈을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부처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냥 고집을 부리다가는 눈이 멀어버렸다. 그런데 육신의 눈을 잃고 나서는 정작 천안을 얻었으니 과연 어느 것이 잘한 것인지는 한마디로 말을 할 수가 없겠다. 여기에서 천안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모든 영상을 보는 눈을 말하는 모양이다.
7. 지계제일(持戒) 우파리 존자
계행을 잘 지키기로 유명한 존자가 우파리 존자이다. 그의 계행으로 인해서 결국은 500명의 도둑들을 부처님의 제자로 만들기도 했는데, 한국에서는 가장 계행을 잘 시키신 스님으로는 통도사를 창건하신 자장율사를 꼽는다. 율사라고 하는 것은 계율에 대해서 철저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8. 해공제일(解空) 수보리 존자
해공이 뭔가 싶으실지도 모르겠다. 공의 이치를 가장 밝게 깨달았다고 하는 의미이다. 금강경에 보면 수보리라고 하는 말이 많이 등장을 하는데, 금강경은 바로 공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경이다 보니까 수보리와 이야기가 되었던 모양이다.
9. 밀행제일(密行) 라후라 존자
부처님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이다. 밀행을 제일 잘 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부처님이라서 특별대우를 할 지도 모른다는 사람들의 눈초리를 피해가면서 은밀히 좋은 일을 행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밀행제일이라고 하는 이름을 얻었는데, 그러고 보면 부처님의 아들이어서 겪은 남다른 고통도 있었던가 보다.
10. 논의제일(論議) 가전연 존자
가전연 존자는 토론에 대해서 명수였던 모양이다. 그의 논리는 부처님과 비교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단히 탁월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많은 제자들 중에서 토론의 명수로 꼽힌 것을 보면 말이다. 이상 거론을 한 열 분의 스님들이 십대제자들이시다.
● 16성 500성
열 여섯 분의 성현들, 오백 분의 성현들을 모두 묶어서 설명드린다. 16나한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 분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소림사에서는 18나한진이 유명하던가? 하여튼 십대제자와는 별도로 대우를 받는 분들이다. 그리고 오백명의 성현들은 바로 우파리 존자에게 걸려서(?) 부처님께 귀의를 한 도적놈들이다. 결국 자신들의 허물을 참회하고 수행을 열심히 해서 모두 큰 성현들이 되셨다고 하며 지금도 절에 가면 오백나한을 모신 곳이 많이 있다. 아직도 한 떼거리로 돌아다니면서 중생구제를 하고 계신다고 전한다.
● 독수성
독수성은 혼자서 도를 닦았다는 이야기이다. 독성님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나반존자를 말한다. 나반존자는 신통력이 대단하셨다는데, 어느 날에 왕이 청해서 점심 공양을 얻어 먹고서는 후원을 산책하다가 왕이 뜨락에 있는 거대한 바위를 없앴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서는 신통력으로 날려 보냈는데, 그 바위를 보고서 임신부가 아이를 지웠다고 한다. 그래서 살생을 하게 된 후로는 부처님의 곁을 떠나서 홀로 수행을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한국에도 유명한 도량이 있다.
● 1200 제자 등 무량 성현들
이번에는 몽땅 뭉뚱거려서 이야기를 한다. 부처님의 초창기에 제자들이 1200명이었다고 한다. 금강경을 설법할 당시에 참석한 제자들이 그 정도였다고 전하는데, 이들이 결국은 수행을 해서 고승이 된 모양이다. 그래서 예를 하게 된다. 그 나머지 한량없는 스님들도 모두 포함한다고 되어있다.
이상 부처님 당시에 계셨던 제자들에 대해서 예를 드리게 된다. 그냥 간단하게 글을 외우면서 절을 한번 하면 되는 것도 예불이지만, 이렇게 그 속에 들어있는 의미를 생각해 가면서 예를 드리는 것도 더욱 맛이 있는 기도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至心歸命禮 西建東進 及我海東 歷代傳燈 諸大祖師 天下宗師 一切微塵數 諸大善知識
지심귀명례 서건동진 급아해동 역대전등 제대조사 천하종사 일체미진수 제대선지식
(절)
● 중국과 한국의 고승들
서쪽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그리고 우리 한국 땅(海東)에서 대대로 내려오면서 등불을 이어오신 큰 스님들과 모든 조사님 그리고 하늘아래 무수히 많은 종사(宗師)들 또 무수히 많은 선지식 들에게 예를 드립니다.
직역을 하면 이 정도 되겠다. 여기에서 몇가지 용어가 등장을 하는데, 설명을 간단히 해 본다면 이렇다.
1. 조사(祖師)
흔히 달마조사라고 하는 말을 한다. 이 분은 인도에서 출생해서 중국으로 불법을 갖고 온 스님으로 유명하고, 근래에는 소림사의 무술을 창안했다고 해서 무술스님으로 더욱 유명한 분이다. 이 정도의 공로를 갖고 있는 분을 조사님이라고 한다. 통도사에서는 자장스님을 개산조사라고 해서 매년 재를 드리기도 하는데, 공로가 특별히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2. 종사(宗師)
조사는 불교를 모두 통털어서 말하는 것이라면 종사는 한 문중을 통털어서 말하는 의미가 되겠다. 아니면 한 시대를 풍미한 고승에게 붙여주는 말도 된다. 그리고 종사가 있고 대종사가 있는데, 승려의 계급의 명칭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가령 청담대종사는 종정을 지냈기 때문에 종사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의미가 되겠다.
3. 선지식(善知識)
지혜로운 스님들을 선지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스님이 아니라도 상관없이 지혜로운 분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여하는 대자연의 이치를 잘 알아서 수행자들에게 도움을 준다면 선지식이다. 자신도 의혹이 없고, 남도 잘 인도하는 분에게 붙이는 말이다. 덕이 높은 스님을 말한다. 특별히 벼슬은 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많은 스님들에게도 예를 드린다. 그렇다면 원효대사나 의상대사 등 한국의 모든 고승들 께도 예를 드린다는 이야기가 된다.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僧家耶衆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승가야중
(절)
● 그 나머지 모든 스님들
비록 이름은 없지만 나름대로 수행을 하면서 중생제도를 한 모든 스님들인들 어찌 없을 수가 있으랴. 그런 분들에게도 이렇게 예를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좀더 넓은 의미로 본다면 스님들 뿐만 아니라 비록 부처님의 제자는 아니더라도, 항상 깨달음을 생각하고 수행하는 모든 수행자 들께도 예를 드리는 셈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해서 예불문의 절을 하는 대목이 마무리를 하게 된다.
唯願 無盡 三寶 大慈大悲 受我頂禮 冥熏加被力 願共法界諸衆生 自他一時成佛道
유원 무진 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
● 축원과 마무리
오직 원하옵니다. 대자대비하신 삼보님 전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드리는 인연 공덕으로 부처님의 보살피심을 얻게 되어 이 우주(法界)의 모든 중생들도 나랑 함께 같은 시간에 부처의 도를 이루도록 하여 지이다.
이렇게 풀이가 되겠다. 마무리를 하면서 발원을 하게 되는 부분이다. 이 인연으로 법계의 모든 중생들도 함께 부처가 되기를 바란다는 마음은 대단한 보살의 마음이다. 내가 먼저 성불을 하고 중생은 그 다음에 하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같은 시간에 하자는 이야기이다. 별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낭월이가 보기에는 참으로 큰 마음 씀이 아닌가 싶다.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드리는 글에 대해서 설명을 드려 봤다. 변변치 못한 생각으로 드리는 설명이지만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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