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비불자님들이나

불자님들 중에서도 영가천도의 공덕에 대해 오해하거나 잘모르고 있는 부분이 많아서

 

오늘은 한국불교대학의 최봉수 교수님의 강연내용을 통해

 

영가천도와 영가천도되고 있는 과정을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설하는 내용을 통해 상세히 설명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생이 있겠나 ?

윤회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단정하냐?

니가 죽어봤냐 다음생이 있다면 전생이 있어야 하는데 ,

전생에대하여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다음생이 있는지 없는지 회의적인 반응들을 많이 보입니다.
사후세계가 50%의 확률로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사후세계를 준비하고 설계하는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저는 출가자도 안되고 수행자도 안되고 학자입니다.
자기가 전생에 무엇이 였는지 또는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찾겠는가?
이생에 지은업을 이 생에 갚으면 가볍게 끝날것인데 ,

이생에 끝나지 않으며 그 과보를 그대로 가지고 간다.


불교에서는 이런말을 한다 '선하게 살아라.' 이생에 좋지못한 업을 지었을 때 ,

그 과보를 받지 못하면 다음생에 좋지못한 결과를 받으니 조심해라. 이런말들을 합니다.


이생에 선한업을 짓고 과보를 받지못하고 죽었다.

그럼 어떻데 다음생에 그 과보를 받는가?

어떻게 받는가? 우리가 이생에 업을 지어 이생에 받지못하고, 선업이나 악업을 지었는데 어떻게 다음생에 과보를 불러들이는가?


버릇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버릇을 가져가서 그대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이생에 선업을 짓고 살던사람은 다음생에서도 버릇대로 선업을 짓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음생에 재생한다 윤회한다 무엇이 윤회할까? 버릇덩어리가 윤회한다. 다음생에 태어난다 할 때 버릇덩어리가 본질이다. 악업을 지은자는 이생에 나쁜 버릇이 남는다. 욕심많은 버릇을 가지고 있으면 다음생에도 욕심꾸러기가 되어 태어난다. 모든게 다 부서지고 흩어져도 버릇덩어리는 남아서 가는 것이다.

여기에 영가천도의 원리가 있다.

영가천도의 법칙


첫째, 습화(習和)의 법칙


우리가 지은 모든 과보는 당대에 도래하지 않는한 버릇덩어리로 되어 넘어간다.

두번째 실상 [實相] 의 법칙


다음생이 없다는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어보지 않았기에 믿을수 없는것이다. 내눈에 보이는 것만있고 내눈에 보이는것만이 맞다라는 것으로 알고 내눈에 보이지 않는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만 맞는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여기 꽃잎이 있는데 이 꽃잎이 보라색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이 꽃잎이 보라색인데 개가 들어오와서 보면 무슨색으로 보일까? 개는 무슨색이라 할까? 개가 보았을 때는 회색으로 보인다. 지금 내가 본게 다 아는게 아니다라는 것이다.


지금 허공에 모기 몇마리가 날아다니는데 우리가 볼때는 사람이 많이 앉아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기가 보았을 때는 밥들이 많이 앉아 있다. 피가 많이 앉아 있다고 할것입니다. 이 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누가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이는 내가 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밤에 동구밖에 새끼줄이 떨어져 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 보니 뱀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뱀으로 착각한 사람에게는 뱀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뱀은 그 자리에 없고, 진짜 그 자리에 있는 새끼줄은 안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부처님이 금강경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우리인생살이로 경험하는 모든일이 여몽 꿈과 같다. 우리가 생활하는 일체의 인생살이가 모두 꿈과 같다고 하셨는데, 정말 내가사는 이 세상이 꿈꾸는 세상이이다. 내가 봤다고 다 착각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짜는 숨어있다. 진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많은 것이 이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숨어있는 것을 보아야 실상이라 할 것입니다. 사람 눈에는 뭐 밖에 안 보인다? 사람눈에는 사람밖에 안보이는 것이다.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이야기를 알지요.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돼지로 보인다'하니 무학대사는 이성계를 보고 '부처님으로 보인다' 하였습니다.
이는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사람 눈에는 사람이 보이고, 개 눈에는 개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인간경계로 보이는 것밖에 못본다.

생사가 교차하는 순간 인간의 영가가 십계의 순간을 다 본다. 버릇덩어리이기 때문에 우리 육근은 가버리고 사지가 와해되어 흩어져도 버릇덩어리만 남게 되는 것이다. 순수한 버릇덩어리인 순간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본다기보다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실상의 법칙인 것입니다.


모든세상의 경계를 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지옥의 경계부터 성자의 경계가지 다 볼 수 있는 것이다.
관음사에서는 매 백중재일에 금강경을 독송한다고 들었는데 금강경의 '일체동관분'에 보면 육안, 천안,혜안, 법안, 불안 은 부처님의 다섯가지 눈 '여래수호 오종안'이라하여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보고,
혜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보고,
천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보고.
법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보고,
불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보고,


부처님은 일체존재를 있는 그대로 다 본다. 그때 우리는 실상을 봤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오종안을 갖추셨기에 실상을 다 봤다고 하는 것이다.


세번째 지향(志嚮)의 법칙( 선택의 법칙)이다.


버릇덩어리로 바뀌어 있던 영가가 모든 경계를 다 느끼고 , 그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지옥의 경계, 축생의 경계, 아귀의 경계, 천상의 경계, 성자의 초입을 선택하던 선택을 하게 되는것이다. 사람이 죽어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은 실상의 법칙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경험하기에 한경계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데 그게 지향의 법칙인 것이다. 선택한다기 보다 버릇대로 선택되어 지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버릇으로 살 때 사람으로 태어나고, 사람이 천신의 버릇덩어리라면 천상경계에 태어난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면서 나쁜 짓 만하고 골라 하고, 악한 행 만 하였다면 지옥의 경계가 끌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짐승같은 짓만 골라한 영가는 짐승경계가 땅기는 것이다. 각자가 좋아하는 것이 달라진다.


그러기에 사람이 사람으로 살면서 버릇을 잘 들여야 됩니다. 업은 지으면 끝이지만, 과보를 받지 않으면 버릇으로 남는다. 모든 경계가 내 앞에 드러날 때, 그 버릇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번뇌 망상을 없앤다 할 때의 번뇌라 하는데 번뇌는 나쁜버릇인 것이다. 아집이라 하는데, 아집과 집착은 잘못보는 버릇을 집착이라 한다. 수행은 버릇 바꾸는 노력을 '수행'이라 합니다.

불교란 종교는 나쁜버릇을 좋은 버릇으로 바꾸는종교가 불교다. 우리가 이세상에 태어나서 잘살았다 못살았다 하는것은 딱 한가지다. 내가 이생을 떠날때 이생에 가져온 버릇보다 더 좋은버릇이 많으면 잘 산거고, 이생에 올때보다 전혀 개선되지 않고 더 안좋은 버릇을 가지고 간다면 못산거다. 우리가 죽을때 가져가는 것은 딱 하나, 버릇인 것입니다. 그 버릇이 모쪼록 좋은버릇이 되어야 한다.


불교란 먼데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게 어려운것도 아니다. 갖고 온 버릇 하나하나 좋은 버릇으로 바꾸어 넘어가는 것이 불교란 종교인 것이다.


우리가 괴로운것은 나쁜 버릇 때문입니다. 번뇌는 나쁜버릇이다. 우리가 버려할 것 중에 탐.진.치 3가지가 있다. 탐은 욕심, 진은 화내는 것 , 치는 어리석음인데, 제일 문제가 고집센 사람입니다. 이 고집불통인 버릇을 버려라하는 것이다. 결국엔 우리가 죽으면 버릇으로 넘어서 실상으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선택해야 하는데, 내가 지금 갖고 있는 버릇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는 것이다.

네번째 무리의 법칙(집단의 법칙)이다.


예를 들어 극악한 무리들은 지옥을 선택하게 되는데, 지옥을 선택한 무리끼리 모이니, 그게 지옥이다. 인간의 무리는 인간의 세상을 만들고 , 지옥의 버릇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경계를 만드니 그게 지옥이요,
천신의 버릇을 가진 자들은 천신의 경계를 만드니 그게 천상이요. 그들끼리 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십악을 짓는 악업의 무리가 많아지면 천상의 세계가 작아지고, 선업을 짓는 무리들이 많아지면 지옥의 세계가 줄어든다고 한다. 다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이게 되는 것이다. 끼리끼리 모이는것, 그걸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왜 부처님법을 만났으면서 출가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이렇게 학자를 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
그게 다 버릇때문이다 성향때문인 것이다. 그건 내가 내주위를 보면 내 버릇들을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버릇덩어리를 알 수 있다. 내 주위에 어떠한 무리들이 모이는지 돌아보면 내 버릇을 알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리가 좋아야한다는 것이다.

다섯번째. 인연의법칙(인연의 원리)이다.


인연의 법칙내지는 인연의 원리에 의하여 영가의 원리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아주 극악한 버릇을 가진 극악한 영가는 지옥 ,축생에 태어날 것이고, 천상의 버릇을 가진 영가는 천상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주 착하지도 않고 아주 극악하지도 않은 이러한 버릇덩어리가 조금문제다. 괜잖은 선업을 지은 영가는 인간세상을 선택하고, 악업을 지은영가들은 지옥이나 축생을 선택하여 태어나면 된다. 선한업을 지은것도 아니고, 약간 나쁜 쪽으로 업을 짓고 죽은 영가들은 어디로 갈까? 선한업도 안지었고, 아주 극악한 업도 안지었고, 약간 나쁜 버릇덩어리들은 아귀라하는데, 모든 무리는 공간이 있지만 아귀는 공간이 없다.


공간이 없기에 떠돌아 다닙니다. 지옥,축생에도 가지 못하고, 인간도 안되고, 천생도 안되고, 머물 거주처가 없어 허공중에 떠돌아 다닌다. 중간에서 떠돌며 자기의 영역이 없기에 먹을게 없다.
지옥중생은 지옥중생이 먹을것이 있고, 짐승의 중생은 짐승이 먹을것이 있기에 먹으면 되고, 인간은 인간이 먹는 음식을 먹으면 되는 것이다. 천신은 천신의 음식을 먹는데,아귀는 주처가 없기에 아귀들만은 특정하게 먹을것이 없다는 것이다. 머물곳이 없으니 먹을것도 없는 것이다.

영가천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아귀천도이다. 우리가 백중대재를 지내고 갖은 천도재를 거행할때 주로 타켓이 되는 육도윤회의 아귀천도에 목적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조상중 아귀에 태어난 조상을 천도하는 것이다. 목적의 초점이 여기에 있다할 수 있다.


아귀(餓鬼)라는 것은 어떻게 천도해야 하는가?


아귀는 배고픔의 고통을 받는 경계에 있는 영가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프래타라는 말이 중국어로번역되면서 아귀란 말이 나온다.프래타는 프라이타에서 나온 말이다. 프라이타란 먼저간 자, 조상이라 한다. 아귀의 원어는 조상이다. 조상속에 지극히 악한업이 있는것도 아니고 선한업이 있는 것도 아닌 떠도는 조상, 중간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아귀로 떠돌고 있는 조상을 이야기 한다. 이러한 영가들은 갈데가 없어 어디든 가서 의지하고자하는 욕구가 굉장 강하다 하겠다. 자기하고 인연있는 곳에 가서 기웃된다. 살아생전 지었던 인연있는 지중한곳을 찾아가서 의지처로서 주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키로쿠타경'이 설해지게 되는 것이다.
키로는 넘어서, 쿠타는 담벼락 즉 담벼락 넘어 인연있는 아귀영가가 우글댄다는 것이다.
우리하고 인연있는 영가들이 담벼락밖에서 우글대고 있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이경에서 설하고 있다.
그 영가들을 천도하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기본적으로 습화의 법칙이라 하여 죽을때 버릇으로 바뀐다. 실상의 법칙이라 하여 모든 버릇덩어리에서는 이경계 저경계를 모두 본다. 선택의 법칙이라 하여 버릇대로 끼리끼리 모인다. 아귀의 경우는 인연의 법칙이라 하여 인연있는 이들의 옆에서 우글댄다.
이 아귀를 천도해야한다. 아귀를 천도함은 나하고 인연있는 자들은 모두 건질 수 있는 것이다. 아귀천도는 배고픔의 고통이니, 배고픔만 해결해주면 된다. 그럼 아귀들의 음식은 무엇인가? 아귀는 무엇을 음식으로 삼는가? 이것이 아니면 절대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여섯째 이희위식(以喜爲蝕)의 법칙


아귀는 기쁨을 음식으로 삼는다. 기쁨의 음식만이 아귀는 먹을수 있다고 하였다. 천도는 기쁠때 해야 한다.
기쁨이란 것이 아귀들의 음식이 되기 때문에 천도는 기쁠때 해야한다. 시간, 질, 양에 있어서 어느 수준을 넘어서는 기쁨만이 아귀에게 음식이 될 수 있다 하겠다. 시간이란 그 기쁨이 오래 지속되어야하는 기쁨이 되어야 한다. 질이란 깊이있는 기쁨이어야 한다. 양은 함께하는 기쁨이어야 한다.


우리가 기쁨을 느끼긴 하지만 그 기쁨이 대부분 금방 슬픔으로 바뀌는 기쁨인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기쁨은 슬픔을 재료로하는 기쁨인 것이다. 우리가 얻는 기쁨은 세속적 기쁨이다. 세속적인 기쁨으로는 아귀의 배고픔을 면해 줄수가 없다. 언제나 지속될 수 있는 기쁨, 정말 품위가 있고 깊이가 있는 기쁨 , 그리고 나도 좋지만 남들도 참 좋아라 하는 그런 기쁨 그러한 기쁨이라는 판단이 얻어질때 이 기쁨을 나와 인연있는 아귀영가들에게 공양합니다 할때 '아~호' 하며 해탈하는 것이다.


이것을 법식이라 그런다. 법은 일반 세계에서는 진리라 그런다. 부처님 세계에서는 법이라 그런다
법락(法樂) 법의 즐거움,진리의 즐거움 , 도의 즐거움 그러한 즐거움만이 아귀들의 굶주림을 채울수 있는 것이다. 법락이라하는데 법락은 법의 즐거움, 법의 기쁨이다. 법의 즐거움은 오래가는 즐거움 도�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은 그 깊이를 알수없는 즐거움이다.

누구나 박수치며 좋아하는 함께하는 즐거움, 법의 즐거움, 도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 수행의 즐거움, 그 즐거움이 이 세상에 가장충만한 날이 언제인가. 승자자일(僧自恣日)이며 불환희일(佛歡喜日)인 음력 7월 15일.


세상 시방의 승가의 스님들이 수행을 마무리 짓고 졸업하는 날, 그 날은 불환희일(佛歡喜日)이라 부처님도 환희하는날이다. 그 스님들을 모셔놓고 공양을 올리고 그 스님들이 소유한 법락의 즐거움을 나누어라.
법락의 즐거움을 내가 가지지 않고 어떻게 하나? 나도 스님도 부처님도 함께하는 법락의 즐거움을 나와 인연있는 영가들에게 "이 법락을 이 법식을 헌향하소서"라고 마음속으로라도 인연있는 영가들에게 올려라. 그자리에서 일도로 해탈을 한다.

내눈에 안보인다 하여 믿지 않으려 하지 말고 ,

부처님말씀 소홀히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 과소평가하지 말고
부처님말씀 정성을 기울여 음력 7월 15일까지 여러분들도 같이 법락을 느끼는 수행자처럼 살아라.


수행하는 스님들께 감사와 기쁨을 느껴라.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색깔이 우중충한 기쁨인 것이다. 스님 수행자들의 기쁨은 다르다. 그 조촐한 음식 몇그릇에 의탁하며 진리를 알고, 도를 알고, 세상을 충만케하는 기쁨이 샘솟는다. 그 기쁨만이 우리 영가들을 해탈케한다. 전혀 거부할수 없는 적법한 논리가 그속에 흐르고 있다.

첫번째 버릇의 원리,

두번째 실상의 원리,

세번째 선택의 원리,

네번째 무리의 원리,

다섯번째 인연의 원리,
여섯번째 이희위식의 법식에 의하여

영가는 천도될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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