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있는한 성불(成佛)하지 않으리


불교하면 자연 중국의 4대 불교성지를 떠올리게 된다.

4대 불교성지란 바로 중국의 아미산(峨眉山), 오대산(五臺山), 보타산(普陀山), 그리고 지장보살 도장(道場)으로 이름높은 불교성지 구화산(九華山)을 말한다.


중국 학계에서는 구화산은 중국 당나라 때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이백(이태백)과

지장보살 신라왕자 김교각(金喬覺., 서기 630~729)으로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공인하고 있다.


중국 불교계에서는 김교각을 지장보살로 공인하여 “김지장(金地藏)”으로 높이 모시고 있으며 구화산은 지장보살의 도장으로 “지장도장”이라고 해서 유명하다.


지장보살 김교각은 신라왕족출신으로 중국 당나라시기 당 고종 영회4년(唐高宗永徽四年, 서기 653년) 24세에 삭발 출가하여 지청(地聽)이라는 하얀 독각(獨角, 외뿔)의 개를 타고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건너와 불도를 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처음 김교각은 북방의 오대산을 찾았었다.


그러나 지장보살 김교각이 오대산에 오르자 오대산이 한 자나 꺼져 들어갔다.

이에 오대산이 자기가 머무를 곳이 아님을 안 지장보살 김교각은 다시 사방을 운유하던 중 구화산에 이르러 구화산의 수려(秀麗)한 산수(山水)를 보고 매료되어 산에 초당을 짓고 도를 닦기 시작했다고 한다.


초당에서 수련했던 지장보살 김교각은 목 마르면 산간 벽계수를 마시고 배가 고프면 산나물과 백토(白土, 속칭 觀音土)로 굶주림을 달랬다.
차츰 김교각스님의 덕행이 원근에 전해짐에 따라 구화산의 주인인 민공(閔公)이 구화산을 김교각스님에게 시주주어 불법을 펴게 하였다.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김교각 스님께 치성을 드리고 향을 올리는 선남선녀들이 하루에 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지장보살 김교각스님은 생전에 “중생을 제도한 뒤에야 보살과를 이루고, 지옥이 비지 않는 한 성불하지 않으리(度盡衆生, 方證普提; 地獄未空, 誓不成佛)”라는 맹세를 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지장보살님의 거룩한 맹세(地藏大愿)”라고 한다.


김교각스님은 구화산에서 75년을 수련하여 99세에 열반했다.

김교각 스님이 열반에 드실적에 산이 울면서 허물어 졌고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났으며, 김교각 스님의 시신을 함(函)에 넣어 모셨는데 3년 후에 열고 보니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고 모습이 불경에 있는 지장보살의 모습과 같았으며 뼈마디마다에서는 범패(梵唄, 불교음악)와 같은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때에야 구화산의 중들은 김교각스님이 바로 지장보살의 화신임을 알게되어 높이 모시기 시작했으며 구화산은 급기야는 지장보살 도장으로 되었는데 명나라와 청나라시대 전성기에는 사찰이 360여 곳, 승니가 5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 구화산에는 94곳의 사찰과 1만 여기의 부처, 그리고 2000여건의 문물과 700여명의 승니(僧尼)들이 있으며 해마다 지장보살 김교각스님의 탄신일인 음력 7월 30일을 계기로 구화산에서는 묘회(廟會)를 한달간 진행한다.


지금 구화산에서는 지장보살의 행적을 기리고저 높이 99미터의 지장보살 동상을 축조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중이다.


지장보살의 행적은 중국의 “고승전(高僧傳)”과 지장보살 동시대의 사람인 비관경(費冠卿)의 “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城寺記)”와 지방사서인 “구화산지(九화山志)”, “지주부지 (池州府志)” 등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김교각스님의 역사속 기록들.....

 

신라의 왕자로 태어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홀홀 단신 중국으로 건너가 구도의 삶을 살다 입적한 김교각(金喬覺)은 중국에서 ‘지장‘(地藏)이라는 법명을 받고 출가승이 되어 중국대륙을 두루 돌며 구도했다. 하지만 내란의 와중에서 날로 참혹해져 가는 민중의 삶을 지켜보면서 지장보살에 귀의하여 양자강 남쪽 구화산의 한 동굴에서 수행. 제자들과 함께 화성사를 창건하여 지장신앙을 전파하여 그 당시 중국사람들에게 낯설었던 지장신앙을 전파해 구화산을 중국 4대 불교성지의 하나로 자리잡게 했다.


지장보살 김교각은 입적한 지 3년 후 생전의 예언에 따라 육신불로 다시 세상에 화현함으로써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절대적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기에서 ‘지장’이란 스님의 행적이 지장보살의 행적과 비슷하여 붙여진 법명이며 ‘교각’이란 후세(明)에 붙여진 덕호(德號)로, ‘대각’(大覺)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본명이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김교각의 본명과 그 인적사항을 구명하고자 한다.


한편, 이와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되는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서대(西臺) 수정암(水精庵)에 ‘우통수’(于筒水)란 샘이 있는데 이 샘은 천여 년의 다양한 기록을 갖고 있다.


우통수가 자리한 서대 수정암은 상원사 남서쪽, 호령봉(1561m) 동쪽 산줄기 중턱에 위치한 암자로 해발1,200고지의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 오대산의 최고봉인 비로봉(1563.4m) 동남쪽에 위치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과 상왕봉(1491m) 남동쪽에 위치한 북대 미륵암도 서대 우통구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역사, 종교적 유적지이기도 하다.


오대산의 개산(開山)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유사>에 나타난 월정사의 창건 유래는 ‘자장(慈藏)이 당(唐)나라에서 돌아온 643년(선덕여왕 12)에 오대산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성지라고 생각하여 지금의 절터에 초암(草庵)을 짓고 머물면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서대의 북쪽에 위치한 적멸보궁은 자장이 당나라에서 가져 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이다. 적멸보궁은 모든 바깥 경계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 번뇌가 없는 보배스런 궁전이라는 뜻이다.


오대산 적멸보궁은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하던 가운데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얻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교의 성지이다. 중대에 위치한 적멸보궁은 오대산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맥들이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중앙에 우뚝 솟아 있다.


적멸보궁이 자리한 곳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 하여 용의 머리에 해당된다.
이 곳 중대는 또한 오대산 오만보살신앙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니, 곧 동대의 일만의 관음보살, 남대의 일만의 지장보살, 서대의 일만의 대세지보살, 북대의 오백 나한들이 중대 적멸보궁의 불사리(佛舍利)를 법신불로 상정하여 예배 공양을 하고 있다.


중대(中臺)의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옛부터 해동 최고의 물로 손꼽혔다. 적멸보궁 아래서 지금도 솟아나는 용안수(龍眼水), 그리고 서대(西臺)의 우통수(于筒水) 등 오대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수천리를 가도 다른 물과 어울리지 않는 우중수(牛重水)로 지금도 으뜸을 자랑한다.


본 연구에서는 오대산 우통수를 중심으로 보천태자와 김교각스님의 관계를 종교, 역사, 지리, 문화적 측면에서 고찰하고 조사 연구하여 ‘김교각스님은 누구인가’를 밝혀보고자 한다.

2. 기록에 나타난 김교각스님


(1) 김교각스님의 생몰(生沒)연대


현존하는 구화산 역사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는 당나라 원화(元和) 8년(813)에 저술된 <구화산 화성사기>(九化山化城寺記)에 지장스님이 입적한 때는 794년(貞元 10), 99세라고 기록, 이를 기준으로 출생 년대를 산출해 보면, 김교각스님의 출생 년대는 696년(신라 효소왕 5년)이다.


김교각스님연구에 중국 최고의 전문가이며 ‘김수충’이라고 최초로 발표한 중국 안경사범학원 중문과 사수전교수는 생몰연대를 서기 696-794년으로 최근 발간된 <구화산 지장성지와 동아시아의 지장신앙>(2001. 영명사)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김수충’이란 이름은 사용하지 않았다.


또 <구화산화성사지장전>(九化山化城寺地藏傳)을 비롯, 988년에 저술된 <송고승전>과 동국역경원에서 편찬(1961)한 <불교사전>에는 입적 년도를 706-803년으로 기록, 앞 책의 기록보다 9년 늦게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출생년대를 산출해 보면 김교각스님의 세속 수명은 서기 704년(聖德王 3년) 출생하여 99세인 803년(哀莊王 2년)에 열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419년에 저술된 <신승전>(神僧傳)에는 ‘개원(開元) 16년(75세) 7월 30일 밤에 성도(成道)하였다’고 기록되었는데 개원 16년은 728년으로 입적년대를 산출한 결과 752년이 되어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최고 정사로 꼽히고 있는 <삼국사기>를 비롯, <삼국유사> 등 우리나라 문헌에는 김교각스님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구화산 화성사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 문헌에는 ‘지장왕보살 김교각스님은 713년 24세의 나이로 홀연히 당나라로 건너가니 이때가 성덕왕 12년이다. 99세(794년, 정원 10)로 열반하자 제자들이 남대 지장암에 ‘육신보전’을 세우고 육신불을 안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2) 김교각은 왕자인가, 왕의 근속(近屬)인가?


지덕(至德, 756-757)에 김교각스님이 오용지(吳用之)에게 써 주었다는 ‘수혜미’(酬惠米)라는 시에서 ‘그가 왕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단옷 포의로 갈아입고/ 바다건너 도를 구하려/ 구화산을 찾아왔다네.
나는 본디 왕자였다오/ 수행의 길에서/ 사모하는 오용지를 만났네.
가르침을 주는 것만도 고맙거늘/ 이제는 이렇게 쌀까지 보내왔다네.
반찬을 준비하고/ 좋은 쌀로 밥을 지어/ 배부르게 먹고나니
지난날의 배고픔/ 모두 잊어 버렸네.

그리고 청(淸)의 성조(聖祖)의 어정(御定)인 <전당시>(全唐詩) 권8에는 ‘신라국왕자’(新羅國王子)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김교각과 동시대 사람인 비관경(費冠卿)이 지은 <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城寺記)에는 ‘신라국의 왕자인 김씨의 가까운 친족’(新羅國王金氏近屬)으로 기록되었고 송(宋)의 찬영(贊寧)이 찬한 <송고승전>(宋高僧傳) 권20권과 명(明) 태조(太祖)의 어제(御製)인 <신승전>(神僧傳) 권8에는 ‘신라국왕의 가까운 일가’(新羅國王之支屬)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논란거리로 삼고 있다.


즉 비관경의 기문은 당(唐) 헌종(憲宗) 8년(813)에 지은 것이니 김교각스님이 입적(入寂)한지 20년째이므로 ‘김교각스님은 국왕과 가까운 친족’임이 확실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김교각스님 본인은 ‘수혜미’란 시를 통해 본인은 ‘왕자’라고 기록하였다.

(3) 김교각스님과 한국의 지장사상


일본의기록에의하면,현재일본에모셔진 동어전삼수승지장존입상(東御殿三殊勝地藏尊) 일본 민달천왕(敏達天皇) 6(577) 10월에 백제로부터 전해 졌으며 지장상이 전해진 년대가 일본 지장신앙의 효시라고 <망월(望月)대사전> 4 기록되었다. 이는 백제 위덕왕 24(577) 해당하는 해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지장사상은 5세기 경에 번성하였으며 일연(一然)스님이 지은 <삼국유사> 지장사상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삼국유사> 3신라 효소왕(692-702) 시대에 보천과 효명이라는 태자는 오대산 남대(南臺) 기린산(麒麟山)에서 8 보살을 위시한 일만 지장보살의 진신을 첨례하였다 기록되어 있다. 밖에 관세음보살의 진신과 대세지보살의 진신, 문수보살의 진신 5 진신을 친견하였다고 한다. 그후 성덕왕(702-736)대에 보천태자의 유언에 따라남대의 남면(南面)지장방 건설하여 지장보살의 원만상을 안치하고 적지에 8대보살을 위시한 일만 지장상을 그려서 안치하였으며 복전오원(福田五員) 두고지장경 필서하고 독송하도록 하였다 한다
.


다음 진표율사는 27(760) 변산의 부사의방(思議房) 들어가 기도한지 7일이 지난 밤중에 지장보살이 손으로 금석(金錫) 흔들며 나타나 가사와 발우를 주어 받았다. 그리고 37일이 되어 지장과 미륵의 보살이 나타나 미륵은 이마를 만져주고 지장은 계본(戒本)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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