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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의 제목이 Wheel of Life 이군요.
인생의 수레바퀴, 또는 운명의 바퀴라고 번역되겠군요.
우리 인간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생노병사라고 하지요.
이 4가지를 4고(四苦)라고도 합니다.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도 표현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주의 실상을 바로 보시고,
삼법인 사성제 연기의 진리를 말씀하시며,
우리 중생을 8정도, 육바라밀의 수행을 해서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삶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셨습니다.
"어떤 나그네가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성난 코끼리가  나그네를 쫓아 왔어요.
나그네는 산도 건너고 물도 건너고 계속 도망을 갔습니다.
도망가지 않으면 코끼리에게 밟혀 죽으니까 계속 도망을 갔어요.
사막까지 도망을 가서 오아시스를 만났는데 거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가서 피했습니다.
그런데 그 우물 밑에는 뱀 네마리가 혀를 낼름낼름 거리면서
이 나그네를 향하여 독기를 뿜으며 내려오기만 하면 잡아먹겠다고 침을 삼키고 있었어요.
밖으로 나가자니 코끼리에게 밟혀 죽겠고 밑으로 내려가자니 뱀에게 물려죽겠고
그러면 가만히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흰쥐와 검은 쥐가 왔다갔다 하면서 나그네가 매달려 있는 밧줄을 썰고 있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그 위에 벌집 하나가 있었는데 꿀이 한방울 떨어져서
이 나그네 입속에 들어갔어요.
그 꿀이 하도 달고 맛있어서 위급한 지경에 처해 있는 것도 잊고
그 꿀 한방울을 더 얻어 먹으려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설명하면 코끼리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이 세상 삼라만상은 항상된 것이 없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변해 간다는 거에요.
이것은 사람이 피할수가 없다는 거에요.
그리고 밧줄은 인간의 생명의 끈을 의미하고
우물밑에 있는 네마리의 뱀은 생노병사 로써 인간이면 누구나 피할수 없는 운명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흰쥐와 검은쥐는 낮과 밤의 세월을 의미하는데
낮과 밤이 교차하면서 인간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죽음을 향해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는 존재이더라 하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그 꿀 한방울은 인생에 있어서 순간적인 행복과 향락과 즐거움을 의미하는데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위험한 경각에 처해 있는데도
사람들은 순간적인 행복이나 재물이나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이 말씀의 주제이고
이 말을 듣고 인생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고 깨달음의 길을 가라!
그리고 깨달아서 부처가 되어 고통없는 자가 되고,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라. (펌)
 
Buddhas of Three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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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Buddhas of Three times는 세 시대의 부처님으로 번역이 되겠군요.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 - 연등불, 석가모니불, 미륵불

초창기의 불교에서 깨달은 사람을 지칭하는 부처는 오직 석가모니뿐이었습니다.
석가모니는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서 깨달음을 얻었고 많은 중생들을 위해
가르침을 펼쳤기 때문에 그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라는 부처가 육체라는 한계를 벗어버린 열반에 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부처에 대하여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몸을 가진 사람이 완벽한 깨달음을 가진 부처가
될 수 있는가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의 몸은 불완전한 것이므로
완벽한 깨달음이라는 말의 뜻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정한 부처란 불완전한 몸이 사라진 정신적인 존재이며
진리가 스스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완전히 정신적인 존재로서의 부처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몸을 가진 채 부처가 된 석가모니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부처란 육체를 가지고 열심히 수행한 사람일 수도 있고,
진리가 스스로 나타난 정신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는
두 가지 생각이 함께 공존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한편 시간이 흐를수록 승가(僧伽) 내부에서는 석가모니께서 가르친 내용의 해석과
그에 따른 실천에 대하여 다른 견해들이 자꾸 생겨납니다.
승가 내부에서 자기 스스로 해석한 내용이 옳다는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집단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런 집단을 부파(部派)라 하며
이 시대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합니다.
기존의 해석과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부파도 나오게 되었는데
이중에서도 대중부(大衆部, Mahasanghika)라는 부파는 가장 색다른 해석을 하는
부파였습니다. 이들은 부처를 초월적인 존재로 여기는 것은 물론이고
경전에 대하여 현실에 적합하게 해석을 시도하다보니 과거와는 너무나 다른 의견을
내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중부의 주장을 보면 부처란 우리가 사는 세속적인 세계를 떠난 초월적 존재로서
무한한 생명과 힘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석가모니가 가르친 내용을 담은 모든 경전들은 완벽한 진리를 담고 있으며
석가모니라는 부처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고 사람처럼 행동한 이유는
바로 그가 사람의 길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처는 초월적인 존재로서 사실 몸이 필요 없는데 그가 몸을 가지고 태어난 이유는
인간을 깨우치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합니다.
대중부의 이론에 의하면 부처란 초월적 존재로
다양한 장소와 다양한 시기에 사람의 몸으로 나타날 수가 있기 때문에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석가모니와 같은 부처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석가모니 이외에 아주 많은 부처가 존재한다는 대승불교의 사상적 토대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대승불교 시대에 접어들자 이 땅에 태어나지 않은 가상의 부처들이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그곳에서 대중을 구제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미타불이나 약사여래 같은 부처도 실제로 인도나 한국 어디에도
태어나지 않고 저 먼 우주의 서쪽과 동쪽에 계신 부처라고 합니다.
대승불교가 가진 부처에 대한 문제점은 우리가 직접 보지 못한 가상의 많은 부처와
사람의 몸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석가모니 부처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 것인가 입니다. 또 다른 문제점은 석가모니가 부처가 되어 가르친
45년 정도의 기간 동안 과연 대승불교가 말하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아주 많은
부처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몸을 가지고 태어난 석가모니 부처와 이후 사상이 발전함에 따라 나타난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부처와 보살들이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대승경전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줄여서‘법화경’이라 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출가 후 몇 년간의 짧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오래 전에 이미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 때부터 계속 가르침을 펴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미 초월적이며 영원한 존재인 부처가 마야부인의 아들 석가모니로 태어나서 출가하고
깨달음을 얻고 가르친 까닭은 실제로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법화경]은 초월적이며 영원한 부처가 이렇게 계속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일은
과거에도 수없이 많았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태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라는 부처도 사실은 초월적이며 영원한 부처가 사람의 몸으로 자신을 드러낸
무수히 많은 현현(顯現)의 하나인 것입니다.
[법화경]은 초월적이며 영원한 부처가 사람의 몸을 지닌 부처로 언제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석가모니라는 사람의 몸을 지닌 부처와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이제 부처라는 개념은 석가모니라는 위대한 인물에서 초월적이며 영원한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됩니다.

초월적이며 영원한 부처라는 관념이 중심이 되자 사람의 몸을 가진 석가모니 부처의 존재는
점점 뒤로 물러나게 됩니다. 과거 석가모니 부처의 치열했던 인간적인 모습이 보여주던
강렬한 의미조차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부처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의 자리에 들어선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부처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그리고 화신(化身)이라는 세 개의 몸(三身)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세 부처가 존재하며
동쪽-중앙-서쪽이라는 공간에 따라 세 부처를 지칭하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세 부처를 삼세불(三世佛)이라 하고 공간에 따른 세 부처를
삼계불(三界佛)이라고 합니다.
삼신불(三身佛) 부처의 세 가지 몸이라는 삼신(三身) 중 가장 으뜸인 법신불(法身佛)은
사람의 몸과 전혀 상관없이 존재하는 영원한 본질이자 진리라고 합니다.
몸을 가지고 태어난 부처는 죽으면 사라지는데 반해 영원한 본질인 법신은 죽거나
사라짐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 법신불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과
동서남북과 상하라는 공간 속 어디라도 나타나는 모든 부처의 본래 모습이라고 합니다.
수없이 많은 시간과 공간 속에 형체를 지닌 채 나타나고 존재하는
모든 부처들의 본모습은 바로 법신불인 것입니다.
이처럼 추상적이며 영원한 본질인 법신불은 그 형상이 없지만 사람들은 글과 그림으로
그를 최대한 묘사하고 설명하려 합니다. 법신불을 묘사한 내용을 보면 그는 보편적이고,
순수하며,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으며, 끝없이 평온하고 영원하며,
어떠한 정해진 요소도 없는 존재로서 한계도 없으며, 정해진 거처도 없지만,
모든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삼신불의 두 번째 부처는 보신불(報身佛)입니다.
보신불은 초월적이며 영원한 존재인 법신불이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양을
나타낸 부처라고 합니다. 그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원(願)을 세우고,
한량없는 덕행(德行)을 쌓고, 그의 이름을 보여서 사람들을 인도하고 구제하는 부처입니다.
 
보신불의 몸은 오랫동안 여러 생을 거듭하면서 수행한 공덕의 결과 빛과 소리로
만들어졌으며 부처의 완전한 위엄과 덕망과 지혜와 복덕을 갖추고 있어 최소한 보살이
되어야 이 몸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보신불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모든 물건을 태워 그칠 줄 모르는 불처럼 사람들의 모든 번뇌(煩惱)의 숲을
태워 버리며, 모든 티끌을 불어서 날려 버리는 바람과 같이 모든 사람들의
흐트러진 마음을 쉬도록 하는 존재라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화신불(化身佛)이 있는데 화신불은 석가모니처럼 인간 세상에 나타난 부처를
말합니다. 영원한 존재로서 그 형태를 묘사할 수조차 없는 법신불이 고통받는 중생들이
불쌍해서 잠시 사람의 몸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석가모니도 화신불 중의 한 분이며 법신불이 아주 짧은 시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서 생활하다가 가르침을 펼친 다음 열반에 든 것입니다.
영원한 법신불은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한 번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차례 태어났고 미래에도 계속 그렇게 태어날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은 단지 환영(幻影)에 불과하고 현현(顯現)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법신불은 보신불과 화신불은 그 등급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보신불이나 화신불은 형체를 지닌 존재로서 우주 속에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법신불은 모든 부처의 유일하고 진정한 본체이며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헤아릴 수 없는
실재인데 반해 법신불이 잠시 형체를 가지고 나타난 보신불이나 화신불은
감히 법신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삼세불(三世佛) 석가모니는 헤아릴 수 없는 오래 전 즉, 과거에 이미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 때부터 가르침을 펴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하였습니다.
불교 경전에서는 석가모니를 포함하여 과거에 나타나신 부처가 7분이나 계신다고 하여
과거칠불(過去七佛)이라고 합니다.
이 7부처의 이름을 간략하게 나열해 보면 첫째, 비바시불(毘婆尸佛)
둘째, 시기불(尸棄佛) 셋째, 비사부불(毘舍浮佛) 넷째, 구류손불(拘留孫佛)
다섯째,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여섯째, 가섭불(迦葉佛)이며
마지막은 석가모니불입니다.
사실 석가모니 부처 이전에 6 부처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다는 근거는 하나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을
좀 더 우아하고 그럴듯하게 꾸며주기 위해 연등불이라는 과거 부처를 새로이 등장합니다.
연등불은 석가모니가 장차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내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과거라는 시간을 대표하는 부처가 됩니다.
연등불과 석가모니의 이야기는 [본생담(本生譚)]이라는 경전에 주로 담겨있습니다.
[본생담]에는 연등불 시대의 수메다(善慧)라는 동자가 살았는데
그는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으로 연등불을 위해 쌓은 공덕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잠시 그 이야기를 살펴보면 연등불께서 어느 날 ‘람마’라는 마을에 온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은 움푹 파이고 진흙탕인 길을 바삐 움직이는 중이었습니다.
수메다 또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길을 메우는 도중에 연등불께서 그 길을 지나가게 되자
수메다는 연등불께서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도록 자신의 머리카락을 길게 풀어
밟고 지나가시도록 하였답니다.
그러자 연등불은 수메다에게 이 공덕으로 다음 생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주었는데
수메다는 지금의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석가모니 부처 또한 자신이 연등불에게 다음 생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듯이 자신도 미륵에게 56억 년 뒤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내립니다.
그래서 미륵은 도솔천에서 열심히 수행 중이라고 합니다. ‘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은
‘연등불-석가모니불-미륵불’이라는 세 부처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 세 부처를 삼세불이라 부른답니다.
삼계불(三界佛) 시간을 나타내는 부처가 계신다면 공간을 나타내는 부처 또한
계실 것입니다. 공간이라고 하면 우리는 동서남북을 떠올릴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당연히 동서남북에 각각 부처가 계신다고 합니다.
이름도 어렵지만 옛사람들은 ‘동-남-서-북’으로 위치를 불렀고 그에 따라
‘보당불-개부화왕불-아미타불-천고뇌음불’이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동남서북이라는 사방에 대한 부처보다는
‘동쪽-중앙-서쪽’이라는 세 방위를 상징하는 부처를 더 많이 모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동쪽으로 아주 멀리 가면 유리광세계가 있는데
그곳에 약사여래가 계신다고 하며 또 서쪽으로 아주 멀리 가면 극락세계가 있고
그곳에는 아미타불가 계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쪽-중앙-서쪽’을 상징하는 세 분의 부처는
‘약사여래-석가모니불-아미타불’을 모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세 부처를 삼계불이라 칭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석가모니불이 가지는 종교적인 상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부처는 석가모니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불은 시간적으로 현재이자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을 뜻하며
공간적으로 중앙이자 바로 이곳을 상징합니다.
그가 2,500여 년 전에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이론적인 가공의 부처가 아니라 사람의 몸을 지닌 부처이기 때문에
언제나 현재와 가운데이자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에 계신 부처의 의미를 갖고
계신 분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펌)

Guru Padmasambhava's refuge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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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slob-dpon('스승')/Padma 'byung-gnas('蓮華生'). Guru Rimpoche라고도 함.
파드마삼바바는 8세기에 활동한 전설적인 인도의 불교 신비주의자.
티베트에 탄트라 불교를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곳에 처음 불교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주술사들로 유명한 지역인 우디아나(지금의 파키스탄 스와트)에서 태어났다.
탄트라 불교도이자 유가행파의 일원이며 인도 불교학의 중심지인 날란다에서 배웠다.
747년 티 슈리옹 데트샨 왕의 초청으로 삼예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지진을 일으켜 불교
수도원 건축을 방해하던 마귀들을 쫓아냈다고 한다.
그 수도원 건축을 감독하여 749년 완성시켰다.
티베트의 불교 종파의 하나인 닝마파('옛 질서'라는 뜻)는
탄트라적인 의례·예배·요가를 강조하며 파드마삼바바의 가르침에 자신들이
가장 가깝게 따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종파의 가르침에 핵심이 되는 문헌들은 1125년경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이 문헌들은 원래 파드마삼바바가 묻었던 것이라고 한다.
파드마삼바바는 또한 많은 탄트라 경전들을 산스크리트 원어에서 티베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파드마삼바바의 가르침-사자의 서] 

거룩한 진리에 자신의 몸과 입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
가장높고 가장좋은 직업이로다.
부귀와 재산은 환영이며 일시적 필요에 따라 차용한 것이니
그것을 너무 좋아하거나 쌓아두지 말라,
생일날 아침에도 죽음의 징조가 보이나니,
항상 주의하고 경계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마음을 집중하여 신성한 달마의길에 일신을 바쳐라,
그것이 죽음의 순간에 그대를 인도할 것이니.
아무리 올바르게 보일지라도 모든활동은 꿈이니,
행위로부터 벗어나 참다운 지식을 찾으라.
우리가 사는 이세상은 언제나 덧없어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나니,
지금이라도 먼길을 떠날 채비를 갖추라.
 
깊은 밀림속의 코뿔소는 자신이 해를 당할 염려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보아라, 정글이 불타고 있다!
코뿔소가 지금 안전한가?
생로병사의 다리를 건너는 다리는 없으니,
지금이라도 그 바다를 건널배를 건조하라,
돈이 많을수록 탐욕도 자라기 쉬우니,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히 자선을 베풀라,
힘이 클수록 악행도 많기 쉬우니,
세속적 권력을 동경하지마라.
주저 하거나 늑장 부리지마라,
목적을 이루는데 실수가 없도록,
지금이라도 용기와 확신을 가져라.
무섭고 소름끼치는 적, 죽음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 이라도 그가 올 것에 대비하라.
저녁의 그림자가 서서히 밤으로 가라앉듯 분명히,
무서운 죽음은 시시각각 잠시도 쉬지 않고 다가온다,
지금이라도 그를 꺽을 방법을 강구하라.
여름꽃은 아름다우나 가을에 시들어 죽나니,
이 덧없는 육체도 그처럼 피었다가 사라진다,
 
생명의 빛이 빛날 때 이 육신은 찬란 하지만,
죽을 때 그것의 모습은 마귀떼처럼 두렵나니,
육신의 유혹은 언제나 우리를 배반 하도다,
나쁜 사념이 일게하는 해로운적은 카르마(업)가  만들어낸 환영이니,
복수와 해악과 증오의 사념들을 던져 버려라,
겸허한 신념과 순수한 헌신은 마음에서 사악한 사념을 제거 하나니,
머리위에 자비로운 스승을 명상하라,
뼈와 살은 함께 태어나도 결국은 분리 되나니,
그대의 삶이 영속하다고 생각하지마라, 그것은 곧 끝이난다,
순수한 마음의 견고하고 안전한 참 상태를 찾아 굳게 지켜라,
그것은 변함없는 불멸의 영속성이니. 명상의 신성한 감로를 찾아서 음미하라,
삼매를 일단 맛보면 배고픔은 사라진다,
 
의식의 흐름의 신주를 깊이 들이 마셔라,
서늘하고 순수한 그것은 사시 사철 갈증을 달래주도다,
영원히 아름다운 지혜의 아이를 그대의 아들로 알고 찾으라,
그것이 결코 죽지 않는 최상의 고귀한 자손이로다,
무애(無碍)로부터 힘을 얻고 자연의 순리에 따르라,
억압과 무관심이 있어서는 안 되나니,
태어난적 없는 진리인 법신은 날을 밝히는 천체와 같아서,
그 광휘가 늘지도 줄지도 않도다, 
쾌락은 호수의 잔물결처럼 항시 덧없으니,
덧없음을 찾지마라, 그것은 착각 이로다,
운전자는 구름에 가리지 않는 태양처럼 밝고 눈부시게 빛난다,
그대 자신의 마음을(그 어두움을) 믿지마라,
자유로운 마음은 산들바람과 같아서 어떤사념에도 집착하지 않나니,
집착할 대상이 없으므로 약함을 초월하도다,
실재(진리)의 체험은 벙어리의 꿈과 같아서,
타인에게 언어로 설명할 수 없노라,
지혜의 서광은 처녀의 결혼 첫날처럼 행복하도다,
체험하기 전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네,
안과 밖의 모든창조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나니,
얼음속의 물처럼, 이것을 바르게 알려고 노력하라,
인간으로 자유롭게 태어남은 커다란 은총이니,
목적없이 인생을 낭비하는 자들은 가엾구나,
진리의 큰길은 여의주와 같아서,모든곳을 찾아도 이길 발견하기 어렵도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어떤식으로든 조달되나니,
오직 달마에 진실로 자기를 바쳐라, 젊은 시절에 고행과 인내를 실천하라,
나이들면 습관을 바꾸기 어려우니, 삶은 풀밭의 아침이슬처럼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도 마라,
달마는 구름 사이의 맑고 투명한 허공에서 비치는 햇살과 같으니,
지금 그런 햇살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현명하게 사용하라,
기쁨과 슬픔이 서로 반대되는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원인은 자기속에 있도다, 
무지에서 생겨난 환상은 모든악의 근원이로다,
의식이 항시 깨어있으면서 경계하도록하라,
억지 노력으로는 완전히 성불할 수 없나니,지혜의 갑옷을 결코 벗지마라,
 
오래도록 충족 시켜온 성벽이 행위를 결정 하노니,
과거의 행위들을 회상하지마라,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스승(부처님)에게 기도하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임을 의심하지 마라, 

Green T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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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多羅, Tara]
(티)Sgrol-ma. 다라보살이라고도 함.
다양한 형상으로 묘사되며 네팔·티베트·몽골에서 널리 숭배하는 여성 보살.
관세음보살의 여성 배우자이다.
민간 전설에 따르면 이 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눈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눈물이 땅에 떨어져 연못을 이루고,
그 연못에서 연꽃이 한 송이 피어났는데 그 연꽃 속에서 태어난 것이 타라였다고 한다.
관세음보살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피안(彼岸)의 세계로 건너가도록" 도와주는 자비와 구원의 보살이다.
이 보살은 깨달음을 향한 정신적 여행의 수호자인 동시에 해로와 육로 여행의 수호자이다.

티베트에서 신앙심 깊은 여성들은 모두 이 보살의 화현이라고 믿어진다.
티베트 최초의 불교도 왕이었던 송첸감포 왕의 두 왕비(중국인과 네팔인)도
타라의 대표적인 두 화현으로 여겨졌다.
백색 타라(산스크리트로 Sitatr, 티베트어로는 Sgrol-dkar)는 중국인 왕비로 화현했다고 보고,
순결을 상징하며, 그녀의 배우자인 관세음보살의 오른쪽에 서 있거나
활짝 핀 연꽃을 들고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흔히 묘사된다.
이 보살은 대개 3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발바닥과 손바닥에까지 눈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을 '일곱 눈의 타라'라고 하며, 몽골에서 특히 인기가 있다.
녹색 타라(Symatr/Sgrol-ljang)는 네팔인 왕비로 화현했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은 녹색 타라가 원래의 타라라고 생각한다.
녹색 타라 역시 관세음보살의 배우자이다.
이 보살은 보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치장을 하고 푸른색 연꽃 봉오리(utpala)를 들고,
오른쪽 다리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 있다.

각각 활짝 핀 연꽃과 아직 피지 않은 연꽃이라는 상징물로 대조되는 백색 타라와 녹색 타라는,
밤낮 쉬지 않고 고통받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는 타라의 한없는 자비를 상징한다고 한다.
티베트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타라의 형상은 108가지로 늘어났다.
티베트 사원의 기(旗)에는 빨간색·노란색의 다양한 21명의 타라가
녹색 타라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타라가 머리에 쓰고 있는 관에는 흔히 화신불인 아미타불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이 보살이 관세음보살과 마찬가지로 아미타불 화현의 하나라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적들을 물리칠 때 기원의 대상이 되는 무섭고 푸른 형상의 타라는 우그라타라(Ugra-Tr) 또는 에카자타(Ekaja)라고 하고,
사랑의 보살인 붉은색의 타라는 쿠루쿨라(Kurukull), 뱀의 독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타라는 장굴리(Jgul)라고 한다.
노란색의 브리쿠티(Bhku)는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성난 타라의 형상이다.
 
Dakini Mandarava (tib. mkhandro man da ra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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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스러운 존재들 '다카'와 '다키니'    
 
  ‘다카’와 ‘다키니’는 “허공을 날아다니는 신령한 존재들”을 말하는 것으로,
굳이 비유하자면 서양의 ‘요정’ 정도에 상응할 것이나 그 역할은 사뭇 다르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귀신으로써 무섭고 사나운 존재로 나타날 때도 있지만,
신비한 지식과 신통력을 지니고 있어서 현세의 이익을 베풀어주는 수호신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들 중에서 남성신격들이 ‘다카’라 불리며 여성신격들은 ‘다키니’라 불린다.
티베트 등지의 밀교권에서는 불교의 수호신으로써 '지혜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다키니’에 대한 신앙이 더 활발하다.
티베트에서 ‘다카’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대지의 신으로써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곤 하지만,
‘다키니’는 수호신으로써 뿐만 아니라 밀교의 수행법을 직접 전수하고
수행자들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들인 틸로빠나 밀라래빠가 모두 다키니로부터
밀법을 전수받은 것으로 알려지며,
일본의 조동종에서도 다키니를 “도지니천”이라는 이름으로 호법신으로 채택하고 있다.
한국불교에서도 ‘능엄주’ 진언 중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남녀수호신 다카와 다키니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특히 다키니들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 등장하기도 하며
여신이나 동물의 모습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직접 사람으로 태어나
우리 곁에 나타나곤 한다.
사람으로 태어난 다키니들은 밀교수행자들의 도반이 되기도 하고
불모(佛母, 불교예술가)가 되어 불교의 진리를 전수한다고 한다.
또한 여성의 몸으로써 위대한 성취를 이룩한 이들이 다키니가 되어 돌아와
불법을 수호한다고도 알려져 있다.
우리 주위의 훌륭한 여성수행자들이 있다면 혹 그녀가 다키니들의 화신일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다키니에 대한 설명이다.
 
 “티베트어로 카그로마(대기의 방랑자들)라 알려진 사나운 다키니들은
닝마파의 문헌에 여러차례 언급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다키니들이 어떻게 천사처럼 공중을 날며,
현인들을 먼 거리까지 운반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최고의 붓다의 배우자 혹은 ‘지혜의 배우자’인 다키니는 특별한 만트라,
요가 수행, 비전(비전) 의례 등에 관한 직접적이고 내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위대한 수행자들은 초인간적인 통찰력과 놀랄만한 힘을 얻게 해줄
비밀의 기법과 의례를 배우기 위해 다키니에게 접근했다. ”
                                                            
[티베트 삶, 신화 그리고 예술] - 마이클 윌리스
 
Palden Lhamo (skr. Shri Devi tib. dpal ldan lha 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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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jradhara Yab-Y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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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jrasattva (tib. rdo rje sems d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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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alokiteshv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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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ser Chen-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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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chenma (tib. dbyangs chan 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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