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참선이라고 하면 ‘산 속에서 스님들이나 하는 아주 어렵고 힘든 수행방법’쯤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불자들조차 직접수행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참선이 어떤 것인지 아려는 노력조차 기피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여기에 산사의 선방[선원]에서 스님들만이 하는 수행이 아니라 직장의 사무실, 통근길의 버스나 전철 안, 산책길, 심지어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동안, 청소할 때, 차를 마실 때 등 언제 어디서나 주부, 직장인, 학생, 남녀노소 구분없이 누구나 아주 쉽게 수행할 수 있는 부처님의 수행법[참선법]이 있다. 또한 이 수행법에는 종교의 제한도 없다. 불교도라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염처경(Satipatthana)의 수행법인 위빠사나가 그것이다. 부처님께서는 6년 동안 고행하시면서 당시 인도의 모든 수행법을 섭렵하셨다. 그러니 그 수행법들로는 니르바나[열반]에 이를 수 없음을 직접 경험 후에 이 수행법을 창안하셨고, 이 수행법으로 니르비나를 증득하셔서 오늘날까지 붇다[깨달은 이]로 우리 곁에 계신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정신건강을 위한 참선수행의 효과나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고도산업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개인적 또는 사회적)들은 정신과 물질의 어느 한쪽으로 (특히 물질쪽) 가치부여에서 오는 부조화 현상들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참선수행은 개인은 물론 사회의 건강에도 크게 기여하리라 본다.

  실제로도 이제 참선수행은 불교도만의 수행이 아니라 세계인의 수행법으로 확대일로에 있다.


  우리나라의 선가(禪家)는 전통적으로 조사선(祖師禪 : 간화선)의 가풍(家風)을 가지고 있으며 달마 스님 이후 역대조사 스님들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참선 수행을 해왔다. 그러나 여기에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치시고, 부처님 당시의 많은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으신 수행법을 소개한다.

  우리가 불자이고, 부처되기를 지향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이 수행법을 소승선이라고 부르고(또는 부정한 의미의 관법수행), 하열한 수행법이며, 심지어 외도의 수행법이라고까지 하면서 도외시 해왔다.

  위빠사나를 하열하고, 외도라 함은 곧 부처님의 경전[염처경]을 하열하고, 외도라 하는 것과 같다. 더 나아가서는 그 수행을 하신 부처님이나 그 외 많은 제자스님들을 하열하고, 외도라 하는 말이 되어버린다.

  조사선의 수행으로 많은 분들이 깨달음을 얻었듯이 위빠사나 수행으로도 많은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으셨다.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처음 서울에 오는 어떤 사람이 버스를 이용했다면, 기차나 비행기로 서울로 온 사람과는 교통수단이 다른만큼 여정 또한 전혀 다를 것이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물며 우리의 본사(本師)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당신이 가신 그 방법으로 가고 있다면, 또 실제 지금에 그 길을 가서 목적에 도달한 분들이 계신다면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현재의 근본불교는 그 수행법이 연기론(緣起論)적 관점­수행을 통해서 무상, 고, 무아를 깨달음이 목적­에서 출발해서인지 실천성이 소홀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요즈음 젊은 승려들 사이에서는 사회복지, 정치문제 등 여러 분야로의 사회 참여가 상당히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반해서 우리의 조사선은 실상론(實相論)적 입장­마음이 있음을 전제로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채득함[見性]­으로서 그 실천성이 뛰어나다. 육바라밀 실천의 강조가 그 예이다. 이런 근본적인 입장에서 두 수행법이 만나야 한다. 위빠사나의 구체적인 수행법과 조사선의 실천성이 만날 수만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수행법이 되지 않겠는가.

  현대사회의 다양성과 급격한 변화는 우리 인간의 인식구조를 예전과는 다르게 변화시켰으며 다양화시켜 놓았다. 수행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수행방법도 옛것(전통적인 것?)만을 고집할 수 없다. 인식구조의 다양성과 변화가 수행법에도 수용되어야 한다. 부처님의 정법이라는 범위 안에서. 조사선가의 삼조(三祖) 승찬(僧璨) 스님은 수행인의 좌우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신심명(信心銘)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으셨다.


  至道無難이요 唯嬚束擇이니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이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이것이다 저것이다 선택함을 꺼릴 뿐이다.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밝고 환하여 명백하니라.


  다시 한 번 음미해볼 일이다.


  이 작은 책자가 수행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스님들, 그리고 재가 수행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편역자로서 더 없는 기쁨이다.

  글에서 잘못된 점이 있다면 전적으로 편역자의 오류이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의 모든 인연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거룩하신 부처님.

                                        가르침.

                                        스님들께 지심귀명하옵니다.

                                        2537년 3월 봉은사 명성암에서

                                        편역자 보천 합장

Ⅰ. 위빠사나에의 초대


  위빠사나는 고통의 극복, 그리고 불행으로부터 마음의 자유를 얻기 위한, 부처님께서 직접 수행하시고 우리에게 전하신 선(禪) 수행 방법이다. 위빠사나는 팔리어로서 ‘지혜’ 혹은 ‘통찰’을 의미한다. 따라서 위빠사나는 ‘통찰’ 혹은 ‘지혜’의 선(禪)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생활하면서 접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인해 일어나는 정신적인 불균형들에서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정신적인 불균형은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으로서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걱정, 공포, 억압, 시기, 질투, 흥분, 화, 증오, 기만, 자만 등등의 많은 마음의 불유쾌한 상황 때문에 괴로워한다. 조용히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옥과 극락을 동시에 왔다갔다할 수 있는 감정에 지배되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위빠사나의 규칙적인 수행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마음을 지배, 통제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몸과 마음의 본성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점진적인 이해를 통해서 얻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지혜와 함께 얻어진다.

  이 자유의 성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위빠사나 수행의 마지막 목표를 성취한, 아라한의 성격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부처님 재세시엔 많은 스님들이 위빠사나를 수행하고서 아라한과를 얻었으며, 많은 신도들도 정신적 믿음과 행복을 얻고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낮은 단계의 성인이 되었다.

  아라한은 존재의 실상을 완전하게 꿰뚫어보며 항상 고요하고 평화롭다. 또 어떠한 환경의 변화나 역경에도 동요되지 않는다. 아라한은 어떠한 경우에 부딪히더라도 고요함과 평정과 지혜로써 대응한다. 이와 같이 아라한은 모든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아라한에게는 괴로움이 없다. 걱정이 없고 불안이 없으며 항상 조용하고 침착하다.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고 조용하고 한결같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경지이다.

  병과 같은 육체적인 고통조차도 아라한은 결코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또 그들의 마음은 육체적 고통으로 인하여 압박받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요함과 침착함을 유지하고 인내와 용기로써 고통을 참을 수 있다. 아라한은 아픔의 일시성, 그리고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에 집중할 수 있다. 종국에는 육체적 고통과 함께 죽음이 닥쳐도 그들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윤회를 벗어난 것이다.

  태어남[生]이 없으므로 늙음[老], 병듦[病], 죽음[死]이 없다. 그러므로 고통도 없다. 아라한은 열반에 들어 정신과 물질이 정지된 상태, 곧 고통의 소멸에 이른다. 열반은 행복과 평화의 극치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아라한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하룻밤 사이에 아라한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그 방향으로, 바른 길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이 길을 따라 수행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점차적으로 고요하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기쁨, 조용함, 희열, 평온, 지혜 등의 열매를 즐길 수 있다. 또 생활에서 직면하는 변화들, 예를 들어 득과 실,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등에도 훨씬 더 균형잡히게 대처할 것이다. 우리의 생활을 평화와 기쁨으로 바꿔놓는, 냉정하게 정리되어진, 한가운데 중도(中道)에 머물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2500년 전에 그 길을 발견하셨다. 당신께선 우리 모두에게 그것을 가르쳐주고자 하셨으며 마음이 정화되고 고통이 소멸되는 길에 이르는 방법에 귀기울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셨다.

  부처님 당시의 많은 수행자들은 그들의 마음을 지배, 통제할 수 있는 경지를 얻었다. 그들은 정신과 육체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수행으로써 대자유를 얻었다.

  위빠사나 수행법은 스님들과 재가신도들에 의해서 다음 세대로 계속 전해져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행을 할 기회를 놓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고 큰 손실이다.

  만약, 이 황금의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는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를 잃어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위빠사나의 가르침은 과학적이며, 교리나 신앙의 설명이 필요없다. 그냥 수행하고 결과를 스스로 관찰하면 된다. 정신상태의 명확한 변화를 경험할 때 이 수행의 가치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우리의 마음이 단련되고 통제되는지 알고, 어떻게 더 고요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부처님 가르침의 위대성을 실감할 것이다. 팔리어 경전에서는 부처님을 신과 사람의 견줄 데 없는 스승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렇지만 단순한 신앙으로 부처님을 믿으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 수행하고, 스스로 결과를 경험하기를 권한다. 그리고나서 믿는다. 단순한 믿음으로서의 신앙이 아니라 직접수행을 통한 경험과 검증의 신앙이다.

  부처님께서는 “와서 보라.” 라는 말로 우리에게 권하신다.


  “너는 내가 말한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다만, 와서 경험하고 스스로 발견해라. 그러면 너는 인정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


  이 말은 우리를 초대하고, 각자가 와서 스스로 경험하고 보라는 말이다.


Ⅱ. 위빠사나란 무엇인가?


  위빠사나는 본질적으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관찰은 모든 현상이 영구적이지 못하고[無常], 불만족하며[苦], 실체가 없음[無我]을 이해하도록 이끌 것이다. 이것에 대해선 나중에 더 설명한다.

  위빠사나는 정신적, 육체적 작용에의 마음집중이 수반된다. 예를 들면 우리 몸에서 딱딱함, 부드러움, 긴장, 굳음, 이완, 차가움, 따뜻함 등의 감각들을 관찰한다.

  부처님께선 이들 현상을 근원적인 물질의 성질로서 설명했다. 물질은 땅[地], 물[水], 불[火], 바람[風]의 4대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이 4대 요소는 문자그대로 땅, 물, 불, 바람이 아니라 어떤 성질을 표현하는 말로 쓴 것이다.

  예를 들어 딱딱함과 부드러움은 땅 요소의 성질이고, 점착(粘着)성과 유동성은 물 요소의 성질, 따뜻함과 차가움은 불 요소의 성질, 긴장, 운동, 유지[지탱]는 바람 요소의 성질이다. 이들 요소들이 몸과 물질을 구성하는 궁극적 실제라고 말한다.

  딱딱함과 부드러움, 차가움과 따뜻함 등 여러 육체적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결국 그런 현상들이 순간 순간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어떻게 원래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일어나서 붕괴되고 소멸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면밀한 집중이 어렵지만, 끈덕지게 정진하고 마음집중을 발전시키면 재빠르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들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 관찰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하는 여섯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로 확대될 것이다. 연속하여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을 독특한 방법으로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는 과정, 즉 보는 의식의 일어났다 사라짐이다. ‘듣는 것’ 등 다른 다섯 가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걷기 등의 육체적 움직임에도 역시 동작의 연속을 관찰할 수 있다. 사람의 동작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매우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 지나가는 셀 수 없이 많은 운동들의 연속으로 관찰한다.

  육체의 현상에서처럼 정신작용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실, 정신작용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물질보다 훨씬 더 빠르다. 우리는 생각들을 마음이 아니라 생각이 단순히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으로 관찰할 수 있다. 개념으로나 지적인 이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험적인 이해만이 존재의 세 가지 본질적 특성을 깨닫게 할 것이다.

  세상에는 안정된 것이 없다. 우리는 어느 것 하나도 잡을 수 없다. 다만, 이것들은 상황에 의해서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영구불변이란 없다. 일어난 모든 것은 사라진다. 몸과 마음에서 빠르게 일어나는 이 진실을 알게 됨은 우리가 더 나은 인생과 변화를 갖게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로 실재의 생활에서 현명하고 편견없는 태도를 배양하게 될 것이다. 해야 할 일들을 책임성 있게 그 전보다 더 잘 계속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소중히 하고 더 잘 보살펴 줄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친절과 연민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상황에 애착을 갖거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유지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무상(無常)의 이해는 사랑하는 사람이 가버렸을 때도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또 좋은 상황이 지나가버렸다든지, 미운 사람이 생겼을 때도 태연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이것이 존재의 실상임을 이해하면, 현상들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가슴아파하거나 우울해 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침착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충분히 성숙된다.

  일어남의 본성을 가진 것은 결과로서 사라져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다른 방법을 원함은 슬픔과 고통을 자초할 뿐이라는 지혜만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수행자는 지혜가 성숙된다.

  수행자는 세상 속에 살지만 초월해 있다. 선과 악, 좋아함과 싫어함, 슬픔과 행복 등의 이원성을 초월한다.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고요와 평정에 머문다.

  무상의 이해는 고제(고제 :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진리)를 인정한다. 아픔과 병, 살인과 죽음같은 고통의 명백한 일어남을 볼 때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 명백한 고통을 보다 더 분명하게 안다. 기쁨이나 행복의 상태 또한 변화하는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에서 고(苦)의 속성을 이해한다. 기쁨이나 행복이 지나갔을 때 괴로움이나 고통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이런 까닭에 애착을 갖지 않는다. 그것들의 일시적인 속성[無常性]을 이해한다. 그러므로 행복이 사라져버렸을 때도 수행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변화의 속성을 가진 고통의 본성을 너무 잘 이해하기 때문에 탄식하거나, 슬퍼하거나, 비탄에 빠지지도 않고 우울해 하지도 않는다.

  더 나아가서 위빠사나 수행자는 고통의 속성을 구성조직으로 이해한다.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고통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압박감을 주는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이제 위빠사나 수행자는 영구불변의 행복을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완전한 평화에 도달한 상태이자, 현상의 계속적인 흐름이 고요해진 상태 즉, 니르바나[열반]를 얻고자 한다. 이런 까닭에 수행에 꾸준히 힘쓰는 동안 칸다(정신과 물질의 집합체)의 무거운 짐을 참고 견딘다.

  이제 몸과 마음은 ‘산카라(조직)’나 ‘조건지어진 조직들’로 간주된다.

  우리는 매일 먹고, 입고, 씻고, 소변보고, 대변보고, 필요할 때 약을 먹는 등 몸을 돌보아야 한다. 그리고 안락한 생활과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 필요한 수입을 얻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압박받고, 걱정하고, 화내는 것 때문에 몸에 병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마음도 돌보아야 한다.

  수행자는 이 마음과 몸이 가지고 있는 조직들에서 고통의 속성을 이해한다. 고통을 용기와 인내로서 참아낸다. 의무들을 흔쾌히, 삶의 진실로 받아들이고 이행하기를 힘쓴다. 그러나 이제 목표를 가졌고 방향감각이 생겼다. 모든 고통의 소멸을 향해 가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을 계속하고 모든 행동들은 높은 지혜를 얻기 위해 매진한다. 자비심이 많아지고, 다른 사람을 도우며 고통받는 모든 것들에 연민을 갖는다.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投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와 같은 도덕성을 갖게 되고 이런 까닭에 주위 사람들에게 섬세하고, 사려깊게 보여진다.

  무상(無常)의 이해는 무아(無我)의 이해로 이어진다. 수행자는 점점 더 헌신적이 된다. 무상의 깨달음은 결국 ‘나’라고 할 자아나 영원한 실체는 없음을 이해하게 한다. 모든 것은 항상 그저 흘러가는 상태일 뿐이다. 단지 조건들에 의해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정신과 물질의 계속적인 진행일 뿐이다.

  자아를 환상으로 이해한다. 소위 ‘나’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진행[작용]들을 자아, ‘나’ 혹은 자신으로 동일시함으로써 고통은 더해진다. 자존심은 자꾸 커지고 무엇인가 잘 되지 않을 때마다 그가 생각하는 ‘나’는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수행자는 ‘그것은 단지 조건들에 의해 일어났다 사라지는 진행[작용]이다’라고 이해한다. “그것은 나, 나 자신이다.”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고통도 단순하게 소위 정신과 육체의 일어났다 사라지는 끊임없는 작용으로써 관찰한다. 이 작용들과 분리해서는 인격이라고 할 것이 없다. ‘나’에게 집요하게 집착하지 않으므로 고통도 없다.

  아라한은 무명(無明)의 껍질을 완전하게 벗겨냈고 어떠한 정신적 고통도 겪지 않는다. 그는 정신과 육체를 조건에 의지한 단순한 ‘현상의 존재’로 깨닫는다. 이 경계는 수수께끼같은 다음의 시로써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통만이 있지만 고통은 없다.

  행위가 있다. 행위자는 없다.

  열반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 든 사람은 없다.

  길이 있다. 그러나 그 길을 본 여행자는 없다.


  게다가 무아는 궁극적인 통제자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몸을 우리는 ‘이렇게 유지하자’ 혹은 ‘저렇게 유지하자’라고 말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어떤 조건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몸이 아플 수도 있다. 우리 의지로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다. 우리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을 만들기­약을 먹는다든가­로 노력을 대신해야 한다. 결국은 역시 점점 늙어서 죽을 것이다.

  이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전지전능하신 신(神)조차도 피할 수 없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쇠퇴하고 죽는다. 생존을 위한 조건들을 가능하면 긴[long] 일어나고 사라짐의 작용으로 조절할 수 없음을 수행자는 깨닫는다.

  무아의 진리를 인정하고, 정진을 꾸준히 힘쓴다면 정신과 물질의 일어나고 사라짐의 끝인 니르바나의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아주 깊고 독특한 평화를 경험한다.

  부처님의 열반을 인정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평화를 스스로 체험해야 한다. 음식의 맛은 먹어봐야 알 수 있듯이 니르바나를 경험한 수행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성스러움의 첫단계인 예류과(預流果)를 증득하고, 정진을 계속함으로써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아라한과를 증득한다.

  첫단계에서의 지혜는 아라한과와 비교해서 아직 다소 모자란다. 증오와 탐욕이 현저히 줄었지만 아직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완전하게 조복받을 수 있는 아라한과를 얻을 때까지 정진을 계속하면 차츰 마음을 완전하게 조복받을 수 있다.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면 티끌만큼의 탐욕, 증오, 망상조차도 없게 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완전한 고요와 평화에 도달한다.

  아라한은 모든 것을 완성한 분이다. 그는 이제 생사의 윤회를 벗어났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므로 죽음도 없다. 고통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인 니르바나를 증득한다.


Ⅲ. 마음집중의 효과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육체적, 정신적 작용에 마음을 집중하고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마음집중이 어떻게 무상, 고, 무아의 특성을 이해하게 하는지도 알았으며, 이들 특성의 이해가 어떻게 평온하고 지혜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지도 알았다. 이제 이 마음집중 수행을 통해서 어떻게 좋은 효과가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마음집중함이란 단지 ‘육체적, 정신적 활동을 알아차림’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때고 마음집중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걸음을 걸을 때도 마음집중을 할 수 있다. 걸을 때 매 걸음마다 ‘왼발’, ‘오른발’하든지, ‘걸음’, ‘걸음’함으로써 걸도 있음을 알아차린다.

  이렇게 매 동작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도 그냥 걷고 있음에 마음집중을 할 수도 있다. 같은 방법을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들에 적용할 수 있다. 앉을 때, 일어날 때, 누울 때, 팔을 뻗거나 굽힐 때, 전화수화기를 잡고 들어올릴 때, 문을 여닫을 때, 생리적 욕구가 일어날 대, 양치질 할 때, 차를 마실 때 등등 끝이 없다.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주의하고 알아차림의 대상들이다. 그러면 이렇게 하여 얻어지는 효과가 무엇일까? 또 목적은 무엇이고, 왜 우리가 하는 모든 작은 일에 마음집중을 해야 할까?

  우리들의 마음은 보통 이런 저런 일에 대해서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등 하잘 것 없는 일들을 생각하면서 종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변하곤 한다. 일상의 행동들이 생각과 선입견 때문에 현재에 충실하지 않고 방황할 때가 많다. 이와 같이 우리는 순간 순간의 현재에 살지 못한다.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여기 저기 방황하게 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잘 할 수 없다. 습관을 바꾸기가 어려워서 여기 저기, 수시로 변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까닭에 마음집중 수행을 알고 처음 시작해보면 쉬울듯한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게 된다. 도무지 마음집중의 대상에 주목하고 마음을 모아 머물 수가 없다. 매번 다시 마음을 현재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이런 상태를 아는 것 자체가 진전되고 있음의 증거이다. 일단 마음이 얼마나 자주 산란해지는지를 알게 되면 현재의 상태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이전에는 마음이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했다. 마음이 산란해지면 그냥 그대로 인정했지만 이제는 마음이 산란해짐을 알고 억제하려고 한다. 법구경(法句經)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지난 과거 내 마음은

  정처없이 방황하며

  좋은 것을 따라 그를 즐겼었다.

  이제 나는 조련사가

  발정한 코끼리를 다스리듯이

  지혜로써 마음을 다스릴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현재에 머물 수 있으며, 하고 있는 일에 더 집중하고, 마음은 아주 특별한 평화와 고요함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방황이 멈춰지므로써 마음은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지며 긴장감이 풀어진다.

  이제 걱정없이 밝게 매일 매일이 평화롭게 지나간다. 게다가 집중력도 발전해서 해야할 일에 오랫동안 주의깊게 몰두할 수 있어 결과적으로 일을 효과적으로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잡다한 일이 거의 없어지고 매일 해야할 일을 미루지 않게 된다.

  또한 마음집중은 기억력을 증진시킨다. 어떤 일을 기억하고자 할 때 그날의 일들을 쉽게 기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놓아둔 곳을 기억해내려 한다고 하자. 그 물건을 놓아둘 때 주의깊게 놓아두었기 때문에 작은 노력으로도 쉽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발견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육체적인 행동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상태에도 마음집중을 한다. 행복이나 불행이 일어날 때 알아챈다. 화, 우울, 공포, 불안, 걱정, 슬픔, 절망들이 일어날 때

일어남을 알게 된다. 이런 감정들로 인하여 넋을 잃게 되지는 않는다. 기쁠 때나 행복할 때도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영원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우쭐대지 않는다. 슬플 때도 역시 슬픔을 저지할 수 있고 의기소침해 하지 않는 등 오랫동안 그런 상태에 있지 않는다.

  마음집중을 하지 않고 이런 정신적 상태를 모르고 관찰하지 않는다면 그런 상황들에 그냥 휘말려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점점 더 비참해질 것이고, 정신상태에 더 큰 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챌 수 있을 때 그 여세는 꺾여버린다. 점점 더 주목을 함으로써 그 힘은 줄어든다.

  또한 마음집중은 부정적인 경향의 마음을 긍정적인 상태로 돌려놓기 위한 휴식의 시간을 준다. 법, 용기, 인내, 참을성, 힘, 지혜와 유해한 상태에서의 극복을 도울 수 있는 긍정적인 힘을 현명하게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면 마음집중으로써 화내는 것을 억제할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화가 났을 때 감정에 휘말려 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본성을 잃고 감정을 폭발시켜서 다른 사람에게 달려들든지 소리를 지른다. 극단의 경우에는 사람을 때리거나 발로 무엇을 찬다거나 문을 부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마음집중이 습관화되어 있다면, 화가 처음 일어나는 순간부터 알아채고 이 화를 잡아채어 주목함으로써 화의 감정은 힘을 잃고 침몰해 버릴 것이다. 게다가 화를 내는 것이 우리 마음에 얼마나 해롭고, 나쁜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킬 여러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마음집중은 화와 같은 감정들의 억제를 돕는다.

  요컨대 마음집중은 어떠한 상황에도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보통 즐거운 대상을 만나면 갈망으로 반응하고, 불쾌한 대상을 만나면 혐오감으로 반응한다. 마음집중은 우리가 고요하고 침착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中道)에 머물러 냉정하고 안정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가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마음집중의 효과이다.

  서양의 정신병리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은 벌써 오래 전에 마음집중의 효과를 인정해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으며 환자 치료를 위한 방법으로도 이용하고 있다.

  위빠사나는 감정의 억압이 전혀 수반되지 않는다. 그냥 일어나는 현상을 지켜보고, 인정하고 또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다. 어떤 의미에서는 초연한 관찰자처럼 된다. 경험하는 것을 ‘나’, ‘자신’, ‘자아’와 동일시하지 않고 조건에 의거해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단순한 과정으로 간주한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더 가볍고 쉽게 살아갈 수 있다.

  또한 서구의 의사들은 마음의 상태가 육체적 건강과 밀접하게 관련됨을 발견했다. 질병은 마음상태의 불행이 원인이 되어 나타날 수 있다. 우울, 걱정, 공포, 불행 등의 연장은 암이나 심장질환같은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체내의 화학적 불균형과 다른 혼란을 가져온다. 정신상태의 불건전은 또한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떨어뜨려 질병에 더 약하게 한다. 다른 연구들에서 보면 화나 흥분은 혈압, 심장박동, 산소 소비를 증가시키는 부신호르몬 생성의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공포나 불안은 장내에 보통보다 많은 양의 산의 분비를 촉진시켜 장내의 점막을 상하게 하므로 궤양의 원인이 된다. 또한 긴장상태의 연장은 자율신경계통을 해쳐서 소화기능과 배설기능에 영향을 주어 변비의 원인이 되게도 한다. 한편, 마음의 평화로운 상태가 육체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도 발견했다. 질병은 마음의 상태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몸과 마음 양쪽의 건강에 효과가 있는 선 수행을 권장한다.

  경전에 의하면 사마디[삼매]에 들어 있을 때 환희와 희열을 경험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건강한 세포나 체내의 물질 생성에 관계한다. 그래서 수행이 일정한 수준의 궤도에 오르면 만성적인 질병까지도 치료가 된다. 그런 경우 악성종양(암)까지 치료된 사례가 있다.

  이와 같이 선 수행은 정신건강과 더불어 육체의 건강에도 대단히 유익하다. 이것은 오늘날과 같이 정신없이 바쁘고 긴장이 연속되는 생활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마음집중의 다른 효과들 또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궁극적으로 지혜의 증득은 최고의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주어 수행을 해본 사람은 스스로 마음집중의 효과를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선 수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작은 책자가 선에 흥미를 갖게 해서 직접 수행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Ⅳ. 수행의 실제


  위빠사나의 수행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섯 감각기관(眼․耳․鼻․舌․身․意)과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육체적 작용의 관찰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공부의 대상이 다를 수 있지만, 모두 부처님께서 설하신 염처경을 기초로 한다.

  이 책에서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수행되고 있는 마하시 스님(버어마)에 의해 확립되어진 수행법을 소개하겠다. 여기에서는 간단하고 기초적인 것들을 소개했는데 혼자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 수행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수행하는 중에도 자주 수행 경험이 있는 스님을 찾아서 지도를 받는 것이 좋다. (남방의 선원에서는 거의 매일 혹은 격일로 큰스님께서 수행점검을 하고 지도를 해주신다.) 기초 수행 단계로써 제일 좋은 방법은 단기 출가(수행하는 동안 집을 떠나 선원에서 생활하는 것)로, 집중적으로 수행법을 익힐 수 있는 이상적인 형태이다. 우리 나라에도 하루빨리 스님이든 일반 신도이든 누구나 원할 때는 찾아가서 수행할 수 있는 위빠사나 선원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1. 좌선 (坐禪)


  (1) 앉는 방법

  염처경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숲 속 나무 아래나 조용한 곳에 가서 자리를 잡고 다리를 포개고 앉은 다음 몸을 바르게 세우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우선 수행자는 간편하고 느슨한 옷차림을 하고, 좌선하는 동안 방해를 받지 않을 가급적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다리를 포개고 앉는다.

  결가부좌가 가장 안정된 자세이긴 하지만 어려우면 반결부좌나 그 밖의 편한 자세로 앉아도 된다.

  요즘 우리 나라도 입식문화가 보편화되어 다리를 겹치고 바닥에 앉는 자세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수행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렵더라도 의자를 사용하지 않고 앉는 버릇을 들이는 것이 좋다. 이 경우에 일어나는 다리의 통증도 위빠사나에서 좋은 공부의 주제이다. 이렇게 해서  전체 앉은 자세가 삼각형 모양으로 안정되게 한다.

  다음, 허리에 힘을 약간 주어 등과 머리를 곧게 세운다. 이때 너무 힘을 주어 뻣뻣해도 안되고 힘을 너무 빼서 느슨해도 안된다. 어깨를 한 번 올렸다가 내려뜨려 어깨에 힘을 빼고 편하게 한다. 오른쪽 손바닥 위에 왼손을 올려놓아 엄지손가락 끝이 서로 닿게 해서 다리 위에 올려놓는다. 그 다음 눈을 가볍게 감으면 준비는 끝난다.


  결가부좌 : 양쪽 발을 반대쪽 다리의 허벅지 위에 완전히 올려놓는다.

  손의 모양 :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손을 포개고 엄지손가락이 서로 살며시 닿게 한다.

  반결가부좌 : 한족 발만을 반대쪽 다리 위나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다.

  다른 방법 : 양발을 모두 반대쪽 다리 위에 올려놓지 않고 바닥에 닿게 놓는다.


  (2) 호흡에 마음 집중하기

  숨을 들이쉴 때 배가 팽창되고 내쉴 때 배가 수축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바로 이 두 동작에 주목한다. 호흡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한다. 배가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려고 억지로 숨을 크게 쉴 필요는 없다. 숨을 들이쉴 때 배가 일어나는 동작에 주목하고 숨을 내쉴 때 배가 꺼지는 동작에 주목한다.

  들이쉬거나 내쉴 때, 각각 일어나는 배의 움직임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배에 마음을 밀착하여 한 순간도 틈을 주지 말고 따라간다. 수행의 기초단계에 배의 일어남과 꺼짐의 동작을 분명히 느끼지 못한다면 한 손, 또는 두 손을 배에 대고 할 수도 있다.

  배의 일어나고 꺼지는 동작이 일어날 때 각각 ‘일어남’, ‘꺼짐’이라고 마음속으로 뇌인다. 입 속에서 우물거리거나 소리를 내지 말고 마음으로만 해야한다.

  이 이름 붙이기는 마음을 집중의 대상에 주목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어나는 동작에 얼마나 마음을 밀착시켜 따라 가고, 주목할 수 있느냐이다.

  일어남이나 꺼짐에의 마음 집중은 일어남과 꺼짐의 동작과 동시에 되어야 한다. 일어남과 꺼짐이 항상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짧게, 빠르게, 느리게, 분명하게, 불분명하게, 굵게, 섬세하게, 긴장되게, 느슨하게, 계속적으로 혹은 단속적으로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일어나는 대로 관찰하고 주목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수행을 통해서 결국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의 무상함과 고(苦), 무아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일어남'과 ‘꺼짐’의 동작은 바람요소의 특성­동작, 이완, 긴장, 견고함 등­이 주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작들을 관찰할 때 염처경의 '물질적 요소에의 마음집중' 에서 나오는 바람요소의 설정을 실제로 관찰한다.

  여기서 설명하는 내용들은 수행에 관련된 이론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실제 수행하는 동안은 이렇게 생각하거나 분석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아! 이 동작은 바람의 요소이고 저 딱딱함은 땅의 요소이다." 등으로 생각하거나 분석해서는 안된다. 일어나는 것들을 생각이나 분석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느낌들을 알아채고 관찰해야 한다.


  (3) 마음집중이 흩어질 때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는 배의 '일어남'과 '꺼짐'에 주목할 때 자주 마음이 흩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마음이 흩어지면 그 흩어진 상태를 알아채고 '흩어짐', '흩어짐' 또는 '생각', '생각'하면서 흩어진 상태에 주목한다.

  또 생각으로 걱정을 하고 있으면 '걱정'. '걱정'하면서 그 상태에 주목하고,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있으면 '계획', '계획', 상상하면 '상상', '상상', 과거를 회상하면 '회상', '회상', 하는 방법으로 그 상태에 마음을  집중한다. 이렇게 마음집중을 하고 있으면 저절로 생각이 끊어질 것이다. 그러면 다시 배의 '일어남'과 '꺼짐'의 상태에 마음을 집중한다.

  이상의 설명에서처럼 위빠사나 선에서는 끊고 버려야 할 생각(망상)이 없다. 집중하던 곳에서 마음이 흩어져 다른 곳으로 가면 그곳을 다시 집중하면 된다. 즉, 망상조차도 공부의 대상이 된다.

  만약, 어떤 소리에 주의가 끌리면 '들림', '들림'하고 주목하다가 더 이상 주목하지 않게 되면 다시 돌아와서 '일어남', '꺼짐'을 한다. 또 몸의 어떤 부위나 얼굴이 가려우면 '가려움', '가려움'하고 주목한다. 일어나는 감각에 마음을 밀착시켜 그  감각이 어떻게 변하는지, 더 강렬해지는지, 사라지는지를 세밀하게 관찰하도록 노력한다.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이어서 긁고 싶어지면 긁고자 하는 의도에 주목한다. 그리고 나서도 아직 긁지 말고 잠시 동안 기다려보고 더 집중하다 보면 긁고 싶은 욕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긁고 싶은 욕구가 강해지면 긁을 수 있다. 그런데 아주 천천히 해야 한다. 긁는 동작을 포함한 모든 동작 즉, 가려운 부위쪽으로 손을 들어올림, 닿음, 긁음, 시원한 감각, 본래의 자리로 손을 옮겨놓는 동작을 빠짐없이 관찰한다.

  가려울 때처럼 아플 때도 '아픔'. '아픔'한다. 찌르는 듯한 아픔인지, 에이는 듯한 아픔인지, 잡아당기는 듯한 아픔, 또는 뒤틀리는 아픔인지 아픔의 종류를 알고 면밀하게 관찰한다. 또 아픔이 그대로인지 변하는지, 아픈 부위가 한곳인지 주위에 옮겨 다니는지 이런 방법으로 아픔의 여러 가지 양태에 주목한다. 정신적인 저항없이 고요하고 초연하게 아픔에 주목한다. 아픔이 사라지기를 혹은 그대로 있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만약 아픔이 사라지기를 바란다면 사라지기를 바라는 욕구에 주목해야 한다. 아픔이 사라지든지 그대로 있든지에는 초연해야 한다. 만약, 이런 방법으로 주목할 수 있다면 아픔을 참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아픔은 우리를 빈틈없이 깨어있게 하기 때문에 위빠사나 선의 좋은 수행 대상이다.

  이 아픔에 주목하기(느낌에 마음집중하기)를 통해서도 역시 니르바나[열반]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아픔이 사라지면 다시 배의 '일어남'과 '꺼짐'에 주목한다. 아픔을 참을 수 없게 되어 다리를 바꾸거나 몸을 펴고자 할 때는 가려움에 주목할 때와 같은 요령으로 즉시 바꾸지 않는다. 바꿔놓고 싶은 욕구에 주목하고 아픔에 조금 더 주목한 다음 그래도 바꿔야 갰다면 아주 천천히 모든 움직임에 집중하고 관찰하면서 자세를 바꿔야 한다.

  침착하지 못함, 지루함, 졸림, 혐오감, 화, 갈망 등의 여러 가지 정신적 상태들이 좌선 중에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상태가 일어날 때도 역시 먼저 알아채고 주목한 다음 다시 배의 일어남과 꺼짐으로 돌아간다. 좌선을 하는 동안 어떤 빛이나 환상 등이 나타날 수도 있는데 역시 그때도 이 빛이나 상(相)을 '보임', '보임'하면서 주목한다. 이들 빛이나 상에 너무 오래 주목해서는 안된다. 잠시 주목한 다음 다시 '일어남'과 '꺼짐'에  주목한다.

  초보자는 배의 '일어남'과 '꺼짐'에 주목하기를 끈기 있게 해야한다. 끈덕진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어남과 '꺼짐'을 관찰할 수 없을 때는 '앉음'과 '닿음'을 주목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일어남'과 '꺼짐'에 주목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봐야 한다. '일어남'과 '꺼짐'이 공부의 좋은 재료이고 많은 수행자들이 이것에 집중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칠이고 혹은 몇 주 동안이라도 배의 '일어남'과 '꺼짐'에의 집중이 선명해질 때까지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어남', '꺼짐'이 분명해지지 않으면, 그때 '앉음'과 '닿음'에 주목할 수 있다. '앉음'에 주목할 때는 바로 앉아 있음을 알아채면 된다. 그냥 똑바로 앉아 있음을 알면 된다. '앉음'하면서 바른 자세에 주목하고, 그런 다음 오른쪽 엉덩이가 바닥에 닿는 감각에 주목한다. 다시 '앉음', 이어서 '닿음'하는데 이번에는 두손이 같이 놓여져 있는 감각에 주목한다. 다시 '앉음'에  주목하고, 이어서 왼쪽 엉덩이의 '닿음'에 주목한다. 다시 '앉음', 이어서 '닿음' 하는데 이번에는 두손이 같이 놓여져 있는 감각에 주목한다. 이런 방법으로 세곳에 '닿음'을 하는데 매번 교대로 '앉음'도 같이한다. 즉 '앉음', '닿음Ⅰ’, '앉음', '닿음Ⅱ', '앉음', '닿음Ⅲ’의 방법으로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앉음'과 '닿음'의 주목을 일정하게 빠른 속도로 할 수 있게 되고 '닿음'의 지점에 점점 더 분명하게 마음 집중이 된다. '앉음'과 '닿음'에 집중하는 동안 배의 '일어남'과 '꺼짐'이 분명해지면 다시 '일어남'과 '꺼짐'의 집중으로 돌아간다.


  2. 걷기 선 (行禪)


  걷기 선은 염처경에서 비구들에게 '걸을 때는 걷는 것을 알라' 라고 말씀하신 '몸에 집중하기' 장에 있는 수행법이다. 염처경 21장의 어느 수행법을 통해서도 지혜의 완성인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

  걷기 선은 수행자의 노력(힘) 기능을 자극해서 좌선을 주의 깊고 빈틈없이 하도록 돕는다. 걷기 선이 없는 긴 시간의 좌선은 노력, 또는 힘과의 균형을 잃은 과도한 정신집중이 될 수 있어 나태함이나 졸음이 끼여들 수도 있다. 그래서 집중적인 수행(단기출가) 때는 걷기 선 한시간, 좌선  한 시간씩으로 걷기와 앉기의 균형을 맞춘다.

  선원에서는 보통 하루 열 다섯 시간씩 정진을 하는데 걷기선 일곱 시간, 좌선 여덟 시간으로 시간 배정을 한다. 수행자는 물론 그 외의 시간(공양, 목욕, 화장실 사용 등)에도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마음집중을 해야 한다.

  걷기 선을 할 장소는 열 다섯에서 스무보 정도 거리의 방안이나 그 밖에 방해받지 않을 조용한  곳이면 좋다. (한적한 공원, 강가 ,바닷가 등이라면 아주 좋은 걷기 선의 좋은 장소가 된다.)

  먼저 바로 서서 양손을 앞으로, 또는 뒤로 모아서 서로 맞잡고 눈을 반쯤만 뜬다. (이 때 반쯤 뜨는 것이 어려우면 그냥 평소처럼 뜨고 있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처음엔 어렵더라도 계속 노력하면 곧 익숙해질 것이다.) 고개를 약간 숙여도 되지만 너무 숙여서 발이 시야에 들에 오거나, 목이 아프거나 해선 안된다. 걷기를 할 때 의식적으로 발을 너무 높이 들지 않는다. 또 걷기를 하는 동안 이곳 저곳 주위를 둘러봐서도 안된다. 이 수행을 하는 동안만이라도 밖으로 향한 시각을 내면의 세계에 집중 해보자. 걷기 정진을 하는 중에 둘러보고 싶은 생각을 일으키는 요소가 생기면 보고 싶은 생각에 잠시 집중하면 된다.

  좌선 전에는 반드시 시간을 안배해서 걷기 선을 해야 한다. 「In this very life」에서는 걷기 선의 효과로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를 꼽고 있다.


  첫째, 먼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유지하게 하고,

  둘째, 선 자체의 수행을 위한 힘을 얻을 수 있고,

  셋째, 좌선과 걷기 선의 균형은 몸을 건강하게 해서 수행의 빠른 진전을 돕고,

  넷째, 걷기 선은 소화를 돕는다. 또 새벽잠에서 깨어 바로 좌선을 할 때 생기는 졸음을 피할 수 있는 좋은 수행법이고,

  다섯째, 좌선 전의 걷기 선은 좌선 때의 마음 집중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


  걷기 선은 다음과 같이 여섯 단계로 나누어 수행할 수 있다.


  1단계 - '왼발', '오른발'

  2단계 - '들림', '놓음'

  3단계 - '들림', '나아감', '놓음'

  4단계 - '뒤꿈치 들림', '들림', '나아감', '놓음'

  5단계 - '뒤꿈치 들림', '들림', '나아감', '낮아짐', '닿음'

  6단계-  '뒤꿈치 들림', '들림', '나아감', '낮아짐', '닿음', '디딤'


  ♠ 1단계 걷기 선

  보통 속도로 걷거나 빨리 걸을 수 있다. 걸으면서 발에 마음을 집중하고 각 걸음에 '왼발', '오른발'하면서 마음속으로 뇌인다. 한쪽 끝까지 와서 돌아가야 될 때는 그 지점에 서서 '회전', '회전'하면서 돌아 다시 '왼발', '오른발'하면서 걷기에 집중한다.

  ♠ 2 단계 걷기선

  각 걸음을 두 부분으로 나눠서 주목하는 방법이다. 발이 들리는 순간에 '들림', 내려놓을 때 '놓음'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주목한다. 뒤꿈치가 바닥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까지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면밀하게 관찰한다. 발에 닿는 감각이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차가운지, 따뜻한지 등에 주의하면서 주도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한쪽 발이 완전히 바닥에 닿았을 때 다른 쪽 발을 들어올린다. 끝까지 걸어서 멈출 때는 '멈춤', '멈춤'하고 주목한다. 돌아설 때도 천천히 발을 들어 돌면서 '회전', '회전'하고 주목한다. 완전히 돌아서서 다시 걷기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 서서 서 있는 자세에서 '서 있음', '서 있음'하고 나서 걷기를 시작한다.

  ♠ 3 단계 걷기선

  여기서는 발의 '들림', '나아감', '놓음'에 주목한다. 발을 들면서 '들림'에 주목하고, 발을 앞으로 옮기면서 '나아감'에,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놓음에 주목한다. 물론 걸음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의 모든 동작을 면밀하게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따라가야 한다. 걸으면서 식별될 수 있는 가벼움, 무거움 등의 모든 감각들을 알아채야 한다. 끝까지 걷고 난 다음 돌아설 때는 위의 1, 2단계의 요령대로 되풀이하면 된다.


  나머지 4, 5, 6단계도 위의 1, 2, 3단계와 같은 요령으로 하면 된다. 가령 한시간 동안 걷기 선을 한다면 초기 수행 단계에는 1단계 20분, 2단계 20분, 3단계 20분 등으로 시간을 안배하고 정진을 하면서 점차적으로 4, 5, 6단계의 정진을 한다. 또한 앞서도 지적했지만 좌선 전에 꼭 이 걷기를 하도록 한다.


  3. 서 있기 선 (住禪)


  '서 있음'은 걷기 선을 할 때 주로 하는 수행이다. 즉, 출발하기 전, 또는 다 걷고 멈춰 서서  돌아서기 전에 집중을 한다.

  '서 있음'에 집중할 때는 서 있는 자세와 함께 바닥에 발바닥이 '닿음'을 번갈아 가면서 주목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서 있기 선’은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다. 또 무릎관절이 약해지거나 꿈 같은 상태의 삼매에 빠질 수도 있다. 또 서 있는 동안 몸의 흔들림이나, 쓰러질 것만 같은 두려움을 경험했다는 수행자들이 많다.

  반면에 '서 있기 선’은 졸음이 심하게 올 때 정진을 하기에는 좋은 방법이다. '서 있음'에 마음 집중을 하면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비로 쓸어내리듯이 집중을 하거나, 가만히 서 있는 동안 일어나는 감각들에 집중할 수 있다. 또 가끔씩 '일어남'과 '꺼짐'에도 집중한다.

  통근 길의 전철, 버스에서도 정진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4. 누워서 하는 선 (臥禪)


  이 자세는 보통 정진(일과)이 끝나고 잠들기 전에 행하는 것으로, 진지하게 정진을 할 때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자세로 아주 주의 깊게, 빈틈없이 잠들지 않고 깨어있을수 있다면 오랫동안 정진을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잠들기 전에 보통의 가벼운 마음 집중으로 정진하다가 잠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눕는 자세는 몸의 오른쪽이 바닥에 닿도록 모로 눕는 것이 좋다(사자와). 등을 대고 반드시 눕거나, 왼쪽으로 누워서 편하다면 이런 자세도 상관없다. 누울 때의 동작에도 마음 집중을 하고 누운 후에는 '누움', '닿음' (머리, 어깨, 엉덩이, 다리, 발 등)에 주목하고, (복부의) '일어남'과 '꺼짐'이 분명하면 여기에 집중한다. 그 외에 일어나는 '생각', '소리 들림', '아픔' 등도 좌선 때와 같은 요령으로 집중한다. 이 정진이 잘 되면 수면상태에 드는 것과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알 수도 있다.


  5. 일상 생활에서 선


  염처경에서는 먹고, 씹고, 화장실 다니고, 옷을 입고, 벗고, 말할 때나 침묵을 지킬 때, 앞이나  멀리 볼 때 등 일상에 마음집중하기의 중요성을 설하고 있다. 생활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항상 마음집중이 되도록 훈련을 해야한다. 그렇게 될 때 마음집중은 강력해지고, 예민해지고, 생활에 유용해진다. 여기서 '항상'이란 끊임이 없음을, '모든일'이란 융통성을 말한다.

  일상의 행동에 마음집중을 적용하지 못하면, 정신적, 육체적 일들의 균형과 통합같은 마음집중의 효과를 감소시킨다. 일상 생활에서 알아채고, 집중해야 될 일은 아주 많다. 그렇게 하지 못함은 주위에서 일어나고, 영향을 받고 있는 일에 우리가 얼마나 무감각하고, 맹목적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무슨 일을 하면서 선(禪)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수행정진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생활하면서 늘 하게 되는 일에 조금씩, 조금씩 마음집중의 영역을 확대시켜 나간다면 언젠가는 완전한 마음집중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상 위에서 소개한 위빠사나 수행법은 가정에서나 단기출가수행(수련법회)에서 초기단계의 정진을 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정진과정에서는 예기치 않은 여러 가지 상황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럴 때는 수행경험이 있는 스님의 조언을 구하고 그에 따라서 정진해야 한다.


  원컨대 모든 수행자는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 열심히 정진하여 깨달음과 모든 고통의 소멸 상태인 니르바나[열반]를 증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부록 1. 염처경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부처님께서 한 때 쿠루국 백성들의 상거래 도시인 카마싸다마에서 쿠루국 사람들과 계셨다. 거기에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존재를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고, 고통과 비애를 여의고, 올바른 길에 도달하고 니르바나[열반]를 성취하기 위한 오직 한가지 방법이 있으니, 사념처(Four Foundation of Mindfulness, 四念處)가 그것이다.

  무엇이 사념처인가?

  분명하게 사물을 이해하고 집중하고 열심히 정진하는 비구는 몸[身]의 행동을 관찰하여 몸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거부감을 극복하느니라. 또 느낌[受]을 관찰하여 느낌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거부감을 극복하고…

  마음[心]의 활동을 관찰하여 마음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거부감을 극복하고 정신적 대상[法]을 관찰하여 정신적 세계에 대한 탐욕과 거부감을 극복하느니라.


  1. 몸


  “그러면 비구는 어떻게 몸을 관찰하는가?”


  (1) 호흡

  비구들아, 숲속 나무 아래나 조용한 곳에 가서 가부좌를 하고 앉은 다음 몸을 바로 세우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나서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에 마음을 집중한다.

  들이쉬는 숨이 길 때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쉬고 있다’라고 하고, 길게 내쉴 때 ‘나는 길게 숨을 내쉬고 있다.’라고 한다.

  짧은 숨을 들이쉴 때는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쉰다’라고 하고 짧게 숨을 내쉴 때는 ‘나는 짧게 숨을 내쉬고 있다’라고 한다.

  ‘호흡하는 몸 전체를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쉴 것이다’라고 스스로를 연습시킨다. ‘호흡하는 몸 전체를 경험하면서 숨을 내쉴 것이다’라고 스스로를 연습시킨다.

  ‘호흡하는 몸의 활동을 조용하게 하면서 숨을 들이쉴 것이다’라고 스스로를 연습시킨다. ‘호흡하는 몸의 활동을 조용하게 하면서 숨을 내쉴 것이다’라고 스스로를 연습시킨다…….

  이와 같이 몸의 활동을 내적으로, 혹은… 외적으로, 혹은… 내․외적으로 관찰한다.

  또 한 몸 안에서의 시작 요인, 혹은 소멸 요인을 관찰하고, 혹은 시작과 소멸 요인, 혹은 시작과 소멸 요인을 관찰한다. 혹은 다만 몸이 존재함을 알아채고 가능한 한 마음을 집중하면 이 세상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몸의 활동을 관찰하는 것이다.


  (2) 몸의 자세

  그리고 나아가서 비구는 걷고 있을 때 ‘나는 걷고 있다’라고 알고, 서 있을 때 ‘나는 서 있다’, 앉아 있을 때 ‘나는 앉아 있다’라고 알고, 누워 있을 때 ‘나는 누워 있다’라고 안다. 혹은 몸의 자세가 어떠한가를 안다.

  이와 같이 몸의 활동을 내적으로, 외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3) 충분한 주의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구는 드나듦에 충분한 주의를 해야 한다. 또 정면을 보거나 옆을 보는 것에, 구부리거나 펴는 것에, 가사를 입거나 바루를 가지고 있으메, 먹고, 마시고, 씹고, 맛봄에 충분한 주의를 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의 소리에, 걷고 서고 앉고 잠들고 깨고


  (4) 육체의 부정함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구는 이 몸이 피부로 싸여 있으면서 머리끝에서 발바닥까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음을 관찰한다.

  ‘이 몸 안에는 머리털․털․손톱․이․피부․살․근육․뼈․골수․콩팥․심장․간장․횡경막․지라․허파․창자․장간막․위장․근막․담즙․담․고름․피․땀․지방․눈물․기름․침․콧물․활액․오줌이 있다’고 관찰한다.

  마치 두 개의 구멍이 있는 식량 자루에 밭벼, 벼, 이집트 콩, 완두콩, 참깨와 쌀 등 여러 종류의 식량으로 차 있을 때 정상적인 눈을 가진 사람이 자루를 열어보고 ‘이것은 밭벼이다’, ‘이것은 이집트 콩이다’, ‘이것은 완두콩이다’, ‘이것은 참깨다’, ‘이것은 쌀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다. 마찬가지로 비구는 바로 이 몸이 피부로 덮여 있으면서 머리끝부터 발바닥까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 몸에는 머리털, 털, 손톱, 이… 활액, 오줌이 있다’고.

  이와 같이 몸을 관찰한다.


  (5) 물질적 요소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구는 이 몸이 그대로 물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관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라고. 마치 현명한 백정이나 그의 도제가 소를 도살하여 토막을 낼 때 크게 네 덩이로 나누는 것과 같다.

  같은 방법으로 비구는 이 몸이 그대로 물질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관찰한다. ‘이 몸에는 땅, 물, 불, 바람의 요소가 있다’라고.

  이와 같이 몸을 관찰한다.


  (6) 아홉 송장

  ①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구는 몸이 죽어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면 부풀어오르고, 퍼렇게 되고, 짓물러지고, 묘지에 버려진 것을 보면 이것을 자신의 몸에 다음과 같이 적용한다.

  ‘바로 내몸 역시 자연과 같아서 그렇게 될 것이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이와 같이 몸을 관찰한다.

  ②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신이 까마귀, 매, 독수리, 개, 재칼이나 여러 종류의 벌레들에 먹히는 것을 보면 이것을 자신의 몸에 다음과 같이 적용한다. ‘바로 내 몸 역시 자연과 같아서 그렇게 될 것이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③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신이 약간의 살과 피와 힘줄에 의해 연결된 해골로 변하는 것을 보면…

  ④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신이 살도 없고 피로 더럽혀진 힘줄에 의해 연결된 해골로 변하는 것을 보면…

  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신이 살과 피도 없이 힘줄에 의해 연결된 해골로 변하는 것을 보면…

  ⑥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신의 뼈들이 분리되어 여기는 손뼈, 저기는 발뼈, 정강이뼈, 넓적다리뼈, 골반, 등뼈 머리뼈가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것을 보면…

  ⑦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신이 조개색같은 흰뼈로 변한 것을 보면…

  ⑧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신이 일년 이상 지나서 한 더미의 뼈로 변한 것을 보면…

  ⑨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신의 뼈들마저 썩어 먼지로 변하는 것을 보면…

  그래서 이것을 자신의 몸에 다음과 같이 적용한다.

  ‘바로 내 몸 역시 자연과 같아서 그렇게 될 것이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이와 같이 몸을 관찰한다.


  2. 느낌


  “그러면 비구는 어떻게 느낌을 관찰하는가?”


  비구들아, 비구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 ‘나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알고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 ‘나는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고 있다’라고 알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할 때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안다.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 ‘나는 세속적인 즐거움을 경험한다’라고 알고, 세속적인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 ‘나는 세속적인 괴로운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안다.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 ‘나는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알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세속적인 느낌을 경험할 때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세속적인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알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정신적 느낌을 경험할 때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정신적인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안다.

  비구는 느낌의 시작을, 느낌의 소멸을, 혹은 느낌의 시작과 소멸을 관찰한다. 혹은 마음을 가능한 정도로 집중하여 느낌이 존재함을 이해하고 깨닫는다. 그러면 세상의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는 느낌을 관찰한다.


  3. 마음


  “그러면 비구는 어떻게 마음을 관찰하는가?”


  비구들아, 욕망이 있을 때 마음에 욕망이 있음을 알고, 욕망이 없을 때 마음에 욕망이 없음을, 증오가 있으면 마음에 증오가 있음을, 증오가 없으면 마음에 증오가 없음을, 어리석음이 있으면 마음에 어리석음이 있음을, 어리석음이 없으면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음을,

  산란한 상황 때문에 마음이 산란하면 그런 상황 때문에 마음이 위축됨을, 개발된 상태이면 마음의 개발된 상태를, 개발되지 않은 상태면 개발되지 않은 상태를,

  무엇인가 정신적인 우월함이 있으면 마음의 어떤 다른 우월함의 상태를, 어떤 정신적인 우월함이 없으면 마음의 다른 어떤 정신적인 우월함이 없는 상태를, 마음이 집중된 상태면 마음이 집중된 상태를, 집중되어 있지 않은 상태면 집중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자유로운 상태면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를, 부자유한 상태면 마음이 부자유한 상태를 안다.

  비구는 이런 방법으로 안으로나, 밖으로나 또는 안팎으로 마음을 관찰한다. 비구는 마음의 일어남이나 사라짐을, 혹은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한다. 혹은 마음의 존재함을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 가능한 한 마음을 집중한다. 그러면 세상의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아, 이와 같이 마음을 관찰해라.


  4. 정신적 대상


  “그러면 비구는 어떻게 정신적 대상을 관찰하는가?”


  ■ 다섯 가지 장애


  비구들아, 비구들은 정신적 대상으로서 다섯 가지 장애를 관찰한다. 어떻게 정신적 대상으로서 다섯 가지 장애를 관찰하는가?

  (1) 비구들아, 감각적 욕망이 있을 때 비구는 ‘나에게 감각적 욕망이 있다’라고 알고, 감각적 욕망이 없을 때 비구는 ‘나에게 감각적 욕망이 없다’라고 안다.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며, 일어난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알며, 그리고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린 감각적 욕망이 미래에는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안다.

  (2) 분노가 있을 때, 비구는 ‘나에게 분노가 있다’라고 안다…

  (3) 무감각함과 무기력함이 있을 때, 비구는 ‘나에게 무감각함과 무기력함이 있다’라고 안다…

  (4) 마음의 불편함이나 걱정이 있을 때, 비구는 ‘나에게 마음의 불편함이나 걱정이 있다’라고 안다…

  (5) 의심이 있을 때 비구는 ‘나에게 의심이 있다’라고 알고, 의심이 없을 때 ‘나에게 의심이 없다’라고 안다.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의심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고, 이미 일어난 의심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알며, 그리고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린 의심이 미래에 다시 어떻게 일어나지 않게 하는지 안다.

  비구는 이런 방법으로 정신적 대상들을 안으로나 밖으로, 또는 안팎으로 관찰한다. 혹은 마음의 대상이 존재함을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 가능한 한 마음을 집중한다. 그러면 세상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아. 이와 같이 마음의 대상들로써 다섯 가지 장애를 관찰한다.


  ■ 다섯 가지 집합(五蘊)


  비구들아,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구는 정신적 대상들로서 오온을 관찰한다. 어떻게 정신적 대상들로서 오온을 관찰하는가.

  비구들아, 비구는 이와 같이 물질적 형상[色]이 있으면, ‘그것은 이런 방식으로 일어나고, 이런 방식으로 사라진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느낌[受]이 있으면 ‘그것은 이런 방식으로 일어나고, 이런 방식으로 사라진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지각[想]이 있으면, ‘그것은 이런 방식으로 일어나고, 이런 방식으로 사라진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정신적 구성[行]이 있으면 ‘그것은 이런 방식으로 일어나고, 이런 방식으로 사라진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의식[識]이 있으면, ‘그것은 이런 방식으로 일어나고, 이런 방식으로 사라진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정신적 대상들로서 오온을 안으로… 깊이 생각한다.


  ■ 여섯 가지 감각의 토대(六處)


  비구들아,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구는 정신적 대상들로서 여섯 가지 내적 감각의 토대와 여섯 가지 외적 감각의 토대를 깊이 생각한다.

  어떻게 정신적 대상들로서 여섯 가지 내적 감각의 토대와 여섯 가지 외적 감각의 토대를 깊이 생각하는가?

  비구들아, 비구는 눈과 눈[眼]에 보이는 형상[色]을 알며, 그들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얽매임(번뇌)을 안다.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얽매임이 어떻게 일어나며, 일어난 얽매임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알며, 그리고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린 얽매임이 미래에는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안다.

  비구는 귀[耳]와 소리[聲]…, 코[鼻]와 냄새[香]…, 혀[舌]와 맛[味]…, 몸[身]과 접촉되는 대상[觸]…, 마음[意]과 정신적 대상[法]을 알며, 그들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얽매임을 안다.

  이와 같이 비구는 정신적 대상들을 안으로…, 깊이 생각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정신적 대상들로서 여섯 가지 내적․외적 감각의 토대를 깊이 생각한다.


  ■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分)


  비구들아,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구는 정신적 대상들로서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分)를 관찰한다. 어떻게 정신적 대상들로서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를 관찰하는가?

  (1) 비구들아, 비구는 주의깊음이라는 깨달음의 요소[念覺分]가 있을 때 ‘나에게 주의깊음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안다. 혹은 주의깊음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주의깊음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안다. 또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주의깊음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어떻게 일어나며, 어떻게 일어난 주의깊음이라는 깨달음의 요소를 발전시켜 완성하는지 안다.

  (2) 비구는 정신적 대상의 탐구라는 깨달음의 요소[澤法覺分]가 있을 때 ‘나에게 정신적 대상의 탐구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안다. 그리고 정신적 대사의 탐구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정신적 대상의 탐구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안다. 또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신적 대상의 탐구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어떻게 일어나며, 어떻게 일어난 정신적 대상의 탐구라는 깨달음의 요소를 발전시켜 완성하는지 안다.

  (3) 비구는 정진이라는 깨달음의 요소[精進覺分]가 있을 때 ‘나에게 정진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안다. 또 정진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정진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안다. 또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진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어떻게 일어나며, 어떻게 일어난 정진이라는 깨달음의 요소를 발전시켜 완성하는지 안다.

  (4) 비구는 즐거움의 깨달음의 요소[喜覺分]가 있을 때 ‘나에게 즐거움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안다. 혹은 즐거움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즐거움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안다. 또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즐거움의 깨달음의 요소가 어떻게 일어나며, 어떻게 일어난 즐거움의 깨달음의 요소를 발전시켜 완성하는지 안다.

  (5) 비구는 (몸과 마음의) 긴장의 완화라는 깨달음의 요소[輕安覺分]가 있을 때 ‘나에게 긴장의 완화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안다. 혹은 긴장의 완화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긴장의 완화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안다. 또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긴장의 완화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어떻게 일어나며, 어떻게 일어난 긴장의 완화라는 깨달음의 요소를 발전시켜 완성하는지 안다.

  (6) 비구는 마음집중이라는 깨달음의 요소[定覺分]가 있을 때 ‘나에게 마음집중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안다. 혹은 마음집중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마음집중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안다. 또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마음집중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어떻게 일어나며, 어떻게 일어난 마음집중이라는 깨달음의 요소를 발전시켜 완성하는지 안다.

  (7) 비구는 마음의 평정이라는 깨달음의 요소[念覺分]가 있을 때 ‘나에게 마음의 평정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안다. 혹은 마음의 평정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마음의 평정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안다. 또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마음의 평정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어떻게 일어나며, 어떻게 일어난 마음의 평정이라는 깨달음의 요소를 발전시켜 완성하는지 안다.

  이와 같이 내적으로 정신적 대상들을 관찰한다…

  비구들아, 이와 같이 비구는 정신적 대상들로서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를 관찰한다.


  ■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


  비구들아,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구는 정신적 대상들로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한다. 어떻게 정신적 대상들로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하는가?

  비구들아, 비구는 사실에 의해서 ‘이것은 둑카[苦]이다’라고 알고, 사실에 의해서 ‘이것은 둑카의 원인[集]이다’라고 알고, 사실에 의해 ‘이것은 둑카의 소멸[滅]이다’라고 알고, 사실에 의해 ‘이것은 둑카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이다’라고 안다.

  이와 같이 비구는 내적으로 정신적 대상들로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한다…

  비구들아, 이와 같이 비구는 정신적 대상들로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한다.


  비구들아, 누구라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칠 년간 사념처를 수행하면, 그는 지금 여기에서 ‘가장 높은 지혜[아라한]’를 얻거나, 만약 아직 조금 남음이 있다면 불환과(不還果)를 얻을 수 있다.

  비구들아, 칠 년간이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육년, 오년, 사년, 삼년, 이년, 일년 동안 사념처를 수행하면, 그는 지금 여기에서 ‘가장 높은 지혜’를 얻거나, 만약 아직 조금 남음이 있다면 불환과를 얻을 수 있다.

  비구들아, 일년간이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칠개월, 육개월, 오개월, 사개월, 삼개월, 이개월, 일개월, 그리고 보름 동안이라도 사념처를 수행하면, 그는 지금 여기에서 ‘가장 높은 지혜’를 얻거나, 만약 아직 조금 남음이 있다면 불환과를 얻을 수 있다.

  비구들아, 보름 동안이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주일 동안이라도 사념처를 수행하면, 그는 지금 여기에서 ‘가장 높은 지혜’를 얻거나, 만약 아직 조금 남음이 있다면 불환과를 얻을 수 있다.

  이 때문에 “비구들아, 사념처야말로 존재를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고, 고통과 비애를 여의고, 올바른 길에 도달하고 니르바나를 성취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비구들은 만족하여 기뻐했다.


부록 2. 위빠사나 수행정진중에 일어나는 문제점들


  다음은 실제 수행정진중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들이다. 좋은 지도자가 있어서 수시로 점검을 받고 문제점들은 질의응답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으나, 혼자서 수행해야 할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이럴 경우에 아래의 각 문제들에 대한 답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말레이지아에서 위빠사나를 지도하고 계시는 수지바스님께서 수행자들에게서 받은 질문 가운데 일반적인 것만을 모은 것이다. 진지한 수행인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왜 혼란이 일어날까?


  마음집중 수행이란 어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다. 마음집중 수행을 하면 경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유익하든, 유해하든, 안과 밖의 조건들에 마음이 빈틈없는 경계를 하게 된다.

  위빠사나 수행이란 모든 순간에 일어나는 육체적, 정신적 작용에 강력하고 끊임없는 마음집중을 연마하는 것이다. 이 마음집중이 강력하고 바른 방향일 때, 망념의 두꺼운 베일을 벗겨낼 수 있고, 속진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렇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비록 한다고 하지만 바른 마음집중 수행이 아니다.”


  수행정진중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1. 욕망과 가치의 모순

  2. 두려움

  3. 부족


  1. 욕망과 가치의 모순


  가장 일반적인 것은 물질과 정신적 가치 사이의 모순이다.


  한 길은 세 속의 길

  또 한 길은 니르바나를 얻는 길

                           - 法句經 -


  (1)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정신적 행복이 세속적인 행복보다 우선된다고 알고 있다. 또 정신적 행복의 성취가 물질의 소유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다. 현실에 대한 욕구는 아직도 강력하고 지혜는 아직 보잘것없어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명적 삶을 살아간다.

  정신적 가치와 세속적 욕망을 동시에 채우려고 애를 쓰지만 스스로가 그 둘을 서로 갈라놓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쪽을 무시하려고 애쓰지만 그것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불교도는 삶 전체를 통하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세속적인 문제들을 탈속적인 자유로움으로 올려놓는다는 정신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가장 근원적인 자유를 위한 자기 연마를 포기하는 것은 운명에 자신을 내맡겨버리는 가련한 행위이다. 하지만 그것은 니르바나의 증득과 같은 최상의 목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이나 소유물들을 다 포기할 필요는 없다.

  니르바나의 증득이 불교인들의 궁극적 목표이긴 하지만 우리 자신의 결점들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기간만이라도, 삶의 어떤 부분만이라도 물질적 욕망을 버리고 정신적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 이차적 목표를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목표를 설정하면 혼란을 멈추거나, 적어도 많이 줄어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목표는 좀 더 진보된 궁극의 목표(니르바나)를 향해 착실하게 나아간다.

  (2) 또 다른 혼란은 지혜와 동정 사이의 선택의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도(道)의 성취란 ‘완전히 깨달은 자(무상정등각자)’가 되기 위한 보살행과 서원을 더 이상하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이유로 위빠사나 수행을 꺼리기도 한다.

  실제는 보살이 되겠다는 굳은 서원을 한 사람이라면 그럴 우려는 없지만 수행정진을 위해 깨달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 부처(깨달은 사람 : 아라한)가 되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

  한 쪽은 실용적인, 또 한 쪽은 이상주의적인, 둘 다 아주 고귀하고 숭고한 길이다.


  2. 두려움


  정신 이상을 포함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정진중에 일어나는 두려움들은 수행정진의 발전을 막거나 정진을 포기하게도 한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수행을 포기할 수 있는데 비정상적인 행동의 성향들과 잘못된 수행 두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자.


  (1) 비정상적인 행동의 성향

  우리 마음 저 깊은 곳에는 이생에서 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여러 생 동안 쌓여온 여러 가지 잠재적 성향들이 숨어 있다. 이런 잠재적 성향들이 정진중에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수행자는 이렇게 나타나는 성향들을 스스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정복당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부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어날 수도 있다. 보통 신경과민으로 고생한 사람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증세이다. 이런 성향을 보일 때에는 주위에서도 아주 조심을 해야 한다. 그래서 지도자 없이 하는 강도 높은 수행정진은 피하는 것이 좋다.

  정진 전에 세속적인 문제들을 모두 놓아버리고 정진에 임하는 것이 최선이고, 경험있는 지도자 가까이에서 수행하면서 늘 조언을 구하고 정진중의 문제들을 상의해야 한다.


  (2) 잘못된 수행정진

  바른 마음집중과 잘못된 마음집중의 차이는 주의깊음이 있고 없음의 차이이다. 마음의 주의깊음이 없을 때, 탐욕․성냄․미혹에의 마음집중이 끝없이 증가할 것이고 마음은 아주 혼란스러워져 버린다. 이것은 화가 났을 때 화가 몇 배로 증폭될 수 있음을 말한다.

  탐욕이나 미혹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의 이런 본성은 미친 사람의 마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잘못된 마음집중 수행을 계속하면 더 그렇게 되기 쉽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① 수행에 임할 때 그 동기가 잘못된 경우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참선을 한다. 어떤 사람의 수행정진 동기가 이기적일 때 수행 후에는 더 이기적이고 기만적으로 되어 버린다. 위빠사나의 수행목표는 정신과 육체의 작용에의 주의깊고 끈질긴 마음집중을 통하여 마음의 더러운(탐욕, 화, 기만 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억만장자가 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존재들(귀신 따위)과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또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 등을 얻기 위해 참선을 한다면 지금 바로 정진을 그만둬야 한다.


  ② 목표를 향한 태도 또한 고려해야 할 중요할 요소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주 이상적인 목표를 설정할 수 있지만, 기대했던 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그 목표를 부숴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낙담해서 울거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의 성취할 수 없음을 확신시키려고 한다.

  질문 : 우리가 미쳐가고 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답변 : 당신이 스스로 아라한(또는 그와 같은)이라고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될 때, 당신의 전생을 회상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다른 사람들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당신은 미쳐가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수행이 진전되면서 나타날 수 있는 이런 현상에 특히 정신을 차려야 한다.


  ③ 집중의 대상을 잘못 취급할 때

  수행과정에 심한 공포나 희열(환상, 목소리 또는 느낌)등 평범하지 않은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깊게 그 현상을 주목하면 마침내는 사라져 버린다. 만약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면 그 현상을 무시해버리고 다른 위빠사나의 대상 (‘일어남’과 ‘꺼짐’같은)에 주목한다. 그래도 그 현상(공포나 희열)이 강렬하게 계속되면, 일어나서 걷기 선을 한다.

  정진중에 일어나게 되는 이런 현상은 집요하게 계속적으로 나타나서 마음을 혼란시켜 정진을 방해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날 땐 무시해 버리고 정신상태에 그 현상이 사라질 때까지 집중해야 한다. 이런 원하지 않는 현상들은 극히 강렬하고 집요하기 때문에 일단, 정진을 멈추고 조언을 얻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3) 고통의 공포와 육체적 무력감

  고통은 일상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선 수행중에도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선 수행에서는 이 고통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강하고 확고하게 하는 수행정진으로 이용하고, 고통의 본성(무상, 고, 무아)을 깨달을 수 있는 좋은 정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처음 수행정진에 임하는 수행자는 조금만 참으면 사라져버리는 평범한 아픔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집중이 깊어짐에 따라서 고통은 강해질 수 있고 또 고통의 사라짐을 경험하기도 한다.

  성숙된 수행자는 고통을 아주 빈틈없는 마음집중을 할 수 있는 명확한 대상으로서 오히려 환영하기도 한다. 또한 너무 많은 고통을 알게 될 때 공포도 함께 일어난다. 이것은 마치 이로운 것이지만 쓰기 때문에 약 먹기를 꺼리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법(法)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이 이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또 선 수행으로 나타나는 기쁨과 많은 효과를 마음에 지닐 수 있고, 고통을 무시해버리고 다른 대상에 집중하는 노력을 할 수 있다. 고통이 일어날 때 주목해라. 만약 그것이 되지 않을 대는 자주 부처님을 떠올리면 더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의 공포에 주목하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아주 불구가 되거나 죽을 수도 있다. 이때는 몸에 병이 없는 경우와 병이 있었던 경우(심장마비, 치질, 천식, 고혈압)가 있다.


  ① 병이 없는 경우

  이때는 정진을 멈추면 고통은 즉시 사라진다. 정진을 멈추기 전에 먼저 그 의도(멈추려는)에 주목한다. 그러나 한 번 그 공포가 사라질 때까지 주목해봐야 한다. 고통이나 공포는 사실 그 뿌리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고 여섯 시간 이상을 앉아 있기도 한다.


  ② 병이 있었을 경우

  이 경우에는 정진에 임하기 전에 의사의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위빠사나에서 고통과 공포는 가장 먼저 직접적으로 주목이 되지만, 몸에 병이 있는 경우에는 고통이 심하고 지속적이기 때문에 고통에 주목해서는 안된다. 대신 병의 고통을 무시해버리고 다른 대상에 집중을 해서 마음집중과 주의깊음이 병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만성적이고, 불치라고 생각하는 많은 병들이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극복되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강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또 수행정진중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큰 행운이 아닐까?


  3. 부족함


  (1) 수행 장소에 대한 불만

  이것은 가장 나쁜 변명 중의 하나이다. 주위가 시끄러운 곳이라면 ‘들림’ 또는 ‘소리’로 집중할 수 있고 춥거나, 더울 때는 ‘추움’, ‘더움’으로 집중할 수 있다. 또한 진지하기만 하다면, 쾌적하고 조용한 수행장소를 찾는 것도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2) 불충분한 시간

  직장과 가족들에 대한 의무 때문에 수행정진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는 표면상 그럴듯한 것 같다. 그러나 간절하게 정진을 하고 싶다면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서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충분한 시간은 되지 않더라도, 얼마 동안은 정진이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마음만 굳데 먹는다면 일상의 행동에 충분히 주의하면서 마음집중 수행을 할 수 있다. 즉, 운전을 할 때나, 말을 할 때, 걸을 때, 생각할 때 등 모든 순강에 태연하게, 그러나 주의깊게 마음집중을 할 수 있다.

  그 밖에 관용, 절제, 지혜, 활기, 자제, 인내, 정직, 결단력, 자비 등과 같은 순수한 마음집중의 미덕을 연마할 수 있다.


  (3) 마음집중의 부족

  위빠사나 정진을 포기하는 또 다른 일반적인 이유는 마음이 몹시 불안하기 때문이다. 수행정진에는 평화를 얻는 대신 시간만 낭비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자.


  ① 지켜야 될 계율을 잘 지켰을까?

  매일의 행동들을 어떻게 절제해 오고 있는지?

  만약 본능적 행동에 탐닉해오고 있었다면, 마음이 어지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악을 피하는 것이 마음집중의 기초이고, 이것 없이는 정진을 할 수 없다. 일상의 행동들에도 주목하기를 계속하면, 마음집중이 가능할 것이다.


  ② 하루 몇 시간 동안 정진을 하고 있을까?

  매일, 진지하게 하고 있을까?

  진지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규칙적으로,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정진하고 있다면 마음집중은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③ 바르고, 완전한 지도를 받았을까?

  규칙적인 개인면담[점검]을 받고 있느냐?

  정진이 잘 되어가고 있지 않았다면, 바른 지도를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마지막 해탈, 니르바나를 증득할 때까지 여러분들의 끊임없는 진지한 정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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