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부지런하시고 긍정적이라 보기가 좋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저의 궁금함을 여쭈어도 될련지요? 자성 즉 불성에 대해서 입니다. 나를 다 비우면 내 안의 자성이 알아서하고, 믿음이 강할수록 자성은 마치 전지전능한 분처럼 처리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연기론에서 '무상'과 '무아'를 내 세우며 고정된 현상도 고정된 나도 부정하였습니다. 만일 자성을 주장하면 고정된 실재가 존재한다는 뜻이니 '무아'와는 다른 것이고, 텅비운다는 '공'의 개념과도 거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두가지 내용이 공존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성은 대성불교에 와서 주장한 것이니 부처님 말씀과는 거리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이상 범수님 질문전문입니다

 

먼저 몇가지 전제조건으로서

불교의 가장 핵심이론이라 할 수 있는 내용 몇가지 함께 알아보도록 합니다

 

참고로 아래글은 에전에 공부하느라 참고하였던 질문에 도움될만한 소개글입니다

 

삼법인(三法印)

법인(法印, Dharma-mudra)이란 ‘법의 표식’ 또는 ‘불법의 특징’을 말한다. 도장 인(印)자를 쓴 것은 도장이 언제 어디서나 같듯이 부처님의 가르침도 언제 어디서나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행(行)은 무상(無常)하고[諸行無常], 모든 법(法)은 무아(無我)요[諸法無我], 열반(涅槃)은 적정(寂靜)하다[涅槃寂精]”는 것이 삼법인(三法印)이다.
한편 여기에 ‘일체(一切)는 괴로움[一切皆苦]’이라는 것을 합하여 사법인(四法印)으로 할 때도 있다. 요컨대 삼법인이란 불교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근본 원리가 되는 것으로서 존재의 실상을 나타내는 불교적 사고의 3대 원리라 할 수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행(諸行)이란 정신계와 물질계의 모든 현상을 총칭하는 말이다.
인간으로서 태어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과정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한다고 하여도 인간은 영원히 생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자연 역시 무상(無常)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거대한 천체로부터 작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태어나고[生], 머물고[住], 달라지고[異], 없어지고 [滅]마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지(地)·수(水)·화(火)·풍(風)[이를 4대(四大)라고 함]과 같은 물질적 요소 또한 무상(無常)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현상은 스스로 독립되어 상존(常存)하는 것이 아니고 한 순간의 정지도 없이 무상하며 생멸변화한다는 불교의 무상설(無常說)은 일체가 무상함을 깨닫고, 집착이나 교만심을 버리게 하며 순간순간의 행위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결코 허무주의나 비관적인 현실관이 아니요, 올바른 인생관을 수립하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제행무상은 나를 중심으로 하는 모든 환경이 덧없음을 지적한 것이며,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현재의 환경에 집착할 필요가 없음을 가르치는 교훈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현상은 고정불변(固定不變)한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의미이다. 즉 생멸변화(生滅變化)를 벗어난 영원불멸의 존재인 실체(實體)와 본체(本體)라 불리는 아(我)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체제법(一切諸法)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대 원소가 모이고 흩어져서 변화하는 것으로 공간적 실재성(實在性)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에 대해 ‘나’의 절대적인 부정이나 참다운 ‘나’의 탐구를 배격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불교의 무아설은 ‘나’의 절대적인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나’를 찾게 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참다운 ’나’는 그러한 착각의 부정을 통해서만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의 실질적인 의미는 ‘나’라는 관념이 인간의 사유에 의해 형성된 것일 뿐이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아집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윤리적 주체로서 인식하고, 나아가 이상으로서 실현되어야 할 ‘나’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되, 그 ‘나’는 진실에 합당해야 함을 설한 것이다.


열반적정(涅槃寂靜)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설(說)은 현상계에 대한 불교의 철학적인 이지적(理智的) 판단에 의하여 확립된 진리관이다. 이에 대하여 열반적정설은 불교의 종교적인 실천에 의하여 실현될 당위의 이상세계라 할 수 있다.
열반(Nirvana)이란 등화나 촛불을 ‘불어 끄는 것’ 또는 ‘불어서 꺼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열반은 니르바나의 음을 옮긴 말이고 적정은 그 의미를 옮긴 말이다. 온갖 번뇌 망상의 불을 불어서 끈 때의 심경은 일체의 대립이 없고 모순을 초월하여 고요하고 원만하고 청정한 상태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상태를 열반적정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열반적정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온갖 노력을 기울여 우리의 욕망을 진실 추구의 방향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도달되는 것이다. 참다운 삶을 찾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없이는 열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으며 구할 수도 없다. 그것은 초월의 경지가 아니라 더불어 살면서 자유를 구현하는 상태이다. 따라서 그것은 초능력이 발휘되는 경지가 아니며 불가사의하거나 초자연적인 경지가 아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을 거치면서 도달되는 인격의 완성, 이것이 바로 현실적인 의미의 열반적정이라 할 것이다.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현상은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일체는 무상(無常)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단정하고, 괴로움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세상에 태어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것은 괴로움이다.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求不得]은 괴로움이다. 그러므로 오온(五蘊, 즉 色 : 물질적 요소, 受 : 감각, 想 : 표상, 行 : 의지, 識 : 의식, 오온에 대해서는 후술함)도 괴로움이다.[五陰盛苦]
이것을 불교에서는 여덟가지 괴로움[八苦]이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고고(苦苦)·행고(行苦)·괴고(壞苦)의 세가지 괴로움을 들 때가 있는데, ‘괴로움의 괴로움[苦苦]’은 개체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는 괴로움을 뜻하고, ‘부서짐의 괴로움[壞苦]’은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상 부서지게 되는 괴로움이다.
이러한 괴로움의 교설을 보고 불교를 현실 부정적 또는 현실 도피적 염세 종교로 단언한다면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종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실해야 한다. 인간의 실존이 괴로움이라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에 입각해서 삶의 가치를 모색해야 한다. 진실을 외면하는 태도나 진실에 미치지 못하는 견해를 결코 용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 현실이 고통임을 지적한 것은, 그렇기 때문에 그 고통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라는 당위적인 표명이며, 불교가 바로 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할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교훈에 따라 자신의 고통을 철저히 인식하는 것은 삶의 자세를 정립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우선 자신이 처한 진실, 그리고 현상 세계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바르고 타당한 목표와 자세를 설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선 진실을 올바로 깨닫는 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둘러싼 모든 존재하는 현상과

그 현상을 통철하는 절대적인 진리를 밝히는 것이고

열반적정은 그 절대적 진리의 이상적 실현을 위한 종교적 정신적 목표

즉 이상세계의 최종점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자성불성은.....

 

자성·진심 혹은 불성이라고 일컫는 이것은
바로 우주의 근본 바탕이요,‘너,나‘나’나 할 것 없이
공통하고 또한 동일하게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 매몰되고 이끌리다 보니 잊고 살아갑니다.
마치 바닷물에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일어나는데
우리는 그 물결만 보고 바닷물을 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물이란 것은 추위를 만나면 얼음으로 변하고,
더운 열기를 만나면 수증기로 변하고,
수증기가 다시 찬 기운을 만나면 비라는 모습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비가 되어 내리면 다시 그것이 그 지형에 따라서
아래로 흘러서 시냇물이 되고
시냇물이 흘러가다 보면 강물이 되어 흐르고,
또 강물이 다시 흘러가다 보면 바닷물이 되고
이 바닷물이 열기를 만나 수증기가 되어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며
하나의 ‘사이클’이 되어 되풀이됩니다.하지만 그 근본은 물입니다

 

위의 예처럼

우리의 감각기관에 의해 자각하는 모든 만물은 안개나 빗물등으로 변하는 것처럼 -->제행무상

또 그 변함에 정해져 보이는 비 강물 시냇물 등등의 것들은 실제는 상대적 진리일 뿐이고-->제법무아

위의 예에서 보듯 그 유일한 절대변하지 않는 것 물 즉 절대적 진리 이것을 바로 --->자성 즉 불성

즉 여래장(如來藏) 이라고 합니다

 

질문하신 것을 다시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부처님은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자각하는 모든 자아중심적인 우주세계관을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통해 깨뜨려 설명하신 것이고

 

그래서 자성불성은

인간이라는 개인과 집단의 이기적 사고와  사회와 시대의 편견과 오만을  

뛰어 넘어 비록 보이지 않지만 일관되어 통찰하는 절대적 보편적 기준으로서 선이라는

진리를 찾아 모든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이상세계를 구현하자고 설명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는 자성불성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일관된 논리이자 깨우침이신것입니다

 

즉 모든 만물이 변하고 그 변하는  것들에는 본체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아는 그것이 바로 자성불성이다라는

아주 대단한 가르침인것입니다  

 

부처님의 큰 깨우침 발치에도 못이루는 수행승

짧은 소견으로 누가 될까 심히 염려 스럽습니다만

더 나은 선지식이나 또 깨우침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이곳을 통해 소개해 주시고

가르침 주시면 진심으로 감사하구요

 

오늘 덕분에 여러가지 공부 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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